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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내게 고난과 그리움의 은유다
 지리산은 내게 고난과 그리움의 은유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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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좀 편하다 싶을 때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이런 때는 입에서 단내가 날만큼 몸을 혹사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머리로 상상하는 고통과 실제 몸이 경험하는 고통이 같다면 이런 생각을 쉽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기대에 벅차서 지리산을 찾았다가 가파르고 험준한 산길을 만나 여지없이 환상이 깨지는 당혹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렇다고 지리산에 온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고통은 결코 즐길만한 것이 못되지만 고통 뒤에 오는(때로는 고통과 함께 오기도 하지만) 보상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산을 웬만큼 타본 사람이라면 정상에서 맛보는 쾌감을 그 첫 번째 보상으로는 꼽지 않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내게 있어서 그 '무엇'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다시 산을 찾게 되기까지 나는 산에 대한 그리움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산행의 고달픔이 클수록 그리움이 더 깊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지리산을 자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내게 지리산은 고난과 그리움의 은유인 셈이다. 문제는 내 나이다. 요즘은 나도 내 나이가 믿기지 않아 허허 웃어버리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몸은 정직하기만 하다. 산행을 앞두고 낮은 야산을 몇 차례 오르는 식의 준비산행으로 얼마만큼은 체력을 보완하고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지만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지리산에 가고 싶어지는 날이면 구례에서 성삼재까지 가는 군내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내게 승용차가 없기도 하지만 노고단까지 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보다는, 지리산 주능선을 밟아보는 맛을 잠깐이나마 즐긴 뒤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시원하고 아름다운 피아골 계곡을 따라 직전마을로 가는 코스를 타기 위해서는 버스가 필수다.

구례-성삼재 버스에서 겪은 황당한 일

지리산 피아골 계곡의 맑은 물
 지리산 피아골 계곡의 맑은 물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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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정상에서 피아골 직전마을까지는 장장 8킬로다. 이 길고 가파른 내리막길이 결코 만만치는 않지만 아직은 이 코스를 즐기는 편이다. 가끔은 지리산을 맛보고 싶지만 길을 잘 몰라서 엄두를 못 내는 지인들의 안내를 자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리산에 들기 위해 구례에서 성삼재로 가는 군내버스를 탈 때는 황당한 일을 겪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옆자리에 동행인이 있을 경우는 눈앞에 닥친 기막힌 상황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어야하는 괴로움 또한 크다.

지난 6월 6일, 나와 동행인(원어민 교사)을 포함한 열서너 명 쯤 되는 등산객을 태운 노고단(성삼재) 행 군내버스가 구례 시외버스터미널을 출발한 것은 오전 10시 20분이었다. 버스는 곧 구례 읍내를 벗어나 유월의 신록이 눈부신 시골 마을의 정겨운 풍경을 보여주며 지리산을 향해 신나게 달렸다. 그러다가 산을 휘돌아 올라가는 도로 중간에서 차가 멈추었고, 맨 앞자리에 탄 한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 입장료를 안 내려고 합니다. 이 버스가 천은사를 들르지도 않는데 천은사 입장료를 징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때문에 조금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고 해서 미리 양해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안 낼 겁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고민을 하고 있었던 터였던 것이다. 부당한 징수를 거부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연히 거부해야하지만 그 결과가 생각처럼 좋게 귀결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부당한 징수에 맞서려는 그의 당당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지지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다른 승객들도 박수로 화답을 해주었고, 저들의 행위가 엄연한 불법이므로 경찰의 도움을 요청하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불과 달포 전에도 나는 같은 노선의 버스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도 동행인이 옆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지리산에 가기 위해 서울에서 새벽같이 내려온 동행인에게 나는 버스가 지리산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조금 있으면 차가 멈추고 절의 입장료를 받기 위해서 두 명의 직원이 올라올 거예요. 이 버스는 절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성삼재로 갈 건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거죠. 저들의 주장은 이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 일부가 절 사유지라는 건데 그 문제는 이미 법으로 판결이 난 거거든요. 아무리 절의 사유지라고 해도 도로를 점거하고 통행을 방해하는 것은 불법이라고요. 그런데도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막무가내로 돈을 걷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요? 입장료 징수를 거부할까요? 그냥 낼까요?"
"당연히 거부해야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근데 다른 승객들이 싫어할 수도 있어요."
"왜요? 같이 거부하면 되죠."

"근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자기 차를 가지고 왔으면 그냥 안 내고 가버리면 되는데 버스에 탄 사람들은 공동운명체가 되는 거죠. 버스 기사도 마냥 차를 대기시켜 놓을 수도 없을 테고요. 결국은 돈을 낼 건데 시간만 지체하는 꼴이 되는 거죠."

"참 어처구니가 없네요. 다른 산도 아니고 지리산 초입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요."

"정부나 지방관청에서 나 몰라라하고 방관하고 있는 사이에 시민들이 이런 부당하고 불편한 일을 겪고 있는 거죠.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싸움만 하고 가실 수는 없잖아요. 그냥 입장료 낼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1600원을 내고 지리산에 갔다... 아, 지리산이여

아 지리산! 지리산을 욕되게 하는 자 누구인가?
 아 지리산! 지리산을 욕되게 하는 자 누구인가?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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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두 명의 남자가 버스에 올라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입장료 징수를 하겠다고 말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버스가 천은사를 가지도 않는데 왜 입장료를 내야하느냐는 목소리가 함께 터져 나왔다. 이에 대한 저들의 반응은 이미 예상한 대로였다.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의 일부가 절 사유지라는 것!

이에 대해 한 승객이 "도로 부지 중 일부가 천은사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지방도로는 일반인의 교통을 위해 제공 되는 것이며, 따라서 문화재를 관람할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 관람료를 내야만 도로를 통행할 수 있게 한 것은 불법"이라는 판결문의 일부를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읽어주었지만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그들은 이번 판결이 소송에 참여한 74명의 원고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아도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십분 쯤 지났을까? 우리 쪽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두 명의 경찰관이 버스에 올라왔다. 우리는 경찰관들에게 법원의 판결도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부당한 입장료 징수를 강요하고 있는 천은사 소속 직원들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경찰들은 얼마 전에도 시민들이 천은사 직원을 고소한 일이 있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때 내가 끼어들었는데 경찰관은 잘 안 들린다며 앞으로 나와서 얘기해보라고 해서 앞으로 나갔다.

"저들이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해서 도로를 불법 점거하고 들어가지도 않을 천은사 입장료 징수를 강요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그것은 엄연한 불법입니다. 그리고 이번 판결이 소송에 참여한 74명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은 보상 문제에 관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74명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수를 해도 좋다는 그런 판결이 아닙니다. 저들의 행위는 엄연한 불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저 사람들을 고소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저들의 부당한 입장료 징수를 거부합니다. 경찰관님이 입회한 상태니까 법과 상식에 입각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십시오. 우린 빨리 이곳을 통과해서 지리산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경찰관들은 난색을 표했다. 자기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두 경찰관의 행동은 소극적이었지만 결국은 천은사 직원들의 부당한 요구에 군소리 말고 응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승객들 중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이는 경찰관들의 소속과 이름을 밝힐 것과 사진 촬영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날 우리의 싸움은 거기까지였다. 모처럼 승객끼리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의기투합하여 후회 없는 싸움을 했기에 박수를 치며 서로를 격려했지만 결국 우리는 담벼락조차 본 적 없는 천은사 입장료 1600원을 내고 지리산에 갔다. 아, 지리산이여!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나를 바라보며 사태의 자초지종을 묻는 나의 외국인 동행인에게 나는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이렇게 말했다.

"쪽 팔리니까 그냥 말 안 할래."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지리산 성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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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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