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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불러만 주십쇼"

최근 남북 군사대치 상황에서 예비군 청년들의 SNS 등장은 장안의 화제였다. 이들은 '페이스북 육군 페이지' 등에서 자신의 군복 사진을 올리고, "명령대기 중 불러만 주십쇼", "북괴 새끼들 다 덤벼" 같은 댓글을 달며 등장했다. 심지어 장난감 총 사진을 올리고 "나라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들지만 "자폭하라면 하겠"다던 청년도 있었다.

대중은 열광했다. '좋아요'가 쏟아지고 "자랑스럽습니다", "눈물 납니다", "심쿵심쿵" 등의 찬사가 줄줄이 달렸다. 분위기는 엄숙하기보다 차라리 축제적 열광이었고, 놀이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그것은 기성언론들이 'N포 세대'로 곧잘 묘사하던 '루저' 감수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성언론은 발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동아일보>는 이들을 "신 안보세대"로 규정했고, <채널A>는 보다 노골적으로 "이런 2030세대의 모습이 내년 총선의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도발 소식에 SNS에 쏟아진 '예비군복 인증' 사진과 글. 그들은 '전쟁불사'가 아닌 '사격중지'를 외칠 수는 없었던 걸까.
 북한 도발 소식에 SNS에 쏟아진 '예비군복 인증' 사진과 글. 그들은 '전쟁불사'가 아닌 '사격중지'를 외칠 수는 없었던 걸까.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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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고 싶은 욕구, 현실은 '헬조선'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 악셀 호네트 교수는, 사람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지녔다는 데 주목한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또 인정받을 때 행복하고, 반대로 존엄성을 무시당하면 울분을 느끼기에 십상이다. 울분을 느끼면 '나를 좀 사람답게 대우해달라'는 식의 인정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게 노동자들의 파업일 수도 있고, 대학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특히 기득권을 향한 인정투쟁들은, 사회가 고인 물처럼 썩지 않게 꾸준히 체제를 변화시키며 이바지한다. 건강한 사회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 방식을 조정하고 다양화하며 진보하기 때문이다.

다만 강준만 교수는 그의 저서 <생각의 문법>에서 우리 사회의 인정 방식이 별로 다양하지 못함을 비판했다. '왜 우리는 'SNS 자기과시'에 중독되는가'라는 글이었다. 이 사회는 권력(權力)과 금력(金力) 위주로 인정이 이뤄지다 보니 자기과시가 너무 심해진다는 지적이다.

최근 급부상한 '헬조선' 담론도 이와 유사한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나라의 암담한 현실을 '헬조선(지옥+조선)'으로 묘사하고, '탈조선(나라를 떠나는 일)'이 불가능할 바에야 '죽창'을 들겠다는 청년들의 자조적 분위기다. 헬조선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기득권은 유리하고, 변변치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무수저'들은 애초에 불리해 계층이동이 힘들다. 나무수저들에게 권력과 금력 위주의 사회는 인정받을 구석이 잘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회다(관련 기사: 지옥보다 못한 '헬조선' "노오력은 해봤냐"는 꼰대들).

반면 평균적인 청년들에게 군대란, 사지 멀쩡하고 열심히 삽질하고 선후임 관계 원만하면 '에이스'로 인정받고 후일 '짬대우(서열 대우)'도 받던 곳으로 기억에 남는 곳이다. 단지 전역하고 보면 사는 게 녹록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전역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던 이들이, 군사대치라는 흔치 않은 기회(?)가 도래했을 때 "불러만 달라"며 인증 놀이를 하는 건 예사롭지 않다.

이때 현역 시절 무용담을 방언 터뜨리듯 말하고, 향수에 젖는 이들에게 어떤 '자긍심'이 감지되는 건 더욱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 자긍심을 얻는다. 이들에게 국가가 실제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불러만 주십쇼"하고 인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인증놀이가 실질적이고 '값진' 인정을 이끌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들의 죽창은 '평범의 벽'을 뚫지 못하는가

그럼 헬조선인들의 인정투쟁은 왜 평소에는 번번이 기득권들을 향하진 못할까. 닦달하는 주입식 교육, 살인적 취업난, 요원한 결혼과 육아, 의무는 많은데 권리는 적은 복지, 굴종을 강요하는 노동조건 등…. 헬조선에서 '죽창'을 들 명분들은 이미 차고 넘치는 데 말이다. 어떤 장벽이 가로막고 있진 않을까. 이를 가늠해 보고자,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회사 아르스 프락시아 연구원 김학준의 논문 하나를 참고해 봤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는 사람들을 무한경쟁으로 닦달하며 빠르게 변화한다. 사람들은 뒤처지면 곧 배제되고 잊힌다는 상시적 공포와 불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감정은 아주 가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됨으로써 '인정투쟁'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떤 벽'에 가로막혀 내면으로 응어리진다. 그 벽이란 이런 거다. '누구나 고통 하나쯤 있다', '누구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남 탓하지 말고 너나 잘해라' 등등…. 한 사람의 고유한 고통을 이러한 '평범 서사'로 퉁치는 기득권의 검열들은, 지나치게 남 눈치를 보며 인맥에 의존하는 현대인들을 솔직하지 못하고 감정을 숨기게끔 한다.

김학준의 논문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28쪽의 도식을 재구성했다.
 김학준의 논문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28쪽의 도식을 재구성했다.
ⓒ 김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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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맥과 친절마저 스펙이 되는 사회에서, '센 놈에게 붙'으려면 바짝 엎드려야 한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 고통스럽다며 인정 투쟁한다는 소식에는, 단순히 '나도 알고 있다'는 수준에 머물거나 냉소적이 된다. 왜냐하면 '센 놈에게 붙'으려면, 기득권자에게 인정받지 못한 이들과의 연대는 금기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평범 서사'에 가로막혀 '조작'당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이버 공간 같은 '무대 뒤편'으로 분출된다. 사람들은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들에 모여들고, 자신들 만의 다양한 의례를 개발하고 거기에 몰입한다.

이때 진지하게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목소리 내는 사람들은 불청객일 뿐이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씹선비(막장스러운 분위기와 의례를 즐기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이들을 비하하는 말)' 담론은, 그 불청객에 대한 피로감의 노골적 표현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아래 일베)'는 인간에 대한 낮은 공감 수준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임승차 딱지'를 남발하는 사례들로 잘 알려졌다. 누군가에게 딱지가 붙으면, '일게이(일베 게시판 이용자)'들은 열광하며 그들만의 축제(?)를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성역이 없"다. 그들은 어떤 사건에 진지한 가치를 부여하는 걸 못 견디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평범하게 만들기' 전략은, 인간 실존의 고유한 고통을 '별것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퇴락시킨다. 여기서 '세월호 참사'의 맥락은 '교통사고'라는 무미건조한 사고론의 단어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평범하게 만들기' 전략은, 인간 실존의 고유한 고통을 '별것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퇴락시킨다. 여기서 '세월호 참사'의 맥락은 '교통사고'라는 무미건조한 사고론의 단어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 일베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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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게이들은 이렇게 세월호 참사마저 별것 아닌 사안으로 만들었다. 다음은 뭘까. 바로 '이중잣대'의 덫에 희생양을 빠뜨려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한 일게이가 올린 "세월호vs천안함(혹은 연평도, 제2연평해전)"이라는 제목의 글은 세월호 유가족이 천안함 유가족들보다 과도한 요구를 한다고 몰아붙이기 위해 만든 덫이었다. 덫을 정당화하는 데도 평범 서사는 작동한다.

이렇게 둘을 유사 비교 대상으로 놓고 가치판단을 내리려면, 어떤 결정적인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양자는 '배가 침몰했다',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점 말고는 맥락이 다르다. 엄연히 다른 배·보상체계,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례가 아닌 인양을 우선 해달라고 강조한 점, 사고의 책임을 단순 사고경위론을 넘어서 국가의 구조와 자본의 책임에 대해서 성찰해 볼 수 있다는 점 등…. 이런 고유한 맥락은 모두 '무시'된다. 논리학자들은 이를 '잘못된 유비 추론의 오류'라고도 한다.

여기에 '무임승차 딱지'를 붙인 "천안함 (유족) 보상금이 세월호보다 적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글까지 올라오면 폭발적인 열광이 시작된다. 타인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뭉개고, '이중잣대' 구조 안에 눙치고, 무임승차 딱지를 발부하는 것. 일련의 과정에는 "인간의 존엄성" 좀 찾아보겠다는 민중의 죽창을 가로막는 평범의 벽이 서 있다. 김학준은 강조한다. 이러한 평범 서사와 무임승차 코드는 일베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마음속에서 쉽게 관측된다고….

"세월호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다."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원장, 2014년 7월 24일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한 발언)

"김씨는 희생자를 대상으로 한 대학특례입학안을 두고 기자에게 되레 "유가족이 요청한 게 맞느냐"고 물었다. "세월호 가족이 요구한 것이라면 과한 게 맞지만 아니라면…"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경향신문> 2015년 4월 15일자 기사, 세월호 참사에 '피로감 느낀다는 시민 인터뷰 중)

'인정 욕구' 건드리는 대중 문화 콘텐츠

영화 <국제시장>과 <연평해전> 포스터.
 영화 <국제시장>과 <연평해전> 포스터.
ⓒ CJ엔터테이먼트(좌), NEW(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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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가 열광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구성원들이 어떤 인정 신화에 도취됐는지 잘 드러내는 척도다. 각각 1400만, 600만 명이 관람한 영화 <국제시장>과 <연평해전>은 "가장 평범한 아버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와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바 있다.

"가장 평범"한 게 "가장 위대한" 것이 되는 아이러니한 판타지는, 열심히 노력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산업화시대 아버지의 대리인정 욕구를 잘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평생 일만 하다가 탑골공원이나 노인정에서 여생을 마감한다.

한편 <연평해전>의 흥행은 20대(35%)·30대(30%)가 이끌었다.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는 말은, 그것이 의도됐든 아니든 공동체의 쓸모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자긍심을 가지고 싶은 2030세대의 판타지를 정확히 건드린다. 그러나 현실의 아들들은 살인적인 노동시장에서 '잉여 인간'으로 배제돼 묻히거나, 강한 노동 통제가 이루어지는 대규모 서비스 사업장 등에 부속돼 부당한 처우와 굴종의 서비스를 강요받는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여전히 값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두 영화를 공개적으로 관람하는 정치인들, 이를 대서특필하는 기성언론들, 전역연기 장병들에게 특채를 공개적으로 제안하는 대기업 회장들, 높아진 대통령의 지지율…. 일련의 사실들이 한 방향으로 확인시켜주는 건, 헬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권장(?)되는 인정 신화란, '평범함의 유토피아'와 '국가에 대한 희생'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화는 신화일 뿐, 그것이 보편화될 수 있다면 이미 신화가 아니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전국 성인남녀 81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유선전화, 신뢰수준 95%에 오차 ±3.45%) 여전히 '노력해도 계층상승이 어렵다'는 답변이 81%에 이르렀다.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심각한 편'이라는 답변도 90.7%에 달했다.

우리에게는 지금 다양한 인정투쟁 활로가 필요하다. 값싼 '좋아요'가 아닌, 값진 '인정'이 필요하다. 이 글을 보는 이가 청년이라면 같은 청년으로서 필자가 묻고 싶다. 당신은 'SNS의 예비군'인가, 아니면 '죽창 예비군'인가.

예비군과 예비군.
 예비군과 예비군.
ⓒ 예비군(좌), 헬조선 갈무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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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인정투쟁>(악셀 호네트 / 사월의책 / 2011 / 2만3000원)
<왜 우리는 'SNS 자기과시'에 중독되는가>(강준만 / 생각의 문법 / 인물과사상사 / 2015 / 1만5000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김학준 / 서울대 학위논문(석사) / 2014)
<일베의 사상>(박가분 / 오월의 봄 / 2013 / 1만3000원)
<물화>(악셀 호네트 / 나남출판 / 8500원)



태그:#조중동, #신안보세대, #감정조작, #헬조선, #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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