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카라바조, ‘그리스도의 매장’, 바티칸 박물관 회화관. 특유의 테네브리즘을 바탕으로 극대화된 심리 표현과 어둠과 빛의 대비를 통해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카라바조 특유의 양식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그리스도의 매장 카라바조, ‘그리스도의 매장’, 바티칸 박물관 회화관. 특유의 테네브리즘을 바탕으로 극대화된 심리 표현과 어둠과 빛의 대비를 통해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카라바조 특유의 양식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급하게 서두른 덕분엔 아직은 찾아온 관객이 드문 바티칸 박물관의 회화관. 라파엘로와 다빈치와 벨리니에 이어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와 라파엘로를 본받으려 했던 볼로냐 화파의 거장, 로도비코 카라치를 지나 다시 카라바조를 만납니다.

한 달 전 '이탈리아 미술 기행'의 첫 날, 로마에서 처음 만난 이후 곳곳에서 온통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카라바조. 사실상 마지막 날인 오늘도 그의 명작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의 매장(혹은 십자가에서 내림)>입니다.

그림은 마치 방금전 만난 벨리니의 <피에타>와 연작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특유의 테네브리즘(어두운 배경)이 카라바조의 작품임을 말해줍니다. 표정과 동작은 다르지만 절망적 슬픔을 드러내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모 마리아. 그들 앞에서 싸늘하게 식은 예수의 시신을 석관에 매장하려는 니고데모(혹은 요셉)의 모습. 그런데 그의 시선이 우리, 즉 관객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무대 위의 배우가 객석의 관객에게 던지는 무언의 대사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도 그 비통한 장면에 동참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하죠.

극대화된 심리 표현, 어둠과 빛의 극적 대비를 통해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그림. 이는 물론 여행기 앞부분에 언급했던, 반종교개혁적 의도로 탄생한 바로크 양식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종교개혁 시기 개신교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가톨릭 진영에서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종교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였죠. 그런 시대적 요구에 극단적인 리얼리즘의 옷까지 더한 카라바조. 로마와 이탈리아는 여전히 그를 사랑합니다.

로마와 이탈리아가 사랑한 남자, 카라바조

니콜라스 푸생,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 바티칸 박물관 회화관. 신고전주의의 대가 푸생이 아직 매너리즘과 바로크의 영향 아래 있을 때 그린 작품입니다.
▲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 니콜라스 푸생,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 바티칸 박물관 회화관. 신고전주의의 대가 푸생이 아직 매너리즘과 바로크의 영향 아래 있을 때 그린 작품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바티칸 박물관 회화관에서 나와 거대한 솔방울의 분수가 인상적인 피냐의 안뜰에서 잠시 햇빛을 쬡니다.
▲ 피냐의 안뜰 바티칸 박물관 회화관에서 나와 거대한 솔방울의 분수가 인상적인 피냐의 안뜰에서 잠시 햇빛을 쬡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카라바조에 이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해 보이는 구이도 레니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성 베드로>와 새로운 양식인 신고전주의의 대가,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의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를 끝으로 '회화관'을 빠져나옵니다.

이제부터는 더 서둘러야 됩니다. 아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회화관'은 거의 처음으로 들어온 덕분에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관람객들의 물결이 이미 '바티칸 박물관'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회화관'은 그냥 지나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도 제대로된 '미술 기행'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동참하게 된 '성지 순례'처럼 엄청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작품들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나에게 그 '성지'는 미술의 '성지'입니다.

'천체 중의 천체'라는 현대 조각 작품과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거대한 '솔방울의 분수'가 인상적인 '피냐의 안뜰(Cortile della Pigna)'에서 잠시 햇빛을 쬐고 숨을 고릅니다. 그리고 다시 관람객들의 틈에서 흔히 '팔각의 정원'으로 불리는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Museo Pio Clementino)'을 관람합니다.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미와 조화, 균형감을 갖춘 고전미의 표준으로 여겨집니다.
▲ 벨베데레의 아폴로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미와 조화, 균형감을 갖춘 고전미의 표준으로 여겨집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먼저 그리스 신화의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 <벨베데레의 아폴로>를 만납니다. 활을 쏜 직후 날아가는 화살을 응시하는 아폴로. 남성의 육체를 이처럼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더구나 아폴로의 어깨와 팔에 걸쳐진 망토의 사실적인 주름과 그의 발에 신겨진 샌들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미와 조화, 균형감을 갖춘 고전미의 표준 <벨베데레의 아폴로>.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 대해 빙켈만은 "자연과 예술,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성취"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어서 만날 작품은 저 유명한 <라오콘 군상>입니다. 너무나 유명해서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지요. 자신의 조국 트로이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인들이 보낸 목마를 들이지 말 것을 충고했던 사제, 라오콘. 분노한 그리스의 신들은 바다뱀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질식시켜 죽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 작품을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기적’이라 평가했습니다.
▲ 라오콘 군상 너무나 유명한 이 작품을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기적’이라 평가했습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고통으로 뒤틀린 라오콘의 육체와 일그러진 표정,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핏줄과 뱀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는 그의 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마저 느끼게 합니다. 다른 곳에 비해 커진 손과 다리, 그리고 지나치게 왜소하게 묘사된 두 아들 때문에 전체적인 비례는 맞지 않지만 강렬한 감정 표현을 저해하지는 않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조각을 '예술의 기적'이라고 했으며 그의 후기 작품들, 특히 미완성의 '피에타'들은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머리와 팔다리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완벽한 인체의 표현"

벽감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고대 로마의 조각들. 하나하나 미술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말 그대로 '고전'의 작품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소품이지만, 여신 아르테미스의 저주로 사슴으로 변해 자신의 사냥개에게 물려 죽은 악타이온을 묘사한 작품은 그 섬세함에 눈을 뗄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애초에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형상으로 발견된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강렬한 남성미를 느끼게 합니다.

애초에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토르소의 형태로 발견된 이 작품은 강렬한 남성미를 느끼게 합니다.
▲ 벨베데레의 토르소 애초에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토르소의 형태로 발견된 이 작품은 강렬한 남성미를 느끼게 합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아이아스 장군이 자결하는 모습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이 작품을 좋아했던 미켈란젤로는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자 '이것만으로도 완벽한 인체의 표현'이라 극찬하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예술 정신이 여기서도 느껴집니다.

끊임없는 고전 조각의 향연을 지나 다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붉은색 벽감 속에 거대한 조각상들을 전시한 '원형의 방'에서는 네로 황제의 욕조도 만날 수 있습니다. 욕조와 조각상들도 볼 만하지만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고대 로마의 모자이크도 눈을 사로잡습니다.

길이 100미터가 넘는 황금빛 천장의 ‘지도의 방’에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 지도의 방 길이 100미터가 넘는 황금빛 천장의 ‘지도의 방’에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사람들의 물결에 따라 화려한 황금빛 천장 장식이 인상적인, 100미터가 넘는 '지도의 방(Le Galleria della Mappe)'을 지나 드디어 그를 만납니다. 라파엘로입니다.

자신의 집무실을 장식할 작가를 찾던 교황 율리우스 2세 앞에 25세의 아름다운 청년이 나타납니다. 그의 이름은 라파엘로 산치오. 교황은 브라만테의 소개로 알게 된 이 청년에게 자기 개인 서재의 벽 장식을 맡깁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아테네 학당'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그림에 경탄한 율리우스 2세는 나머지 방들도 라파엘로에게 맡기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나중에 만날 '시스티나 성당'과 함께 '바티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aello)'입니다. 라파엘로는 이후 10년 넘게 이 작업에 매달렸고 결국 마지막 방을 장식하던 중 3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보수 공사 탓인지 원래 알고 있던 순서와는 다르게 방들의 동선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4개의 방 중, 가장 먼저 만날 곳은 '보르고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입니다.

라파엘로, ‘보르고 화재’, 바티칸 박물관 보르고 화재의 방.
▲ 보르고 화재 라파엘로, ‘보르고 화재’, 바티칸 박물관 보르고 화재의 방.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서기 847년, 교황 레오 4세는 테라스에서 밖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세운 보르고 지역민들이 화재 때문에 공포와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교황이 신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커다랗게 성호를 긋자 불이 진화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보르고 화재의 방'의 메인 테마인 '보르고 화재'는 그 급박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특히 화재를 피해 건물에 매달린 근육질의 남성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곧 이 환상적인 공간에서 절망감에 빠지고 맙니다. 좁은 공간에 발디딜 틈없이 들어선, 너무나 많은 사람들. 이건 도무지 미술 감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곳곳에서 전세계 각국의 언어로 진행되고 있는 가이드 투어는 머리를 어지럽힙니다. 한 달간의 '이탈리아 미술 기행'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들을 이 지경으로 봐야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 21-3. 이탈리아 미술 기행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카라바조, #푸생, #라파엘로, #바티칸박물관, #이탈리아미술기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이동조사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