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기, 양파, 감자, 당근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식용유에 잘 볶은 다음 물을 붓고 재료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끓입니다. 불을 약하게 한 후 카레를 조금씩 넣어 충분히 풀면서 끓인 다음 밥 위에 얹어 내면 완성됩니다."

제가 애용하는 한 회사의 카레 제품 뒷면에 적힌 레시피입니다. 쉽죠? 간단하죠? 별거 아니죠? 재료를 썰고 볶고 물 부어 끓이다가 카레가루를 넣고 살짝 끓여 주는 간단한 요리이지요.

그런데 정말 간단할까요? 요리의 '요'자로 모르는 요리 왕초보들에게도요? 설명서대로라면 아주 간단한데요, 문제는 '물'입니다. 정확히는 '물의 양'이죠. 썰고 볶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도대체 물을 얼마나 넣으라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생전 처음 본 낯선 친구들과 함께 한 그릇의 카레를 먹기 위해 배고픈 배를 움켜쥐며 물이 끓기만을, 아니 재료가 익기만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린 소녀가 있었답니다.

그래, 결정했어! 카레를 해먹자!

재료만 간단히 썰고 볶으면 될 줄 알았다.
 재료만 간단히 썰고 볶으면 될 줄 알았다.
ⓒ public-domain-image.com

관련사진보기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인천에서 살고 있을 때였죠. 지금은 전라도 화순에서 살아요. 친구 중에 경기도 양평의 작은 산골마을이 고향인 친구가 있었어요. 여름방학에 같이 고향마을에 가자고 하더군요. 다니던 교회에서 2박 3일간 열리는 중·고등부 수련회에 같이 가자는 초대였죠.

좋다고 따라나섰습니다. 친구의 교회는 작고 아담했죠. 저처럼 초대받아 온 아이들도 여럿 있었지요. 교회에 도착해 조를 나누고 서로 얼굴을 익히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첫날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둘째 날 오전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완전한 자유시간은 아니고 저녁식사 준비를 위한 시간이었지요. 저녁식사는 조별로 해결하는 미션이 주어졌어요. 우리 조는 '카레'를 해 먹기로 했습니다. 한 조당 인원은 지도교사를 포함해 8명 정도였던 것 같아요.

저녁으로 뭘 먹을까 머리를 맞대다가 생각해낸 요리가 카레였습니다. 다들 특별히 할 줄 아는 요리는 없었고, 수련회씩이나 왔으니 뭔가 색다른 요리는 먹어야 할 것 같고…. 그러다 떠오른 게 카레였습니다. 어릴 적 아빠 옆에서 지켜본 카레 만들기는 야채를 썰고 볶고 물에 끓여 익히다가 카레가루만 넣으면 되는 간단한 요리였거든요.

우리 조원들 중에 카레를 먹어본 아이는 제가 유일했기에 산골촌놈들에게 도시 가시나가 만든 신기한 요리 '카레'를 맛보게 해주고 싶은 거만함(?)도 있었죠. 산골이라고는 해도 가까운 곳에 커다란 마트가 있었기에 카레에 필요한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애간장이 녹는다

그렇게 끓였건만... 끓지 않았다.
 그렇게 끓였건만... 끓지 않았다.
ⓒ flickr

관련사진보기


돼지고기며 감자, 당근, 양파를 다듬고 네모나게 썰고 볶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 '실과'와 '가정' 과목을 통해, 제대로 된 맛을 내는 요리는 할 줄 몰라도 요리를 어떻게 하는 지 정도는 배운 덕분이랄까요?

문제는 재료를 볶은 후부터였습니다. '8명씩이나' 먹을 양이니 저희는 준비된 그릇 중에서 가장 큰 '들통'에 재료를 넣고 끓였습니다. 들통아시죠? 집에서 빨래를 삶거나 곰국을 끓일 때 쓰는 커다란 통.

다른 반찬은 굳이 필요 없고, 밥은 준비됐고, 재료가 끓어 익으면 카레가루를 넣고 살짝 끓이다가 밥과 비벼 먹으면 되는데, 이런…. 재료가 끓을 생각을 않는 겁니다. 휴대용 가스버너의 가스가 다 닳아져 새것으로 바꾸기까지 했는데 영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죠.

얼른 저녁을 먹고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데 우리 조가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있으니 다들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조원들은 언제 밥이 되냐고 계속 물어보고, 다른 조의 선생님들도 '너희들은 언제 밥 먹냐'고 계속 묻고, 재료는 끓을 생각을 않고….

우리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리가 밥 먹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얼굴은 달아오르고. 괜히 카레를 먹자고 했나 보다 후회는 밀려오는데 어찌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렇게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죠.

정말 아무도 만드는 법을 몰랐을까

결국 기다림에 지치신 선생님께서 찌개로라도 먹게 작은 그릇에다가 조금만 덜어서 만들어보자고 하시면서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도 끓을 생각을 않던 재료들이 작은 그릇으로 옮기자마자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일인데도 참 신기하더군요.

더 웃긴 건 작은 그릇에 옮겨 만든 카레만으로도 우리 조원들은 물론이고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름 출출했던 다른 조의 친구들까지 먹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카레로 국을 끓였어도 들통까지는 필요 없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저녁밥을 먹고 치우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10시를 훌쩍 넘겼고, 그날 저녁에 예정됐던 모든 프로그램은 '카레' 때문에 취소됐습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날 두어 시간 동안 재료가 끓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시간은 제 인생 중에서 짧지만 가장 길면서도 가장 느리게 흘렀던 시간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선생님들 아니 '어른' 중에 카레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정말 없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그냥 지켜본 것인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로 카레 재료를 볶고 난 뒤 재료를 익히기 위한 물은 재료가 적당히 잠길 정도면 됩니다. 재료가 익었는지는 가장 단단한 재료인 당근 하나를 젓가락으로 콕 찍어서 쏙 들어가는지로 확인하면 되고요. 그리고 저 지금은 카레 잘 만든답니다.


태그:#카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어떤 사항에 대해 알리고 정보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고 글로 남겨 같이 나누고싶어 글 올립니다. 아직 딱히 자신있는 분야는 없지만 솔직하고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