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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와인 브랜드 홍보대사', 그의 직업이다. 세상에 이런 직업이 있다니! 사실 그는 27년 동안 일했던 금융회사에서 퇴직한 지 갓 1년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도 이 길에 서 있게 될 줄을 몰랐다. 우연히 들어섰지만, 스스로 개척하고 있는 길이다.

그는 직장 운이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대학원을 마쳤다. 미국 내 금융회사에서 인턴으로 1년 일하다가, 한국지사로 취직하게 됐다. 외국 유학파들이 원하는 길 중 하나다. 30대에 지점장이 됐고, 40대에 임원으로 승진하고, 50대에 CEO로 임기를 마쳤다. 부족함 없이 직장 생활을 하다가 57세에 은퇴했다.

오래 일했다. 은행원들의 평균 퇴직 연령은 50살 안팎이니까. 요사이는 저금리 시대라 은행업을 사양 산업으로 친다. 다른 직업보다 정년도 빠른데, 연봉이 높으면 목돈 줘서 빨리 내보내려고 한다. 다른 직장보다 퇴직이 5년에서 10년은 빠르다. 암담해 보일지 모르지만, 몇 살이라도 젊어 퇴직하고, 또래의 친구들이 현역에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아 새 출발하기는 좋다.  

은퇴자가 바라본 '제2의 인생' 네 가지 조건

그리스 와인 브랜드 홍보를 맡고 있는 유병찬씨.
 그리스 와인 브랜드 홍보를 맡고 있는 유병찬씨.

그는 직장에서 은퇴했지만 쉴 생각이 없었다.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령화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목표가 있었다. 첫째, 돈을 벌고 싶었다. 평생 월급쟁이로 돈을 꼬박꼬박 타서 쓰기만 했지, 벌지는 못했다. 돈을 번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궁금했다.

둘째, 금융권처럼 편안한 직업을 찾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막걸리가 눈에 들어왔다. 은행원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지만, 은행의 금리는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일한다. 돈이 돈을 번다. 그래서 은행업은 비싼 임대료를 내고, 임금도 높게 줄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막걸리 산업도 은행 일을 닮아 있다. 술을 담가 두면 그 뒤에는 효모가 사람 대신 24시간 일한다. 막걸리는 상할 수 있지만, 증류하면 소주가 되고 초산 발효하면 식초가 된다. 돈이 상하지 않듯이 술도 상하지 않는 길이 있다. 게다가 양조장 일은 널널하다. 그가 해왔던 일들에 견주면 노동 강도가 결코 세지 않다. 그래서 노후에 괜찮은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셋째,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을 찾고 싶었다. 그는 젊은 날부터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금융권에 일하는 사람들은 술이 세다. 돈을 예치하는 것도 빌려주는 것도 모두 영업이다. 영업의 생명은 만남이다. 가장 빨리 친해지려면 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다. 그는 술자리를 마다지 않았고, 술을 이겨냈다. 그가 속한 금융그룹 안에서 술이 제일 센 사람으로 통했다. 술을 이기는 법도 터득했다. 빈속에 술을 마시지 않고 안주를 적절하게 먹고, 많이 마시면 3일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몸을 다졌다. 

넷째, 위험 부담이 적고 손실이 적은 일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막걸리를 배울 무렵에 우연히 술 박람회장에 갔다가, 그리스 와인 부스를 방문하게 됐다. 그곳에서 그리스인을 만났고, 그리스 와인을 홍보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서너 달 동안 사업계획서를 이메일로 주고받은 뒤에 계약이 이뤄졌다. 그를 고용한 곳은 그리스 와인업계의 리더이자, 1879년에 창업한 그리스 와인 회사 부따리와 그 형제 회사 끼리야니다. 그에게 연봉을 지급하는 곳은 유럽연합(EU)이다. 그리스 와인 회사가 유럽연합으로부터 홍보 마케팅 비용을 받아 그에게 활동비를 지불한다. 그는 그리스 와인 브랜드 홍보 대사, 유병찬이다.

포도주에 물 섞어 즐겼던 그리스인들

그리스 끼르야니 와이너리 나우사.
 그리스 끼르야니 와이너리 나우사.

그런데 그의 일이 늘어났다. 그리스 와인을 홍보하려는데, 샘플 와인이 부족했다. 10여 년 전에 수입 회사가 있었는데 수입이 중단됐다. 시음주만으로는 홍보 효과가 적어, 직접 주류 유통 면허를 내고 그리스 와인을 수입하게 됐다. 2015년에 3파렛트 2만 병 정도를, 올해는 6000병 정도를 수입하여 홍보하고 있다. 거래하는 곳도 늘어나 40여 군데의 호텔과 와인바 그리고 도매수입상과 연결돼 있다. 그가 뛴 만큼 와인 판매량이 늘어나지만, 도매상과 소매점이 안정된 유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그의 몫이다.

그의 홍보 마케팅 전략은 그리스 와인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그리스 와인은 그리스 문명과 동행한다.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다. 그리스인들이 자부심을 가고 있는 세 가지는 첫째 그리스가 인류 문명을 열었고, 둘째 민주주의를 전파했고, 셋째 포도주를 전파한 나라라는 것이다.

와인의 기원을 이야기하려면 그리스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의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히포크라테스 그들 모두가 와인을 예찬했다. 그들이 즐긴 고대 그리스의 음주법은 특별했다. 포도주에 물을 섞어 양을 3배로 늘려 즐겼다. 아주 낮은 도수로 음료처럼 마시면서, 자유로운 토론을 했던 문화가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술을 마시면서 하는 토론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심포지움이다. 

그는 상품화된 술을 좋다 나쁘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르다고 인식한다. 그리스 와인 맛의 다름은 품종에서 나온다. 그리스에는 300가지 이상의 많은 포도 품종이 있다. 19세기 후반 유럽에 번진 포도나무 병 필록세라의 피해를 그리스는 받지 않았다. 그리스는 4000여 개의 섬이 국토의 20%를 차지한다. 그 섬에 다양한 토착 품종이 잘 보존돼 있다.

평생 직업, 술

그리스 포도나무의 대표 품종, 시노마브로.
 그리스 포도나무의 대표 품종, 시노마브로.

그중에서 대표적인 토착 품종이 네 가지가 있는데, 적포도 품종으로 시노마브로와 아기오르기티코가 있다. 그리스어로 시노마브로의 시노는 '시다', 마브로는 '검다'를 뜻한다. 이 품종은 그리스 북부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는데, 검은 빛을 띠고 신맛과 탄닌이 강하다. 아기오르기티코는 탄닌감이 덜하지만 과일향이 부드럽고 초보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편안한 와인의 맛을 낸다.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아시르티코와 모스코필레로가 있다. 아시르티코는 산토리니의 척박한 화산 지형에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며 자란다. 토양 속에서 다양한 미네랄을 영양분 삼고, 일교차로 생기는 수분에 의존하여 특별한 포도 열매를 맺는다. 모스코필레로는 향이 풍부한 품종이다. 이 네 가지 포도 품종을 알고 그리스를 여행하면, 그리스 와인과 그리스 음식을 즐기는 문이 열린다.  

그는 처음 6개월 동안은 직장 생활하며 알았던 인맥의 도움을 받았다. 조금 일찍 퇴직했고, 알고 지냈던 지인들이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와인을 홍보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그는 평생 가는 외국 친구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는 외국계 회사에 오래 일했기에 외국 출장도 잦고 외국인들과 사귈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비즈니스가 종료되면 관계도 끝났다. 은행일은 평생 직업이 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술은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 그는 그리스 와인을 홍보하면서 만난 그리스 부따리 와이너리 가문의 사업가 미할리스와 친해지는 중이다. 미할리스를 만나러 그리스와 중국을 가기도 하고, 미할리스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그는 와인을 통해서 그리스를 배우고, 사람을 만나는 중이다. 

그의 일은 뛴 만큼 늘어난다. 그래서 바쁘고 그래서 기쁘다.

색깔 고운 그리스 삼페인와인과 야채와 페타치즈와 아보가도가 있는 그릭 샐러드.
 색깔 고운 그리스 삼페인와인과 야채와 페타치즈와 아보가도가 있는 그릭 샐러드.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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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그리스 와인, #와인, #이병찬, #막걸리학교,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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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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