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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울타리에 핀 수선화.
 양조장 울타리에 핀 수선화.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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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근 양조장을 찾아가게 된다. 봄바람 쐬러 장성 축령산에 갔던 날도 그랬다. 밥이 맛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함께한 담양 죽향도가 권재헌 대표가 더 맛있는 밥을 맛보여주겠다고 했다. 그에 이끌려 죽향도가를 따라갔다. 양조장 울타리 따라 노란 수선화가 줄지어 피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천리향 꽃향기가 몽환적인 물살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양조장을 찾아가는 이유야 분명하다. 술을 맛보기 위해서다. 주점이나 마트에서 사서 맛보면 될 것이 아닌가? 구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막걸리는 살균하지 않는 상태로 유통되다 보니 주로 양조장 인근에서 팔리고 만다. 지방을 여행하면서 마트에 들러 술을 검색하거나, 양조장을 찾아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게다가 양조장에서 맛보는 술맛이, 그 술을 즐기는 최고의 방식이기도 하다. 맛과 향기는 공간과 함께 기억된다. 특별한 맛과 향을 기억하다 보면, 어디였더라 언제였더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양조장을 찾아가는 것은 인상적인 향과 맛 하나를 내 시간 속에 새겨넣는 작업이다. 

술맛은 술을 만든 이의 성품에서 나온다

발효통을 점검하고 있는 권 대표 부부.
 발효통을 점검하고 있는 권 대표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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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을 찾아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양조를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막걸리 양조장은 개방적이다. 술 받으러 오는 동네 사람들이 있어서, 양조장으로 술을 한두 병 사러 가는 행위는 무척 자연스럽다. 그때 잠시 술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예정에 없던 긴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술은 쉽게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요리는 입에 담기 전에, 눈으로 먼저 들어오고 향기로 맛을 가늠할 수 있다. 술은 달라, 눈으로 혼탁만을 가릴 수 있고, 향으로는 쉬어터지거나 상한 술을 구분할 수 있는 정도다. 외관으로 술맛이 더하고 덜하고를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마셔보고 내일 아침 일어나 봐야 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술의 정체를 파악하는 방법 하나는 그 술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다. 술을 만드는 사람의 성품과 기질이 술 속에 담겨있다. 우직한 사람이 빚으면 술도 우직하다. 단순해 보이지만, 야료를 부리지 않는다. 너무 재주가 많은 사람이 술을 빚으면 기교가 넘치지만 언제 변할지 몰라 믿음이 줄어들려고 한다. 여성이 술을 빚으면 얌전하고 단정하나 술이 좀 더 달아진다. 대도시의 양조장 술들은 도시의 가벼움과 경쾌함을 따라가며, 모두가 만족할 만한 무난한 맛을 추구한다.

죽향도가 권 대표는 바람 같은 사람이다. 우선 말이 빠르고, 행동은 주저함이 없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통했다 싶으면, 전기처럼 다가온다. 권 대표는 구례에서 양조업을 시작했고, 지금은 대숲 많은 담양에서 양조를 하고 있다. 인정 많고 인심 좋고 목소리 큰 영락없는 전라도 사나이다. 젊은 날에는 사냥을 좋아해, 한 해에 멧돼지 40마리를 잡을 정도로 명포수였다고 한다.

그의 말, 그의 행동이 거침이 없기에, 그의 술을 두고 간을 보듯이 이것저것 물어볼 수가 없다. 그의 성품처럼 그의 술은 그냥 솔직하고 시원하다. 죽향도가의 대표 상품인 '대대포 막걸리'의 맛이 그래서 담백하고 시원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대대포 막걸리는 순천만 대대포 간척지에서 나는 쌀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건강한 중년 사내의 맛

죽향도가의 대대포 막걸리와 주꾸미.
 죽향도가의 대대포 막걸리와 주꾸미.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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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진 술병에 푸른색 상표가 감겨 있어, 외관부터 독특하다. 권 대표의 외관도 독특하다. 머리는 벗겨졌지만 막걸리 때문인가 싶을 정도로 피부가 곱다. 몇 해를 만났지만, 늘 언제나 건강한 중년 사내 그대로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양조장을 찾아가는 진짜 이유는 양조장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양조장을 찾아갔음에도 그 안을 보지 못하고 돌아서게 되면 무척 섭섭하다. 물론 선약을 하지 않고 가면, 양조장 속까지 보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갑자기 찾아와 안방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무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술은 어두운 곳에서 혼자 익어가는 것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래서 우연히 찾아간 양조장에서, 뜻밖에 양조장의 가장 깊은 누룩방을 보게 되고, 술독에서 진땡이 원주 한 잔까지 얻어마시게 되면 그 여행은 순식간에 완성된다. 

1973년에 승인받아 사용하고 있는 찜솥과 큰 연통.
 1973년에 승인받아 사용하고 있는 찜솥과 큰 연통.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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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권 대표가 나를 이끌었으니, 죽향도가 양조장은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양조장을 보면 그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다. 죽향도가 제조장 출입구에는 외부의 균을 차단하는 공기소독실이 있다. 소독실을 거쳐 내부로 들어서니 술 향기가 가득했다. 술 향기에 금세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포근해졌다.

양조장은 감탄할 만큼 깨끗했다. 바닥은 티끌 없이 깨끗했고, 술통은 정연하게 줄지어 있었다. 식품을 만드는 곳이니 깨끗한 게 당연하지만, 곰팡이의 도움을 받는 양조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습기가 있어 곰팡이가 피기 쉽고, 단맛 도는 술이 튀어 바닥을 얼룩지게 만들기 쉽다. 그 청결함에 권 대표가 다시 보였다. 바람 같은데, 부지런하고 깔끔한 바람이었다.  

어떻게 막걸리가 우윳빛깔이지?

죽향도가의 밑술통에 담긴 밑술.
 죽향도가의 밑술통에 담긴 밑술.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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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가 진행되는 술통의 기포는 잘고 고왔고, 병입을 기다리는 술덧 위로는 하얀 거품이 눈처럼 덮여 있었다. 통상 우리가 아는 막걸리 색은 옅은 갈색이 도는 미색(米色)이거나 아이보리색이다. 그런데 죽향도가 막걸리 색은 우윳빛 흰색이었다. 이 색깔은 어디서 왔을까? 나의 궁금증은 순식간에 흰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권 대표는 밑술 통을 보여줬다. 통 바닥에는 쌀죽처럼 보이는 하얀 밑술이 들어있었다. 술이 담긴 큰 발효통에는 하얀 면포가 덮여있었다. 면포를 젖히니 단 과일향이 올라오는데 강력한 탄산 때문에 순식간에 눈까지 매워졌다. 고두밥을 찌는 찜솥 위로는 증기를 빨아내는 아주 큰 연통이 달려있었다. 어떤 증기도 양조장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권 대표의 각오가 그곳에 단단하게 매달려있었다. 양조장 벽면에는 위생 점검 조항이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원료 창고를 보여줬다. 생산자 인증번호가 적힌 유기농 햅쌀이 거기 있었다.

죽향도가 희디흰 막걸리 색은 청결한 위생과 좋은 원료, 그리고 권 대표의 바람처럼 부지런한 마음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향도가 대대포 막걸리 한 잔을 시원스럽게 들이켜니 속이 든든해졌고, 집은 멀어졌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액체 밥이었다. 권 대표가 자랑하는 맛있는 밥은 막걸리였다.

양조장 실내 벽에 붙은 준수사항.
 양조장 실내 벽에 붙은 준수사항.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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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대포 막걸리, #허시명, #술,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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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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