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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떡국 대신 죽을 끓였다. 남편이 독감에 걸려서 시댁에 가지 못했다. 남편에게 약까지 챙겨 먹이고 나니 명절에 시댁에 안 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땐 명절 하루 전에 시댁에 갔다. 남편은 사 형제 중 막내다. 남편은 시아버지 나이 마흔에 얻은 늦둥이다. 며느리는 첫째 형님과 나 뿐이다. 중간 아주버님은 싱글이다. 명절이면 큰형님 댁에서 모인다. 위에 손주들은 이미 다 성인이 되었다. 학령기 아이를 둔 집은 우리 뿐이다.

명절 하루 전날, 남편이 큰집에 못 가겠다 했을 때 스무 살 첫째가 혼자서라도 큰집에 가겠다고 나섰다. 그 말을 들은 중학생 둘째와 초등학생인 막내도 형을 따라가겠다고 했다. 일꾼인 내가 안 가는데 며느리라고는 큰형님뿐인 시댁에 아이 셋만 보내는 것이 마땅한 일인지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 아이들까지 안 가면 시댁에 어른들만 있는 상황이라 명절 분위기가 나지 않을 게 뻔했다. 게다가 아흔인 시아버님이 섭섭해 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막내만 빼곤 다 커서 그리 손이 많이 가진 않을 거 같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큰집에 가길 진심으로 원했다. 그래서 아이들끼리 큰집 가는 걸 허락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형님댁까지 세 시간 거리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혼 20년 만에 '명절 휴가'를 얻게 되었다.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서 누워있자니 뭐 이런 호사가 다 있나 싶다. 남편이 아프지 않고서야 며느리가 명절에 시댁 안 가고 욕 안 먹는 방법이 있을까? 만일 내가 아파서 못 갔다면 마음이 엄청 불편했을 거다. 명절에 쉬고 보니 제일 죄송한 사람은 나 때문에 할 일이 많아진 우리 큰형님이다. 형님은 명절 휴가를 한 번이라도 받은 적이 있을까? 아마 없으실 거 같다. 곧 환갑이 되는 우리 형님에게도 명절 휴가 한번 드리고 싶다. 형님이 명절에 쉴 방법은 아무래도 해외여행 가는 거밖엔 없겠다. 언제 내가 계획 세워서 보내 드려야겠다. 물론 내가 차린 차례상과 밥상에 시댁 식구들이 불만이 많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맛없는 밥상도 받아 보아야 그동안 고생한 형님의 고마움을 식구들도 알 거다.

12시쯤 되니 친정 가는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날 데리러 온단다. 아픈 남편 두고 친정 가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뭔가 시댁을 속이는 거 같아 마음이 찜찜하다. 남편도 싫어하는 눈치다.

"아픈 남편 두고 어딜 가냐?"
"잠깐 갔다가 딱 한 시간만 있다 올게."

들이 닥친 언니네 차를 타고 친정에 갔다. 대중교통으로는 한 시간 거리인데 차로는 15분 걸린다. 부모님과 오빠네가 우리를 맞는다. 떡만둣국을 끓여 점심으로 먹었다. 웃고 떠들면서 먹었다. 맛있다.

"너희들 다 와서 밥 먹으니까 결혼 안 한 거 같다. 그렇지?"

엄마의 말이다.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신다. 까마득하다.

이렇게 평온하게 명절에 친정에서 밥을 먹다니. 몇 년 만일까? 결혼하고 나선 명절에 친정에서 점심을 먹은 것은 처음이지 싶다. 언제나 명절이면 미안한 마음에 시댁 식구들 눈치를 보고 오후 두세 시에 큰집을 나서야 했다. 꽉 막힌 외곽순환 도로에서 평소보다 서너 배가 걸리는 시간 동안 운전해야 하는 남편에게 미안해 했다. 좁은 차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갇혀 있는 아이 셋에게도 나는 영락없이 미안해했다. 우리 식구 기다리느라 가느다란 목이 더 가늘어지신 팔순 부모님께도 처가 가는 출발시각이 늦어진 오빠네에게도 죄송스러웠다. 미안한 마음은 내 몸을 긴장시켰다. 그런 몸으론 숨 한번을 편하게 내 쉴 수 없었다.

작년 추석에도 그랬다. 미국에 사는 큰언니가 간만에 한국에 왔다. 작은언니는 카톡 방에 '명절날 모두 만난 김에 한복 입고 가족사진을 찍자'고 올렸다. 한복이란 말에 픽 웃음이 났다. 한복이든 아니든 시간이나 맞추자고 내가 글을 올렸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다들 언제 올지 시간을 콕 짚어 말하기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추석 당일 오후 한 시쯤부터 빨리 오라는 문자가 언니들한테 날라왔다. 나만 오면 모두 모인다는 거였다. 평소보다 좀 일찍 나설까 하고 시아버님이랑 형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집간 시댁 큰조카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를 끝낸 시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지금 시댁에서 출발한다는데 너희들도 기왕이면 아이들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

조카네 시댁은 큰집에서 안 막히면 이삼십 분이면 오는 거리에 있었다. 나도 시집간 조카 얼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길이 막혔다. 기다리다가 결국 조카 얼굴은 보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큰집을 나섰다. 친정으로 가는 길, 외곽순환 도로는 진입로부터 막혔다. 아스팔트는 뜨거웠고 뒷자리의 아이 셋은 그 뜨거운 열기에 9월 뜨거운 태양에 지쳐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큰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정민아, 언니 지금 시댁 들어가야 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와."

큰언니는 산소에 성묘하고 친정으로 곧장 왔었다. 다시 시댁에 가야 했다.

"알았어. 언니."

웃으며 답했다.

친정에 도착하니 작은 언니가 나를 반겼다. 하지만 길 막히기 전에 집에 가야 한다며 차에 올라탔다. 언니 오빠 다 떠났는데 카톡 방엔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이 '카톡 카톡' 거리며 쉼 없이 올라왔다. 친정 부모님 형제 다 모였는데 나만 없다. 왈칵 눈물이 올라온다. 사진을 찍으리라 생각을 못 했다. 이렇게 사진 찍을 거였으면 더 기다려주지....... 늦게 온 건 난데 괜히 언니 오빠에게 섭섭했다.

사진을 보니 명절에 큰언니가 미국에서 나온 게 처음이지 싶었다. '왜 그걸 여태 몰랐을까?' 알았으면 미리 신경 써서 시댁에 사정 이야기하고 일찍 출발할 수 있었을 텐데. 명절엔 왜 그리 정신이 없는지 그런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못했다.

작년 추석엔 그렇게 나만 빠진 친정 가족사진을 보았다. 그런데 올해엔 남편 덕분에 명절날 친정에 느긋하게 앉아 점심을 먹고 있다. 설거지를 끝내고 빨리 가야 한다며 친정에서 일어났다. 버스를 타고 가려면 한 시간은 걸린다.

"바보야! 너 없어도 너희 남편 안 죽어."
"좀 없어 봐야 귀한지 알지."
"너 좀 이제 그렇게 살지 마."

언니랑 오빠가 돌아가면 구박을 한다. 내 편 들어 줄 거 같은 엄마를 처다보았다. 그런데 엄마 표정을 보니 내 편은 아닌 듯하다. 한참 혼난 난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부모님과 언니 오빠랑 조카들이랑 둘러앉아 우리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떠들었다. 불구경하려 가는 언니 따라갔다가 길 잃었던 이야기, 엄마가 가스 불에 보리차 올려놓고 외출해서 집 홀라당 태울 뻔한 이야기. 우린 어렸고 부모님은 젊었던 시절 이야기였다. 부모님 얼굴에 옅은 웃음꽃이 번진다. 다행히 조카들도 옛이야기를 재미있어 한다.

20년 살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는데 '명절 휴가'를 얻게 되었다. 나 때문에 고생하신 형님껜 너무 죄송스럽다. 아픈 남편 덕분에 명절날 친정 부모님과 점심 먹기가 가능했다. 올해로 여든여섯, 여든다섯인 부모님과 명절에 느긋하게 밥 먹는 기회가 다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디 부모님이 건강할 때 그런 기회가 다시 오길.

덧붙이는 글 | 2016년 2월 설날 이야기 입니다.



태그:#부모님 뒷모습, #명절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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