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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 이런 수식어를 가진 장소들은 너무 많습니다. 가보지 않은 입장에선 어디가 정말 좋은 데인지 알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세계 곳곳을 둘러본 시민기자들에게 '진짜 나만의 최고 여행지'를 물어봤습니다. 믿고 보는 추천 여행지,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합니다. [편집자말]
안나푸르나 트레킹
 안나푸르나 트레킹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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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느긋한 것과는 담을 쌓고 산 인생이었다. 사고의 속도가 행동을 따라 가지 못할 때가 많았다. 무엇이든 꽂히면 직접 해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대리만족'으론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인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때론 속도를 늦추고 치밀하고 꼼꼼하게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속에 넣고 묵혀야 되는 일들을 대할 때다. 여기서부턴 조급함과 싸워야 한다.

히말라야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안나푸르나(Annapurna) 트레킹이 내겐 바로 그런 도전이었다. 포카라에서 트레킹 시작점인 나야풀까지 가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도로 위를 덮고 있어야 할 아스팔트는 뜯기고 파여 온데간데 없었다. 그나마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란다. 나야풀에 도착하자 택시와 버스, 각국에서 몰려든 트레커들이 한데 뭉쳐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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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여정은 나야풀에서 힐레를 지나 울레리(1960m)까지. 초반 코스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만년설이 녹으면서 형성된 계곡을 끼고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된다. 하지만 한국의 늦여름과 비슷한 날씨에 고전했던 하루였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쏟아지는 땀을 주체하지 못해 자꾸만 쉴 자리를 찾았다.

'힐레'에서 점심으로 주문한 '달밧(dahlbat)'은 맛의 외연을 단박에 넓혀 주었다. 네팔의 가정식 백반인 달밧은 커다란 쟁반 위에 콩스프와 밥 그리고 몇 가지 야채반찬이 곁들여 있는 형태다. 달밧의 또 다른 특징은 식당마다 맛이 다르다는 데 있다. 네팔을 방문했다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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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레에서 울레리까지는 가파른 계단길이 이어진다. 코스자체가 설악산 오색~대청 구간을 연상케 했다. 이곳을 당나귀 무리를 끌고 한 몰이꾼이 오른다. 당나귀 무리에 막혀 천천히 뒤를 따랐다. 몰이꾼의 휘파람과 추임새가 능수능란하다. 회색 빌딩 사이에 갇혀 지내온 내겐 갑자기 등장한 나귀 떼는 마냥 신기한 존재였다.

7시간 만에 '울레리'에 도착했다. 양쪽으로 갈라진 푸른 산 한가운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설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풍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커피 위에 아이스크림이 올려져있는 달콤한 비엔나커피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이 광경에 그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

설산이 바로 보이는 양지 바른 '로지(lodge)'에 여장을 풀었다. 하루 숙박비는 우리 돈으로 3000원이 조금 넘었다. 물론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려 있는 호화(?)숙박업소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방음은 사치였고 푹신한 침대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다. 잠을 청할 수 있는 독립 공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환경이었다.

하지만 로지의 밤은 흥분 그 자체였다. 황홀하게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에베레스트(현지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고, 그 사이 먼발치서 설산이 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첫 번째 밤은 그렇게 조용한 흥분 속에 깊어갔다.

내 인생을 바꿔놓은 한 번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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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창문 사이로 안나푸르나가 백의 미소를 띠고 있다. 이튿날 여정은 이번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를 향해 가는 길이다. 울레리~고레파니(Ghorepani, 2860m)는 4~5시간 정도 걸리는 비교적 짧은 구간. 첫날 가파른 언덕을 오른 덕에 2일차 트레킹은 한껏 여유가 있었다.

고레파니는 '푼힐(Poonhill, 3210m)' 일출을 보기 위한 전진기지다. 고레파니에서 푼힐까지는 40~50분 정도 거리다. 많은 트레커들이 '고레파니'에 숙소를 잡는 이유다. 중간 중간 로지에서 바쁠 것 없는 트레커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가만히 그 틈에 섞여 땀을 식혀본다.

고레파니 '그린뷰 로지(Green View Lodge)'에서 두 번째 밤을 맞았다. 푼힐 트레킹을 위해 이른 저녁을 먹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오전 4시. 무거운 몸을 침낭에서 빼냈다. 산속의 새벽은 얼음장처럼 찼다. 추위를 뚫고 40분 정도 숲길을 오르니 푼힐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둘 사람들이 늘어갔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하늘은 티끌하나 없는 회색 빛 도화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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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의 여신'이란 뜻을 갖고 있는 안나푸르나는 서쪽부터 1봉(8091m), 3봉(7555m), 4봉(7525m), 2봉(7937m) 순서로 이어진다. 3봉 남쪽에는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997m)'가 우뚝 솟아 있다. 뾰족한 봉우리가 마치 물고기 꼬리처럼 생긴 마차푸차레는 '피시테일(Fish's Tail)'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동쪽 하늘에서 황금빛 해가 떠올랐다. 유난히 눈부신 해였다. 산꼭대기에서 황금빛 물결이 번져 나갔다. 순백의 안나푸르나는 황금빛 외투를 걸쳐 입었다. 금빛 향연 앞에 탄성했고, 짧은 일출에 탄식했다. 푼힐에선 경계가 허물어졌다. 하나의 장면에 여럿의 마음이 감동했다. 최소한 이곳에선 언어와 사고가 다르다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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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힐 일출로 출렁이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길을 나섰다. 사흘째 트레킹은 '고레파니~간드룽(Ghandrung, 1951m)' 코스. 대략 6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 코스는 정글 지대를 지나는 등 안나푸르나의 숨겨진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날로 추억된다. 무엇보다 구름이 이리저리 펄럭이는 '타다파니(Tadapani, 2590m)'의 조망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안나푸르나는 순백의 얼굴로 하루를 시작해 정오 즈음 여지없이 하얀 면사포를 쓰며 트레커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타다파니 도착이 조금만 늦었어도 이 황홀한 비경을 놓칠 뻔했다.

타다파니~간드룽을 거쳐 하루를 자고 다음날 트레킹 시작점 나야풀로 하산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안나푸르나가 왜 '수확의 여신'이란 뜻을 갖고 있는지를 여실이 보여주는 장면이 펼쳐진다.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에는 누런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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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가는 벼들 사이로 트레커들이 스쳐지나간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그 주위를 둘러싼 자연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극적인 만남을 허락한다. 거창한 철학적 표현을 빌릴 필요도 없다. 있는 대로 보고 느끼면 그것이 철학이고 곧 삶인 곳이다.

내 생의 첫 번째 히말라야가 된 안나푸르나 트레킹. 난 이곳을 다녀와 극심한 행려병에 걸려 일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몇 년 뒤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떠났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정말 꼭 한번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요?"
"어느 나라가 됐든 좋습니다. 히말라야라면..."
"왜죠?"
"작아지는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혹 저처럼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고요."


태그:#네팔여행,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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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찍고, 쓰고, 생각하며 살고자 합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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