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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 쓴 장편 역사소설 '남한산성'. 수십 만 부가 팔린 책이라 여러 아이들이 읽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김훈이 쓴 장편 역사소설 '남한산성'. 수십 만 부가 팔린 책이라 여러 아이들이 읽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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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에서조차 '남한산성'을 읽은 학생이 한 명도 없다니...


요즘 아이들 책 읽지 않는다는 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수업을 하다 보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수업 중 아이들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과 관련된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참고자료로 활용하려고 해도 그다지 쓸모가 없다. 그러다 되레 수업 흐름이 끊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오늘 수업이 딱 그랬다. 진도에 맞춰 소설 <남한산성>의 주옥같은 문장들을 인용해 아이들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병자호란 당시 45일간 성에 갇힌 채 벌인 주전론과 주화론의 첨예한 갈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출간된 해에만 이미 수십만 부가 넘게 팔린 데다, 지금 학교 도서관에도 여러 권 비치된 책이니 만큼 적어도 모둠에서 한 명 정도는 읽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뿔싸! 모둠은커녕 반에서조차 이 책을 읽었다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많은 아이들이 제목조차 낯설어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지난 방학 때 가족들과 남한산성에 가봤다며 친구들 앞에서 우쭐대기도 했다.

가족여행을 통해 그는 적어도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연관성을 알게 됐다고 하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갈수록 태산이다. 한 아이는 "자기들은 이과라서 그런 역사 관련 소설책은 대학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보단 차라리 계열과 관련이 깊은 공상과학소설이나 과학 잡지가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 책이라도 많이 읽는다면 반가울 일이지만, 물론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왕이면 대학 입시에 보탬이 되는 책을 읽어야지, 수험생 처지에 '엉뚱한' 책을 읽는 데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는 이야기다.

선택한 계열과 학년에 따라 맞춤형 독서 하는 게 일반적

주지하다시피, 교내 '수상 경력'이나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독서활동상황' 역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을 준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스펙' 중 하나다. 그 자체로 당락을 결정짓는 전형 요소는 아니라 해도, 적성과 진로, 선택한 학과와의 연관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고교 시절 자신의 독서 경험을 지원하려는 대학 및 학과와 연결시킬 수 있는 '내러티브'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비교과 활동의 핵심 영역인 동아리활동이나 봉사활동도 자신의 진로에 맞춰 '재구성'한 다음 학생부에 기재하는 것처럼 독서활동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나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을 읽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러다 보니, 학종을 준비하는 아이들이라면 자신의 흥미보다는 선택한 계열과 학년에 따라 '맞춤형' 독서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미 학교에는 여러 대학에서 제공한 '고등학생 권장 도서 목록'이 비치되어 있다.

특히 해당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둔 경우라면 '권장 도서'를 '필독서'로 여길 수밖에 없는데, 친절하게 책 제목과 관련된 학과를 짝지어놓은 경우도 있다.

학종이 대세가 되면서, 교과서 밖 책 읽기까지 시나브로 대학입시의 어엿한 변별 항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보니, 독서를 통해 자신의 진로를 탐색해가는 게 아니라, 고1 때 한 번 정한 진로에 따라 책을 골라 읽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독서가 즐거울 리 없고, 정작 책을 읽는 것보다 독후 활동과 기록이 더 중요한 일이 되고 만다.

오죽했으면 대학입시에 반영한다고 아이들을 을러댈까 싶지만, 거칠게 말해서, 이는 과거 온갖 체벌을 통해 공부시키는 방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더욱이 책 읽고 난 뒤의 느낌마저 대학입시에 보탬이 되도록 어떻게든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즐거움은커녕 적잖은 압박 요인이다. 아이들이 책과 멀어지고, 그마저 양극화되고 있는 건 이런 분위기 탓이 크다.

어쩌면, 우리나라 성인의 독서량이 발표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인 것도, 평생 동반되어야 할 독서 습관이 고교 시절 대학입시에 치여 부담스러운 일로 각인된 탓 아닐까 싶다.

일부 학부모들과 교사들은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을 두고 다짜고짜 스마트폰과 인터넷 게임 때문이라 말하지만, 기실 그것은 이미 책과 담 쌓은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일 뿐이다. 기성세대가 멀리하는 책을 아이들이 즐겨 읽을 리 만무하다.

숨 쉴 시간조차 없는 아이들에게 독서 강요는 뻔뻔한 짓

대학에서는 학종이 기존의 수능과 달리 아이들의 독서 습관을 길러줄 수 있는 대안인 양 말하지만, 이렇듯 학교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학종은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는 '협박'일 뿐이며, 건강한 독서 습관을 왜곡시킬 우려마저 크다.

수능 체제가 더 낫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자발적인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제도라면, 백약이 무효다.

사실 대안이 없는 게 아니라 실천할 의지가 없는 게 문제다. 우선,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주어야 한다. 아이들 일과표를 보면 책을 읽으려야 읽을 시간이 없다.

밤 10시까지의 야간자율학습 시간조차 각 과목 숙제하느라 짬을 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으면서 독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참으로 뻔뻔한 짓이다.

지난 5월 말에 있은 학생회장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을 10분 늘리는 문제였다. 해당 공약에 아이들은 맞장구치며 호응했고, 현재 학교와 일과 시간표 변경에 관해 다양한 논의가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렇듯 밥 먹을 시간도 없다고 난리인데 짬 내어 책을 읽으라는 말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밑도 끝도 없는 방과 후 수업을 대폭 줄이고, 도서관이든 교실에서든 교사와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면 된다. 다양한 독후활동에 대한 고민은 차후의 문제다.

아이들이 '멍 때리는' 모습을 잠시도 보아 넘기지 못하는 교사와 학부모들의 강박이 책 읽기를 어떻게든 대학입시에 반영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제도를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유별난 스마트폰 사랑은 '숨 막히는' 학교에 대한 반작용 아닐지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독서하라고 다그치는 것보다 '멍 때릴' 시간을 주는 게 아닐까.(사진은 2014년 제1회 멍때리기에 참가한 직장인 대표 이나경씨.)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독서하라고 다그치는 것보다 '멍 때릴' 시간을 주는 게 아닐까.(사진은 2014년 제1회 멍때리기에 참가한 직장인 대표 이나경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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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일지도 모르나, 요즘 아이들의 유별난 스마트폰과 인터넷 게임 '사랑'은 숨 막히는 학교생활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곧, 차단과 단속은 대증요법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는 이야기다.

차라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혈기왕성한 고교 시절, 교과서와 문제집에서 해방되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뛰어놀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확신한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흔히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게임 때문이라며 핑계대지만, 그보다는 역시나 대학입시에 찌든 학교생활 탓이 크다고 봐야 한다.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여유가 끝내 아이들의 손에 책을 들리게 할 것이라 믿는다.

책 읽기의 즐거움은, 학종의 '협박'이나 교사나 학부모의 '훈화'로 생겨날 리 없다. 아이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환경을 제공하고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려니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교과서 대신 소설 <남한산성>을 교재 삼아 한 학기 동안 함께 공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물론, 당장 내년이면 국정교과서로 가르쳐야 하는 마당에 언감생심 검인정 교과서도 아닌 소설책을 교과서 삼는다는 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될 테다.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로 변해가는 학종을 탓하기 전에, 어쩌면 교과서가 아이들의 책 읽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년 교직 경험으로 미루어, 수업이 교과서 하나에만 의존할수록 아이들은 책 읽기로부터 시나브로 멀어지게 된다. 하물며 국정교과서 한 권뿐인 수업임에랴.

사족 하나. 재미있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학생부의 독서활동상황은 책을 읽은 학생이 아니라 정작 담임 또는 교과 담당 교사가 작성하도록 돼 있다. 학생이 어떤 책을 읽었고, 읽고 난 후 소감이 어떤지, 또, 그것이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등을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해야 하는 셈이다. 결국 교사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학종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게 바로, '학종의 성패는 담임교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담임교사를 '잘못' 만나면, 곧 학생부를 풍성하고 화려하게 채워주지 못하는 담임교사를 만나면, 학종은 물 건너간다는 뜻이다.

대학에서도 이 점을 인정하며, 되레 담임교사의 책무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책은 아이가 읽지만, 교사가 대신 감동해야 하는' 학생부 독서활동상황을 두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태그:#학생부 종합전형, #독서활동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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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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