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학술답사팀과 동행했던 필자의 두 번째 행보는 대모도다. 청산도에서 9㎞ 떨어져 배로 30분쯤 걸리는 모도는 띠(草)가 많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에 있는 면소재지 청산도와 6.3㎞, 서쪽에 있는 소안면과 6.5㎞, 남쪽 1.7㎞ 지점에 가남여가 있으며 멀리 제주도가 있다. 총면적 608㏊에 해안선 길이 21.65㎞인 모도 마력산에는 철분이 있어 예부터 철선이 왕래하면 광맥으로 인한 흡인력 때문에 모동리쪽으로 배가 끌려간다고 해 '마력모도'로 전해지고 있다.
대모도를 대표하는 마을에는 모동리와 모서리가 있다. 청산도를 떠나 대모도로 향하는 '섬사랑 7호'에는 일행 4명만 탔다. 선장에게 "왜 승객이 네 명 밖에 안 되느냐"고 묻자, "생활권이 완도이기 때문에 청산도를 거쳐 대모도로 가는 승객은 별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동리에서 내려 승용차를 타고 모서리에 도착하니 지인이 선창가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내력을 물으니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확실한 고증은 없지만 임진왜란 이전에도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일찍 개화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모서리 주민들한때 135호에 달했던 모서리에는 현재 55호에 8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전복, 김, 가두리 양식과 삼치잡이가 주를 이루는 마을엔 독거노인이 대부분이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최철환씨는 학생들이 없다고 소규모학교를 통폐합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생이 150명에 이르렀지만 현재 5명이 재학 중입니다. 학교는 마을공동체의 중심입니다. 교육청에서 학교를 폐쇄하려고 회의할 때 주민이 반대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섬에 들어와도 유치원부터 다른 지역으로 보내든가 엄마가 다른 지역에서 살아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교육받을 권리가 있어요. 저도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도회지로 나갔다가 교육을 마친 후 다시 들어왔어요.""옛날에는 육지가 교통이 훨씬 불편했다. 바다는 배가 있어서 부산과 목포, 일본으로 다녀 일찍 개화됐다"고 말한 그는 "이곳 논 한 마지기 팔면 해남에서 세 마지기를 샀다"며 일부 언론인들의 바다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비판했다.
"섬은 외롭고 쓸쓸한 곳으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섬에는 항상 생동감이 있고 바다는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반도국가에서 바다를 빼버리면 뭐가 남습니까? 반도국가에서 바다는 희망입니다."
"모동리 사람들은 온화하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한 그가 일제강점기 시절 벌였던 모서리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신학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주민들은 1921년에 개량서당인 '모도원숙'을 세워 주민들에게 학문을 일깨우면서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1923년 9월 마을 청년 14명이 개량서당을 지원할 목적으로 모도배달청년회를 조직했다. 총책임자인 천병섭 외에 5명은 이웃한 섬인 소안배달청년회와 연대해 국권회복을 열망하는 애국가와 혁명가를 보급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진취적인 기상을 지닌 모서리에서는 검판사가 7~8명 나왔다. 전임이장인 정남세(78)씨는 완도에 참여연대가 출범할 때부터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다며 "소 네 마리를 키우며 행복하다"고 말했다.
"Learning is growing, Growing is learning(배우는 게 성장이고, 성장이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해요. 이 나이에 도시에 살면 할 게 없을 텐데 여기서는 지금도 할 일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