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꺼내 들었다. 24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서다. 당초 세간의 관심은 대통령이 이번 시정연설을 통해 우병우 민정수석과 최순실씨의 이름을 거론하느냐에 집중됐다. 벌써 수개월 째 '우병우 게이트'로 국정이 마비되고 있는데다, 최순실씨 관련 의혹 역시 개인의 단순 불법행위를 넘어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된 탓이다. '우병우·최순실 게이트'는 어느새 대통령이 피해갈 수 없는 강력한 태풍이 됐고 대통령 지지율도 덩달아 곤두박질치고 있다.
개헌 카드는 이런 곤궁한 상황에서 나왔다. 대통령의 저의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이유다. 개헌은 누구 말마따나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 들어갈 수 있는 파괴력과 폭발력을 갖춘 의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정치권도 크게 술렁이고 있다. 연일 '우병우·최순실' 관련 의혹들로 도배하다시피 했던 언론 역시 대통령의 개헌 발언과 그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통령은 이날 "이제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한계를 어떻게든 큰 틀에서 풀어야 하고 저의 공약사항이기도 한 개헌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정치일정을 감안할 때 시기적으로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하게 됐다"며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대통령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현행 권력구조는 그 한계가 이미 명확하다. 임기 말 대통령들은 대부분 불행했거나 국민의 신뢰를 얻는데 실패했다. 임기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권력남용이 극에 달했던 이명박 정권, 독단과 독선의 일방적 국정운영을 고집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이야말로 87년 체제가 역사적 소임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런 까닭에 개헌의 당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야 국회의원의 수만 해도 200여 명에 달한다. 개헌에 찬성하는 국민여론도 높다. 문제는 대통령이 개헌을 꺼내 든 저의다. 청와대는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지금은 개헌 이슈를 제기할 때가 아니라는 게 확고한 방침"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대통령의 시정연설 이후 청와대는 "지난 추석 연휴 기간 대통령에게 개헌 관련 최종 보고서를 올렸고, 연휴 마지막 무렵에 대통령이 개헌 준비를 지시했다"고 말을 바꿨다. 지난 9월 중순 무렵 이미 박 대통령의 결심을 섰다는 뜻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지난 10월 10일 여당 내에서 제기되던 개헌논의에 대해서는 강하게 제동을 건 바 있다.
앞 뒤 말이 맞지 않기는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대통령은 여러차례에 걸쳐 개헌에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었다. 올해만 해도 새해 기자회견에서는 "청년들은 고용절벽에 처해 하루가 급한 이런 상황에서, 뭔가 풀려나가면서 그런 얘기도 해야 국민 앞에 염치가 있다. 저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 얘기다", 4월 26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 당시에는 "지금 이 상태에서 개헌을 하게 되면 경제를 어떻게 살립니까?"라며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개헌논의에 분명하게 선을 그은 바 있다.
이랬던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말을 바꿔 개헌을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 민생경제를 포함해 국정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다. 대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들어갈 수 있다"며 맹비난했던 바로 그 당사자다. 대통령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갑작스런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우병우·최순실 게이트'의 의혹을 덮기 위한 국면전환용 차원이라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일련의 사태에 대통령이 법과 원칙, 상식과 도덕률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했더라면 이번 개헌 제안이 달리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당도 포기한 우병우를 끝까지 지켜냈고, 최순실씨는 비호하기에 급급했다.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정략적이라는 것은 개헌을 청와대가 주도하겠다고 밝힌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김재원 정무수석은 시정연설 이후 추가 브리핑에서 "개헌안을 논의할 때 지지부진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논의가 진척이 안 되면 대통령이 보다 많은 의사를 표현하고 의지를 밝힘으로써 개헌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이 헌법 개정안을 제안할 수도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국회 내에서 개헌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취지다.
결국 대통령의 제안은 개헌 정국을 통해 현실의 곤궁함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뜻이며, 임기 말 권력누수를 최소화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개헌이 성사되든 안 되든 대통령이 잃을 것이 거의 없다는 점, 향후 개헌 여부에 따라 퇴임 이후 국내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양수겸장의 카드인 셈이다.
4·19 혁명은 6.15 개헌으로 이어졌고, 87년 6월 항쟁은 현 헌법체제를 완성하는 변곡점이 됐다. 이렇듯 역사의 변곡점에는 당대인들의 치열하고 특별한 흔적이 오롯이 배어 있다.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어떻게 결론이 날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번 개헌을 '우병우·최순실'이 주도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 싶다.
지난 30년 동안 어느 정권도 해내지 못한 개헌이 대통령 측근의 비리 의혹으로부터 시작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아이러니다. 대한민국의 비정상성을 이보다 더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또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국민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