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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그림책
▲ <아무도 지나가지마!> 알록달록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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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표지엔 다소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장군이 말을 타고 있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제목과 글, 그림 작가, 출판사 이름이 적혀 있다.

보통 책을 넘기기 전 뒤표지를 펼쳐 앞뒤 표지를 한눈에 훑어본다. 앞표지와 연결된 그림으로 구성한 뒤표지도 있고, 책을 읽기 전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구성한 뒤표지도 있고, 여운을 남기는 뒤표지도 있다.

이 책은 예고편 같은 내용을 뒤표지에 실어놓았다. 각양각색의 선 아래 알록달록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예고편이 실려있다.
▲ 뒤표지 예고편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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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두고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내용인가? 누나와 형에 치여 보고싶은 뽀로로도 못보고 사는 우리집 막내가 떠오른다. 막내라고 무시당하는 고단함에 늘 앞서 가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걷지 않고 달리느라 하루가 멀다 하고 상처투성이인 막내.

책을 읽기도 전에 별 생각을 다 하며 표지를 넘기니 면지 가득 다양한 인물 62명이 저마다의 표정과 이름을 달고 그려져 있다. 아마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인가 보다. 이들 모두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걸까?

수많은 등장인물 때문인지 책은 속표지에서 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속표지 제목 아래 장군 알칸자르가 고함을 치며 군인 구아르다에게 "꼼짝 말고 아무도 못 지나가게 지켜!"라는 명령을 내린다. 맨 먼저 지나가면 무조건 주인공이 되는 건가? 장군의 명령이 이해가 안 가지만 이 명령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일단 들어보자.

아무일 없다는 듯
▲ 누누가 길을 간다 아무일 없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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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는 황당무계한 명령

책장을 넘기면 왼쪽 페이지 끝에 구아르다가 보초를 서고 있고, 강아지 비비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오른쪽 페이지는 텅 비어 있다. 다음 장을 넘기면 누누가 걸어들어 온다. 가던 길을 계속 걸어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가려는 순간, 구아르다는 장군의 명령을 전한다. 누누에 이어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왼쪽에서 오른쪽 페이지로 이동하며 진행되던 기존의 이야기책 방식에서 벗어난 이 책은 등장인물들을 모두 오른 쪽 페이지에 머물게 하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구조적 한계와 상상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그림책을 만드는 단짝 포르투갈 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 글 작가와 베르나르두 카르발류 그림 작가가 얼마나 재미있게 이 책을 만들었을지 상상이 간다.

작가들의 기발함에 입을 벌린 채 책장을 계속 넘기고, 사람들은 왼쪽 페이지로 점점 더 몰려온다. 군인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는 알비노 할아버지, 숨이 막혀 얼굴이 빨개지는 우주인 넬루,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신을 해야 하는 외계인 마르셀리누, 도망가야 하는 탈옥수 살가두와 이시도루, 공사를 해야 하는 밥과 조지, 모두가 자신들만의 사연으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이유로 그 많은 사람들을 막아선 장군의 명령. 그리고 술렁이는 사람들.

황당무계한 장군의 명령이가로막은 길
▲ 멈춰요! 황당무계한 장군의 명령이가로막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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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데요? 전쟁이라도 났어요? 누가 쳐들어왔나요? 아니면 시위라도 벌어졌어요? …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도 안돼요! … 맙소사! 도대체 뭐지? 못간다고? 어? … 여기봐요! 군인아저씨 지나가게 해주세요... 나는 지금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요! … 아이고 점점 숨이 막힌다. … 우린 도망가야 해!"

"명령을 따른 뿐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어느 틈에 아이스크림 장사도 등장했다. 명령에 따를 뿐이라는 기계적인 답을 하는 군인과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다. 함께 책을 보던 삼남매에게 '이제 어떻게 하지?'라고 물어보았다.

"지나가지 말라니까 그냥 있어야지."
"그냥 가버리지 뭐. 길도 주인이 따로 있나?"
"다른 길은 없나?"

평소 성격대로 답이 나온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고작 한 명뿐이지만 총을 들고 선 군인이 무섭다. 그러나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자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오른쪽 페이지에서 마음에 드는 인물을 골라 어느새 등장인물이 되어 있는 삼남매와 함께 나도 책 속으로 들어가 어깨를 맞대고 섰다.

뭐라고요?
▲ 장군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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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가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연대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힘이 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맞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때 사건이 발생한다. 주위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복잡한 왼쪽 페이지를 돌아다니며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공이 통통통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간 것이다!

순간 정적이 흐르는 왼쪽 페이지. 아이들은 군인에게 사정을 하고, 고민 끝에 구아르다는 "빨리 지나가세요. 이번 한 번만…"이라고 명령을 해제한다. 아이들과 강아지가 공을 향해 오른쪽 페이지로 잽싸게 넘어간다.

보이지 않는 명령 때문에 책의 2/3가 진행될 때까지 오른쪽으로 넘어가지 못한 사람들. 만삭 임산부 클라라가 곧 둘째를 낳을 것 같다. 다음 장에서 어떻게 될지 책장을 넘겨보기 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전혀 무섭지 않은, 우스워보이기까지 하는 장군의 얼굴을 다시 찾아보았다.

장군의 얼굴 위로 많은 이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받들어야 하는 병사의 얼굴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더 앞으로 넘겨 면지에 가득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짚어 보았다. 그 위로 3년 만에 겨우 뭍으로 올라온 커다란 배가 떠올랐다.

 통! 통! 통! 통! 공이 넘어갔다.
▲ 앗! 그런데! 통! 통! 통! 통! 공이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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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가만히 있지 않겠다, 넘어가겠다

그리고 달력을 보니 다시, 4월이다. 벚꽃과 목련이 갑자기 함께 피기 시작하던 그 해, 2013년의 4월. 그때부터 이상하고 슬픈 4월의 봄을 맞고 있는 우리 모두. 마침 이런 때 만난 그림책 <아무도 지나가지마!>.

'가만히 있으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속도 없이 따르다 해마다 4월이면 꽃눈으로 오는 304명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이 뿌연 바람 속에 흩날리는 4월, 그런 4월이 또 왔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40대 기성세대로 진입하면서 합의된 의견이 아닌 일방적인 명령 앞에 '왜?'라는 의문을 던지지 못하고 조직의 이익, 관례라는 이유 아래 개인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을 점점 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불편함보다 소란스러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다. 아무리 촛불을 들어도, 그건 아니라고 외쳐도 들어주지 않는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3년 만에 바다 위로 그 배가 떠오르던 날, 아이들의 빨간 공은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갔고, 나도, 우리 모두 넘어갈 수 있음을 알았다. 오랜 시간 공공연하던 것들이 바뀔 수 있는 기회 앞에 선 4월이다. 5월 9일, 아직 봄꽃이 피어있을 때다. 넘어간 그 공을 따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정답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걸로!
▲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정답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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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책으로 돌아가 더 이상 비어있는 않은 오른쪽 페이지를 본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구아르다에게 화가 난 장군은 칼을 뽑아들고 자신의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에 맞서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간 사람들은 더 크게 저마다의 말을 한다. 이야기의 끝은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시민들의 통쾌한 승리로 마무리 된다. 장군을 태우던 말마저 시민의 편으로 넘어가면서.

마지막 장군의 공허한 질문에 동문서답을 하며 나도 책을 덮는다. 나의 장군은 누구일까? 내가 장군이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지금 나는 장군일까, 군인일까, 공놀이를 하는 아이일까? '이상하고 아름다운' 한 권의 그림책을 만나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또 다시 돌아온 4월의 16일을 향해 나는 넘어간다.

*깨알팁 하나*
앞뒤 면지의 등장인물들 모습이 깨알같이 다르다. (앞에선 62명, 뒤에선 63명. 새롭게 등장한 한 명은 누구일까요?)  이야기가 흐르면서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마음에 드는 인물을 골라 이 책의 주인공으로 삼고 다시 그림책을 읽어보자.

각각의 인물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공이 넘어갔을 때, 장군이 등장했을 때 어떤 표정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따라가며 상상해보길! 한 권의 그림책에서 63가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태그:#그림책, #아무도 지나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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