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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걸려있는 병원 광고들. 서로 경쟁하듯 최고급 시설과 의료진을 자랑한다. 내가 학교 다니면서 의료법규를 배울 땐, 의료기관 광고에 횟수 제약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 같다. 비영리 법인으로 운영되는 의료기관의 광고비용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병원이 빼어난 의료기술을 자랑하는지도 궁금하다.

의료 현실은 예전과는 판이하다. 동네에 듬성듬성 하나씩 있던 의원급 의료기관들은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연세가 지긋한 의사선생님이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묻는 광경을, 이젠 쉽게 보기 힘든 지경이다. 병원도 생존경쟁에 내몰렸기에 환자들을 돈으로 보는 상황이 허다하다. 많은 분들이 경험해보셨을 것이다.

특히 진료 시 실손의료보험 가입 여부부터 묻는 광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3차 의료기관인 대학병원은 또 어떤가. 야간에 몸이 아파 찾아간 응급실에선 과밀화 때문에 사람이 넘쳐난다. 어떤 경우엔 응급실 문 앞에서 마냥 기다려도 끝이 없다. 응급이든 외래든 진료를 본다 한들, 루틴하게 처방되는 각종 검사들은 서민들의 목을 조인다.

병원은 병원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서로 신뢰와 불신 사이, 무한한 생존경쟁에 내몰려 아우성이다. 그러다보니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얼마 전 경악할 만한 뉴스를 접했다. '약 안 먹이고 아이를 키운다'는 일명 '안아키' 때문이었다.

의료기관을 믿지 못하는 엄마들이 아이에게 약을 먹이지 않고 자연치유 시키겠다는 시도였다. 이 또한 일종의 의료 불신으로 볼 수 있다. 의사를 믿는다면 병원부터 가는 게 마땅할 텐데 불신이 팽배한 의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의료가 붕괴되다

한국 의료시스템을 고발한 책 <의료붕괴>
 한국 의료시스템을 고발한 책 <의료붕괴>
ⓒ 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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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인의협(인도주의적 의사실천 협의회) 소속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좋은 책을 추천받았다. 현 의료 현실을 반영하듯 제목도 '의료 붕괴'다. 이 책은 보건의료단체 연합을 이끌고 있는 우석균 대표와 인의협 소속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집필한 결과물이다. 의료 정책의 시대적 변화와 그에 따른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주는 게 이 책의 특징이다.

앞서 서론에서 열거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책 표지에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의료민영화', '영리병원', '백남기 사망진단서', '청와대 불법시술', '과잉 진료' 등을 주제로 다뤘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슈가 됐던 의료 사건들이다. 이런 사건들의 배후엔 공공의료 붕괴를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이 책에선 진주의료원 폐업 사례를 지적한다.

"진주 의료원은 응급실, 분만실, 중환자실 등 돈 안 되는 필수 의료를 유지하고, 사립병원(민간병원)들보다 과잉진료가 적어 진료비가 타 병원의 70% 밖에 안 되게 싼 탓에 적자가 생긴다. 거의 모든 지방의료원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적자다." - 37P

서민을 위한 필수 의료. 공공의료를 지향하는 진주 의료원을 부채의 배후에 강성 노조가 있음을 적시하여 강제 폐업시킨 희귀한 사건이다. 당시 홍준표 지사의 일방적 폐업에 보건복지부와 박근혜 정부는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모른 체 했다.

박근혜 정부의 공공의료 관점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는 공공병원 비율이 현재 5% 밖에 되지 않는다. OECD 평균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이 70%인 것을 감안한다면 더 늘려야 할 텐데 폐업을 했다. 이건 국민의 건강을 돈으로 보겠다는 발상이다.

건강보험 20조 흑자

건강보험 재정 흑자 소식이 여러 언론사를 통해 들려왔다. 노령화를 대비한 자금 축적이라는 명목 하에 추가 지출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20조 흑자의 이면에는 사연이 존재한다. 왜 흑자가 됐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선 건강보험 흑자의 이유를 '나빠진 가계 형편으로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라고 못 박았다. 정부가 주장하는 '건강해진 노인'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또한 20조에 이르는 기금을 환자들을 위해 써야한다고 역설한다. 흑자일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이 책에선 자세하게 알려줬다.

"1년에 2조 원만 써도 입원 환자들에게 가장 큰 부담인 간병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간병비는 한 달에 대략 200만 원이나 돼서 입원 했을 때 어지간한 노동자 서민 가족이 감당하기 힘들다. 연간 3조 원만 쓰면 모든 국민이 건강보험 입원 본인부담금을 전혀 내지 않을 수도 있다. 가족이 중병으로 입원하면 중산층도 휘청할 정도로 각종 검사비와 병실료 등 입원비는 너무 비싸다. 1년에 2조 원을 쓰면 19세 미만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은 의료비를 내지 않아도 병원에 다닐 수 있다. 게다가 몇천 억에 달하는 1년치 이자 수익으로 진주의료원 같은 국립 병원을 7개씩 지을 수 있다." - 197P

지금 쌓여있는 돈을 쓰면 힘들어하는 많은 서민들을 질병과 빈곤에서 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불어 14%에 달하는 국고보조금도 호시탐탐 줄이려 한다며, 이에 대한 법적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바람직한 의료

의료비로 인해 파산하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간단한 질병이라면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4대 중증 질환이나 희귀질환 같은 경우는 병원비가 천정부지로 뛰기 때문에 서민들이 감당할 수 없다. 이것은 의료 공공성의 부족과 관련이 깊다. 의료를 인권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블루오션인 돈벌이로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의료는 산업이라는 기조가 팽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젠 그간의 의료공공성을 역행하는 비정상에서 벗어나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상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선 의료공공성 강화를 기대해 볼 만하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도 의료 공공성을 주장하고 있기에, 더 이상 의료 붕괴가 일어나지 않고 바로 설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건강 정책'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국민의 건강은 국가 발전의 튼튼한 기반이다.


의료붕괴 - 한국 의료시스템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우석균 외 지음, 이데아(2017)


태그:#의료붕괴, #의료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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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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