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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책표지.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책표지.
ⓒ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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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거기다 꼼짝할 수 없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심지어는 눈동자나 입조차 움직일 수 없다. 고개조차 움직일 수 없어서 누가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돌려주기까지 언제까지고 그냥 그대로 있어야만 한다. 내 맘대로 무엇하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상상만으로 숨이 막힐 듯,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이다.

아니 문득 드라마를 통해 본, 우리가 흔히 식물인간이라고 표현하는 의식불명의 환자가 떠오른다. 여하간 정신이 깨어 있는 한 그럴 순 없을 것 같다. 최소한 갓 태어난 아가들처럼 우는 것으로라도 뭔가를 알리거나 요구하거나, 하다못해 몸이라도 굴려야 고통스럽거나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일이 누군가에게는 매일,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견뎌내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라면?

남아공에서 태어나 자란 마틴 피스토리우스(1975~. 이하 마틴)가 한때 처했던 상황이다. 평범한 소년으로 원만하고 건강한 생활을 했던 마틴은 열두 살 때 원인 모를 병을 앓으면서 의식불명에 빠지고,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런데 4년 뒤인 열여섯 살에 기적적으로 깨어난다. 그런 그에게 가족들은 재활치료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상태였다.

입이나 눈동자 움직임 등처럼 지극히 기본적인 것까지 멈춘 상태, 그래서 밤낮으로 그의 곁에서 간호하는 부모조차 의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눈은 떴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유령소년이었던 것. 모든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지만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는 그런 마틴, 소년에게 더욱 잔인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죽어야 해." - 91쪽.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푸른숲 펴냄), 책 제목은 마틴의 엄마가 어느 날 마틴에 한 말을 제목으로 삼았다. 어떤 정황에서건 부모가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 현실은 인간에게 너무 가혹하다.

그럼에도 마틴이 할 수 있는 것은 생명력이 전혀 없는 사물과 같은 몸으로 끊임없는 감정과 생각들과 싸워 견뎌내는 것뿐. 이런 마틴에게 희망이 시작된 것은 버나라는 간호사의 남다른 관심과 보호 손길 덕분이었다. 13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였다.

대부분의 요양사들은 마틴을 매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거리나 붙박이 가구 정도로 취급했다. 그래서 누군가 앞에서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을 마틴이 있는 데서 서슴없이 하거나, 민망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들에게 마틴은 관리하다가 때가 되면 폐기하는 그런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간호사 버나는 마틴의 눈빛에서 마틴이 무엇이든 볼 수 있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감정을 느끼는 것을 발견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당연히 둘은 충분한 의사소통을 한다. 눈빛만으로. 나아가 버나는 마틴처럼 사고 등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코라는 기계를 통해 뜻을 전달하는 AAC(보완대체의사소통) 세계로 이끈다.

20대 중반 넘어서 기계를 통해서라지만 말을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한 마틴은 대학에도 입학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는 등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낸다. 책에 따르면, 자아 회복력과 내면의 힘을 보여주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는 테드 강연으로도 소개되었고 190만 뷰 이상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단다. 그동안 그의 이야기는 절망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현재 마틴은 휠체어에 의지해 이동하며,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의사소통한다).

'그날 이후, 리나 선생님의 눈동자는 빛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가 샐리(기자 주: 중증 뇌성마비로 태어난 여자아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와 같은 아이도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대해야 하는 존재 이상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수년이 흐르는 동안, 냄비에 닭을 집어넣듯이 나를 시체 취급하던 숱한 사람들을 겪는 동안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준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요양사들은 감자 자루를 나르듯 내 몸을 옮기고서는, 얼음처럼 찬 물로 서둘러 씻긴다. 그럴 때면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비눗물이 눈에 들어오기 일쑤다. 그런 다음 그들은 너무 차갑거나 뜨거운 음식을 무심하게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나는 낮잠을 자다가 요양사가 성급하게 이불을 걷어 젖히는 바람에 밀려드는 차가운 냉기에 잠을 깼던 순간을 기억한다. 또한, 임시직 직원이 나를 거칠게 의자에 던진 나머지 의자가 뒤로 넘어가서 머리를 바닥에 찧었던 일도 기억한다.' - 64~65쪽. 

이 책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마틴이 암흑 속에서 견뎌내야 했던 숱한 순간들과(아마도 심리학 연구에 특별하며, 유용한 자료가 될 듯) 놀라운 생명력, 매우 감동적이거나 더 이상 추악해질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모습 등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한 환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본성과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딸에게 물었다. "어떤 부분에 북클립을 끼운?" 답한다."한번이든 몇번이든 다시 읽고 싶은 곳에..." 딸이 북클립을 끼워 놓은 페이지는 나도 모르게 좀 천천이 읽고 있었다. 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 좋다.
 딸에게 물었다. "어떤 부분에 북클립을 끼운?" 답한다."한번이든 몇번이든 다시 읽고 싶은 곳에..." 딸이 북클립을 끼워 놓은 페이지는 나도 모르게 좀 천천이 읽고 있었다. 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 좋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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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읽기를 바라는 부분에 메모지를 붙이며 읽은 후 딸의 책장에 꽂아뒀다.
 딸이 읽기를 바라는 부분에 메모지를 붙이며 읽은 후 딸의 책장에 꽂아뒀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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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딸이 권한 책이다. "지금 읽지 못해도 이런 책은 사둬야 해! 절판되기 전에!"라며 종종 책을 사들고 오는 딸이 지난 봄 어느 날 밤, 불쑥 내민 것. 그러나 불순하기 짝이 없는 제목에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대체 왜 자식이 죽길 바라는지 궁금한 한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색안경까지 끼고 말았다.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책 그렇게 추천했는데 읽지 않았지? 그래서 엄마가 힘든 거야. 힘들어 죽겠다는 말도 습관처럼 나오는 것이고! ㅋㅋ 이제라도 읽어봐."

딸이 적극 추천했음에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며칠 전, 참으로 힘들었던 그날, 뭘 해달라는 딸에게 해주기 귀찮아 지나가는 말로 "힘들어 죽겠다"고 했더니 찡긋 웃으며 가볍게 핀잔하듯 건넨 한마디. 그래서 읽었다. 몇 달 전의 딸처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지하철에서까지. 책을 읽던 날 함께 일하던 사람에게 읽기를 권하면서까지.

"더 이상 불행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한 처지로 추락한 한 사람의 놀라운 생명력과 의지, 그 감동과 힘을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추악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책이기도 해. 사람이 사람에게 중요한 존재인 이유도 생각하게 한 책이고... 그런데 만약 엄마가 이 엄마라면 엄마도 내가 죽길 바랄까?"

딸은 이 책을 읽은 후 소감을 이렇게 말하며 물었다. 딸의 소감에 공감하면서도 내가 만약 마틴의 엄마라면? 글쎄... 딸이 책을 읽은 지 몇 달이 지난 오늘 아침, 이 글을 쓰다가 "마틴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해?" 물었더니 "가끔 생각나지... 생각나겠지. 삶은 만만하지 않으니까. 힘들 때 생각날 거고, 힘이 나겠지. 아무리 힘들어도 죽겠다는 생각은 못하겠지!"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딸이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라고. 누구에게나 시련이나 절망은 있을 수밖에 없을 것. 이런 책들의 생명력이 딸에게 스며들어 힘들 때 위로나 힘이 되어줄 것이니. 마틴도, 책도, 딸도 고맙다.

덧붙이는 글 |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 마틴 피스토리우스 공저) | 이유진 (옮긴이) | 푸른숲 | 2017-03-24 ㅣ정가: 15,000원.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유진 옮김, 푸른숲(2017)


태그:#마틴 피스토리우스, #언어장애, #딸과 읽는 책,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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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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