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름이 세 개였다. 윤성민, 황민호 그리고 윤관석.
아명(아이 때 이름)이었던 '성민'과 민중의 호랑이라는 뜻을 담은 '민호'. 그리고 그의 진짜 이름 윤관석. 세 개의 이름으로 불린 그는 20대의 절반을 학생 운동에, 나머지 절반을 노동 현장 운동에 투신했다. 24살이던 1983년부터 공단에 들어간 '학출'(학생 출신 노동자)에게 가명은 일상이었다.
79학번 새내기였던 그는 "계엄령을 2번(10.26 박정희 살해 사건, 5.17 전두환 쿠데타) 맞은 겨울 공화국" 시기를 정통으로 지나야 했다. "정치적으로 너무 암울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던" 때였다.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눈을 돌렸다.
"이념서클에 들어가서 사상교육을 받는데 가슴이 뻥 뚫리고 내용 하나하나가 쏙쏙 받아들여지더라고요."어린 시절을 관통한 가난의 기억은 '왜'라는 물음을 그의 가슴에 품게 했다.
"집안이 어렵다는 것,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어릴 적부터 겪어온 가난이라는 문제가 문제의식을 싹트게 했고, 운동의 길로 빠져들게 했던 거 같아요." 30여 년이 흐른 후 그는 더불어민주당 의원(인천 남동구을)이 됐다. 윤 의원을 지난 14일 만났다.
'붉은 열차'를 타고 내려 온 항구도시...용접공으로 산 8년 세월 그가 처음부터 운동권에 발을 디딘 것은 아니었다. 기자가 꿈이던 새내기 시절 학보사에 들어가려 했으나 1학년은 받아주지 않아 발길을 돌린 곳이 교내 방송국이었다. 방송국 기자를 하며 학보사에 기고한 글을 본 선배가 이념서클에 끌어들인 것이 시초였다.
결국 '노동 해방'이라는 거창한 꿈을 꾸게 된 26살 청년 윤관석이 택한 곳은 인천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이 노동자로 '존재 이전'을 위해 1호선 국철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붉은 열차(당시 1호선이 붉은색)를 타고 유토피아의 꿈을 안고 항구도시로 내려왔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985년 대기업이 처음 노동권을 주장하며 파업한 대우자동차 사태 이후 인천은 희망의 도시가 된 터였다.
대학 졸업 후 구로를 거쳐 인천 주안공단에 남동공단까지. 그는 성실한 용접공으로 일했다. 다혈질 사장이 아침 조회 때 "윤관석씨 만큼만 일하라"고 지명할 정도로 인정받는 노동자였다. 지금도 용접을 할 수 있겠냐 묻자 천천히 손목을 돌리며 쇳물 녹이는 자세가 자연스레 나왔다.
"이 용접이란 게 손재주가 좋아야 해요. 쇳물 녹이면서 이렇게 이렇게 흔들어야 하는데 말이죠. 기능은 좋았죠." 그렇게 천천히 신뢰를 쌓아갔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작업장 청소부터 시작했고 오후 6시 퇴근 이후 잔업도 꼬박꼬박 했다. 일주일에 잔업만 보통 80시간, 많게는 140시간도 채웠다. 유일하게 잔업이 없는 수요일과 잔업을 마친 밤 9시 이후가 '학출' 출신으로 무대에 등장할 때였다. 이때도 주연은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쇳물처럼 녹아들어가야 했다.
다른 노동자들과 술도 한잔 하며 관리자들의 폭언과 갑질에 함께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위기가 조성됐다 싶으면 함께 문제제기에 나섰다. 하다못해 식당 반찬 질이 떨어지면 식당에서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소극적 투쟁도 '운동'의 일환이었다. 넌지시 시사 문제에 대해 얘기를 꺼내 '각'이 나온다 싶은 사람에게 접근해 대화를 이어가다 "노동법 공부하는 데 가볼래" 하며 공부 모임에 합류시켰다.
그렇게 5년여. 그는 노동자들 곁에 스며들어 갔다. 그러던 중 남동공단에 갑자기 학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3개월도 안 돼 성급하게 노동자들을 의식화 해 노조 결성에 나설 태세였다. 사측은 신원조회를 시작했다. 1차 때는 무사히 넘어갔지만 2차 때 색출됐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사람씩 각개격파 당할 게 뻔해 노조를 결성했다. 남동공단 출신 다부진 친구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초반에는 조직률이 40~50%가 될 정도로 호응이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측의 탄압이 시작되자 조합원이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구로공단 출신 서울 '통근파'들이 고참이었는데 "인천 애들이 운동권과 손잡고 회사를 망가트리려 한다"는 사측의 논리가 먹혔다. 결국 소수만 남았고 노조 간부 5명이 해고됐다. 복직투쟁을 하고 단식투쟁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런 식으로 노조를 조직하다 해고당한 횟수만 3번. 그래도 공단을 떠날 수는 없었다.
배추장사 하던 김씨는 용접 일을 시작한 후 한 달에 180시간 잔업을 이어갔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말에 나와 일하더니 결국 의자만 보면 앉고 싶다고 했다. 결국 진폐증 진단을 받았다. 쇠를 녹인 후 쇳물을 흘려 붙이는 기술인 용접일을 하다 보면 미세한 금속이 공기를 떠돌 수밖에 없다. 방진 마스크를 해도 환기가 이뤄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노동자들은 서서히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바꿔야 했다.
그렇게 쌓인 세월 8년, '아다리'(광각막염)는 수시로 찾아왔다. 강한 빛에 노출돼 눈 혈관이 팽창해 생긴 병이었다. 저녁부터 아프기 시작하면 밤새 앓았다. 내내 눈 속에서 자갈이 굴러다니는 거 같았다. 진통제밖에 약이 없었다. 거기에 기침도 더해졌다. 도통 감기가 낫지 않아 병원을 찾으니 진폐증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용접일을 놨다. 그래도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고 외곽 지원으로 노선을 바꿨다.
"우유배달 하는 모습 본 아버지 몸져 누워... 금강산 관광 못 시켜드린 게 한"10년 동안 "국가와 대의를 위해" 사느라 정작 집안 문제는 신경을 못 썼다. "이상한 짓 하고 돌아다닌다"는 아버지와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하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1989년 공장을 그만두고 노동단체 운동을 시작할 즈음, 생계를 위해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비가 오던 날 배달용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우유가 다 깨졌다. 한푼이 아쉬웠던 그는 이리 저리 뛰며 깨지지 않은 우유를 건지기 위해 분투했다. 그 종종 거리는 모습을, 아들을 만나러 온 아버지가 고스란히 보고 말았다. 말없이 돌아선 아버지는 몸 져 누으셨다고, 나중에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의절하라고 할 정도로 상처를 받으셨나 보더라고요. 우유배달이라니...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켜놨는데 많이 실망하셨겠죠. 아마 상당히 배신감을 느끼셨을 거예요."어렸던 그때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아버지를 향한 원망도 있었다. 지금은 후회만이 남았다.
"아버지가 이북 분이신데, 2002년에 돌아가셨거든요. 1998년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는데 얼마나 고향에 가보고 싶으셨겠어요. 모시고 갔다 올 기회는 분명히 있었는데 저는 시민운동하고 있고 정규직도 아니고 여력이 없었어요. 핑계죠. 운동에만 집중하다 불효를 저질렀어요. 그게 제 한이에요."기름밥 먹은 세월 10여 년. 이후 각종 시민단체, 노동단체를 만들고 단체가 없어지고 합쳐지면 또다시 단체를 만들고... 그렇게 또 1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사이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우유배달을 하며 생계비를 벌어야 했다.
"저라고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가슴에는 우주를 품고 살지만 돈도 없고 다들 무시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었죠. 제가 스무살이던 시절에만 해도 독재를 무너트릴 수 있을까, 회의적인 시각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래도 '결국은 이긴다'는 생각으로 버틴 거예요." 지금의 20대와 다르지 않게, 그에게도 20대는 '불안' 자체였다. 그럼에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용접 불꽃같이 살았어요. 본인이 크게 타오를 수 있는 그게 뭔지, 그 불꽃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우리 청년들이 자신의 불꽃을 키울 수 있게 돕는 역할을 정치가 해야죠. 취업 문제 등 청년의 아픈 곳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