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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토론에서 리더를 맡아 모임을 진행한 지 어느덧 다섯 달 째다. 일주일에 한 권, 문학과 비문학을 격주로 번갈아 진행하며 총 18권의 책을 다뤘다. 모임을 앞두고 아직도 떨림이 있고 진행 도중에도 약간의 긴장을 안고 있는데, 이처럼 여전히 새롭게 여겨지는 이 모임을 진행한 지가 벌써 다섯 달이 되어간다는 게 새삼 놀랍다.

책과 사람들, 수많은 만남들, 그리고 적지 않은 기간의 시간. 이를 통해 나는 어떤 걸 배웠고 어떻게 변했을까. 배움과 변화를 알아차리기에 나라는 사람은 나에게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는 있었을 터.

월 회원제로 모집을 하다보니 매달 새롭게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달 첫 주의 모임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어떤 사람이 모임에 찾아올지 알 수가 없고, 새로운 장소에 찾아온 사람들이 낯을 가리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내가 사람들이 느끼는 낯섦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해야 했다.

시덥잖은 농담을 하고 궁금하지도 않은 걸 자꾸 물어야 했다. 물론 모임 초창기에는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는 일 자체에 신이나 이것저것 묻고 떠들며 사소한 것에도 즐거워 했다. 지금은 시간의 축적으로 인한 지루와 권태가 그 흥이 있던 자리를 빼앗은 듯하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은 나에게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라 그저 일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인간은 비열한 존재라 무엇에든 습관이 들어버린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떠오른다. 습관에는 경험이 없다. 경험이란 건 그 본질상 낯선 충격을 주어야 하는 것이니까. 어쩌면 이것이 가장 가시적인 변화가 아닌가 싶다. 모임 진행이 어느 정도 편하고 익숙해진만큼 나는 이것에 습관이 들어버려 지루와 권태를 느끼게 된 것이다.

모임의 규모는 나를 포함하여 평균 15명이다. 토론을 하기에 지나치게 많은 인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첫 째주를 제외하면 많은 인원을 두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게을러지니까. 둘째주에 두세 명이 줄고 셋 째주에 다섯 명이 준다.

토론에 가장 적당한 규모의 인원이 형성된다. 아직 충분한 친밀함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만남을 갖다보면 관계 자체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른 회원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리더인 나에게는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다.

나는 얕은 정을 주는 법을 모른다. 사람 사귐에 있어 인위와 가식을 만들 줄 모른다. 친하면 확실히 친해야 하고 깊은 정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임은 나에게 인위와 가식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내 곁에 남을지 어떨지 확실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을 주고 모임에 나오지 않음에 아쉬워하고 나오기를 기대하고 하는 일은 내가 곧 상처를 받게 될 것을 분명히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앞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이 사람이 다음 달부터는 영영 볼 일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음을 미리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한편으론 관계에 성숙한 사람이, 한편으론 관계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모임은 나를 상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구태여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은 면이 있음을 느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던 내가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모임에서 친해진 한 동생이 내가 한때 말수도 적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니 믿지를 못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런 사람이다. 적극성과 사교성을 가장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어떤 연예인이 방송에서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관을 통해 비춰지는 자기의 모습은 진정한 자기 모습이 아니라고. 자기는 원래 매우 소심한 사람인데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었다고. 미지의 대상에 대하여 막연한 두려움을 품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거는 건 따라서 이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대담하기보단 소심한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이겨내고 미지의 문턱을 넘느냐 마느냐는 결국 정도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지마는 결국 경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턱을 자주 넘나든 사람은 그 일이 보다 쉽게 여겨질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문턱은 넘고 나면 이전에 느꼈던 두려움이나 경외감이 부질없어지기 마련이다. 문턱 너머에 있던 것이 결국 나랑 매우 비슷한 존재였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나는 모임을 진행하며 수많은 문턱을 넘나들어야 했고 이 문턱 저 문턱 번갈아가며 넘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충분한 경험을 통해 대담함을 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다루는 모임을 진행하며 책을 통해 느낀 것들과 책이 준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자 이 글을 썼는데 쓰고 나니 전부 관계와 성격,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읽기를 원래 좋아하여 책모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새로웠던 건 책이 아니라 사람이었나 보다.

지루와 권태, 환멸과 같은 것은 단어가 주는 느낌만으로는 부정적인 변화인 것 같은데 나는 이를 좋게 해석한다. 충분한 경험이 축적되어 지루와 권태를 느끼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많은 성격이라 인간 관계에 환멸도 느낄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성을 가장할 줄 아는 것도 나쁠 게 전혀 없다. 나를 상대하는 사람이 나로부터 좋은 걸 얻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가면을 쓴 난 가면을 쓰기 이전보다 사람 대하는 게 수월해졌다.

이 모임을 언제까지 맡아 진행할지, 나는 미리 알 수가 없다.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나 외에도 열여명의 리더가 있어 내게 개인적인 부담과 책임이 크게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땐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내게 적당한 긴장감을 주면서도 느긋하고 즐거운 일상이 되었기에, 아직 내가 이 일을 그만둘 이유가 전혀 없다.

좋은 책, 좋은 사람, 좋은 만남을 기대한다.


태그:#독서모임, #변화,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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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 해, 다른 이들의 치열함을 흘긋거리는 중입니다. 언젠가 나의 한 줄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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