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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캐나다 밴쿠버의 한 초등학교에 다닌 지 5개월 남짓 된 지난주. 드디어 반 모임(?)이 있었다. 학급 대표 학부모가 주로 학급과 학교의 소식을 이메일로 보내줄 뿐, 한국처럼 반 전체가 모여서 인사를 나누는 일이 지금까지 없었기에 난 이번에야 말로 '아이 친구 엄마'를 사귈 기회라 여기고 참석했다.

물론, 한국과 같은 친분을 도모하는 모임은 아니었고, 담임선생님이 병가를 내게 되어 돌아오실 때까지 학급 운영을 어떻게 할지 학급의 다른 선생님들 및 교장 선생님과 상의를 하기 위한 만남이었다.

밴쿠버시 교육청 소속 학교들에는 한 학급에 담임선생님, 보조선생님(resource teacher), 그리고 장애 학생을 위한 도우미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이 함께 한다. 때문에 담임선생님의 부재를 다른 선생님들이 어떤 방식으로 채우고, 학부모들은 어떻게 협조를 할지 상의하는 자리였다.

한국 엄마들은 이름이 없다

아이가 캐나다 밴쿠버의 한 초등학교에 다닌 지 5개월 남짓 된 지난주. 드디어 반 모임(?)이 있었다
 아이가 캐나다 밴쿠버의 한 초등학교에 다닌 지 5개월 남짓 된 지난주. 드디어 반 모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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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인 교실 앞에서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서 있자 엄마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리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I'm Francis'(아들의 영어이름) mom"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What's your name?" 하고 나의 이름을 물었다.

순간,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면서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울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말했다. 발음이 어려운 한국 이름이라 한 엄마는 되물었고, 나는 다시 천천히 내 이름을 말해줬다. "I'm Jooyeon, Song"이라고. 주변을 돌아보니, 모든 엄마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누구누구의 엄마예요"가 아닌, "난 누구예요" 라고 말이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나는 내 스마트 폰에 저장된 주소록 목록을 살펴봤다. '윤서맘' '현우맘' '지환맘' '성환, 지현맘'.... 온통 '맘'들 뿐이었다. 카톡을 봐도, '○○맘'으로 입력된 이름이 훨씬 많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내가 제일 자주 만나는 친구들은 바로 아이 친구 엄마, 그러니까 '○○맘' 들이었다. 우리는 친해지면 곧 나이에 따라 언니, 동생이 되기도 했고, 비상시에 서로 아이를 돌봐 주기도 하고, 함께 키즈 카페에도 가고, 음식도 나눠먹었다. 남편이나 시댁 때문에 속상할 때 수다로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도 아이로 인해 맺어진 친구 '○○맘' 들었다.

그런데 서로 정말 많은 것을 나누며 함께 해준 이 친구들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친구는 정말 몇 명 안 되었다. 우리는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가 아닐 때는 대부분 서로 '○○엄마'라고 불렀고, 그게 마치 우리의 이름인 양 반응했다. 이름을 알게 된 몇몇 친구들도 있는데, 은행 계좌로 송금을 해야 하거나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우연히 알게 된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한국에서 엄마들은 이름이 없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엄마가 된 다음부터는 자신을 '○○엄마' '○○맘' 이라고 소개한다. 왜 한국에선 엄마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까? '엄마'로서의 정체감이 너무 강해서일까?

그렇다면, 캐나다 엄마들은 엄마라는 정체감이 한국엄마들보다 약해서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캐나다 엄마들이라고 엄마로서 정체감이 약한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

분명한 건 우리가 무엇을 부르는 말에는 그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녹아있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이름보다는 역할이나 직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캐나다에선 대부분 직장에서도 이름이나 혹은 성을 부른다.

한국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이 곳 학교에선 학생들도 선생님을 'teacher'라 부르지 않고, 'Ms. Ito' 이런 식으로 부른다. 때문에 아이들은 선생님을 윗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보다 친근하게 여긴다.

오랫동안 굳어온 문화와 언어의 속성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 같은 차이는 서구의 개인주의와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면이 클 것 같다. 집단이 중요한 한국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때 함께 속해 있는 집단에서의 직함이나 역할이 그 사람의 정체감을 대표한다.

때문에 이름 대신 직함이나 호칭으로 부르는 일이 많다. 개인주의 문화인 이 곳 캐나다에서는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게 집단 안에서의 역할보다 더 중시된다. 때문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소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마도 엄마들끼리 서로 이름을 모른 채 친구가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문화적 요인 때문일 것이다. 엄마들의 모임은 처음엔 아이를 매개로 시작됐지만, 점점 사적인 관계가 된다. 아이의 학년이 바뀌고, 학교가 달라지면, 엄마들은 더 이상 한 집단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음 맞는 엄마들끼리 지극히 사적인 친구관계가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엄마'라고 부른다. 이는 어쩌면 우리 엄마들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엄마'에 한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은 생각을 규정짓는 효과가 있다. 때문에 이름을 대신한 '엄마'라는 호칭은 여성들 스스로가 '엄마'의 역할에 자신을 가두는, 온전한 나를 바라보기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데 일조할 가능성이 크다.

엄마들이 서로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 날 모임 이후로 인사를 주고받은 캐나다 엄마들은 학교 앞에서 나를 만날 때면 "Hi Jooyeon"이라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 날 모임 이후로 인사를 주고받은 캐나다 엄마들은 학교 앞에서 나를 만날 때면 "Hi Jooyeon"이라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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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도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직장에서 역할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딸이기도 한, 다양하고도 고유한 정체감을 갖는 존재다. 즉, '엄마'는 그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정체감 중 일부분일 뿐인 것이다.

진정한 친구라면, 당신의 친구를 '○○엄마'가 아닌 고유한 특성을 가진 한 사람, 즉 그 사람의 전체를 아우르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엄마'라는 역할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고, 성장할 수 있게 말이다.

그 날 모임 이후로 인사를 주고 받은 캐나다 엄마들은 학교 앞에서 나를 만날 때면 "Hi Jooyeon"이라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How are you?"라고 'Francis의 엄마'가 아닌,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고유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다짐해본다. 내 스마트 폰의 많은 '○○엄마'들을 이름으로 바꾸어 저장하기로 말이다. 일일이 이름을 묻는 게 좀 어색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젠 이름을 부르고 싶다. 우린 '○○엄마'이기도 하지만, 이름을 가진 온전한 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서로 이름을 불러 주다 보면, 사회에서도 결혼한 여성을 '엄마'의 틀에 가두지 않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존중해주는 날이 조금은 앞당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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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주간애미, #엄마, #페미니즘, #밴쿠버, #학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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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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