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2월 22일 창간한 <오마이뉴스>가 올해로 18주년을 맞았습니다. 2월 20일 기준 8만6738명이 시민기자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민기자로 살아보니' 어떤지 궁금했습니다. 최근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시민기자 4명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2018년 더 많은 시민기자를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자아는 우리가 느끼는 것을 경계로 형성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고통이다. 가령 어떤 말이 마음을 할퀼 때, 나는 나의 자아가 무엇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솔닛은 또한 개인이란 집과 같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집 자체가 아니며 그 안에서 돌아다니거나 혹은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외로움과 고독이 필연적으로 뒤따라 온다.
그래서 고립되지 않으려면, 홀로 무너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연대해야만 한다. 누군가의 고통에 감정 이입하고 지지를 보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집 밖을 나와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고 다른 이들과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렵다. 특히 사회적 소수자로 사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먼저 지나쳐야 할 자기 고통의 벽이 너무도 단단하다. 때로는 너무 끔찍해서 쳐다보기도 힘들다. 혹은 두려움에 그것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못한다. 아니면 같은 괴로움을 이야기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가령 몇몇 성소수자 연예인들이 TV에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절, 교실에는 그들을 향한 조롱과 혐오가 공기처럼 흘렀다. 마음이 아렸지만 어린 나는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차별이나 혐오와 같은 단어를 접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혹은 나도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인데, 나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식의 말을 하는 건 괴롭다는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뱉던 바늘 같은 말들이 나를 향해 쏟아질까 두려웠다.
여성단체 활동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이런 삶을 살다 보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는 커녕 눈길을 건네기도 힘들다. 당장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막막하다. 분노로 마음이 활활 타오르고 감정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길 반복한다.
하지만 출구는 없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뿐이다. 그래서 밖을 향해 손을 뻗기를 주저하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말해도 이해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접촉이 부재하면 타인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수 없다. 모든 게 불분명한 가운데 확실한 것은 나의 괴로움 뿐이다.
그래서 선택지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끝끝내 누구에게도 내밀한 마음의 문은 열지 않은 채, 적당히 사회 생활 요령을 터득해 '좋은 사람' 연기를 하는 것. 혹은 세상과 등지고 고립을 자처하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건 악순환인 것은 똑같다.
나는 오랜 시간 두 방식의 삶을 오갔다. 사람들을 마주할 때는 마음에도 없는 위선을 보였고 홀로 집에 남으면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들이 무의미한 듯 위악을 부렸다. 홀로 줄을 타는 것만 같은 생활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그런 시기는 생각만큼 오래가지 않았다. 20대 초반 가까운 선생님의 추천으로 나는 한국여성민우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람들과 함께 여성주의를 공부했고, 그 가치가 반영된 단체 문화 속에서 생활했다.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인식론이기에 우리는 각자의 사회적 위치와 그 속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경유해서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고 서로가 마주한 차별과 배제의 공통된 토대를 찾고자 노력했다.
'시민기자'가 된 이후 찾아온 변화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었다. 비슷한 원인에서 출발한 고통을 경유해 지지의 마음을 전하고 서로를 보듬으려는 시도. 이를 통해 세상에 나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음을 알게 되는 일. 그런 사람들과 신념과 이상을 공유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함께 하는 것.
이를 통해 나는 뒤늦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가족을 제외하곤 거의 처음으로 신뢰하는 사람과 공동체를 만났다. 외로움과 고립감은 단체를 향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햇볕에 눈이 녹듯 사라지곤 했다.
한편으로 부채감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나만 괜찮은 걸로 충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벽을 넘지 못한 이전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일상에서 스치거나 혹은 인터넷에서 토막으로 남겨진 글 속에서 얼굴을 비추는 이들.
또 다른 계기가 다가왔다. 졸업을 앞두던 시절, 나는 학교의 부당한 정책 때문에 터무니 없이 많은 등록금을 내게 되었다. 메일도 보내고, 전화를 해서 사정을 하고, 옴부즈 오피스에 글도 남겼지만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오래전 글을 기고해 보았던 <오마이뉴스>가 떠올랐다. 별다른 기대 없이 억울한 일 기록으로나 남기자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성과는 예상 밖이었다. 기사가 나간 이후 학교에서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부분적으로 환불해 주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관련 기사 :
0학점 듣는데, 55만 원 내라는 대학교]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기사 때문에?' 하고 웃었다. 하지만 편집기자들의 권유로 계속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최초로 받은 응답일지 모른다. 그리고 방식과 방향은 다르겠지만, 만약 내가 학교를 움직인 것이 맞다면 글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글 쓰는 성소수자'인 나의 역할
그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올란도 게이 클럽 총격 사건,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낸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소녀에게 왕자가 필요 없다'는 문구의 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한 성우가 억울하게 해고된 사건,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동성애 반대'를 이야기한 사건, A대위가 군형법 92조의6 때문에 억울하게 처벌 받은 사건, 한 언론사가 동성애자는 혼자 늙고 비참해질 것이란 헤드라인을 1면에 보낸 사건, 페미니스트 교사가 부당한 항의에 직면하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미디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워지던 일까지.
[관련 기사 :
대통령 앞에 펼친 무지개 깃발, 그래도 삶은 여전하다 게시판 도배에 문자 테러까지... EBS가 뭘 잘못했나]
누군가에게 스쳐 지나가는 뉴스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런 소식 앞에서 그야말로 삶이 흔들리고 존재가 무너지는 감정을 느낀다.
주변에서 성소수자인 그리고 여성인 동료들이 그런 괴로움을 보일 때, 아픈 마음 한켠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상처 받는 수십 명을 보지만 어쩌면 어딘가에 또 다른 수백 명, 수천 명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은 고통을 토로하고 나눌 공동체를 찾지 못한 채 홀로 아픔을 삭이고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을 향해 손을 뻗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로서 이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기력했던 과거와 달리 나에겐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글을 쓰고 싣고, 그래서 염려와 위로와 지지를 담은 말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하는 것 말이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마이뉴스>에서 시민기자로 활동한 이후 내가 겪은 가장 큰 변화였다.
사실 글 쓰는 일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니다. 한동안 열심히 했으니 오늘은 게으름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매번 생각한다. 텅빈 노트북 화면 앞에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막막하기만 하다. 그리고 항상 무섭다.
내가 심각한 상황을 다루는 와중에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할까, 그래서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게되는 건 아닐까 두렵다. 하지만 그 때마다 다시 원고 앞에 나를 붙든 것은 이미 마주했거나 혹은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생생하게 그려지는 얼굴들이었다.
소수자 혹은 약자라는 이유로 세상이 쌓아둔 배제와 혐오의 벽 앞에서 답답해 하는 이들의 얼굴들.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고독 속에서 오직 스스로의 손으로만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는 사람들의 얼굴들.
그 위태로운 표정들이 떠오를 때면 두려움이나 힘듦보다는 초조함이 앞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쓸 때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는 편은 아니다. 그저 필요한 말이니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한 명에게라도 내가 쓴 글이 전달되어 그 사람이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홀로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힘을 얻기를, 벽을 너머 집 밖에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언젠가는 연대가 주는 충만함에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그러니 부디 괜찮아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늘 노트 앞에 앉았다. 그것이 성소수자이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시민기자의 이름으로 <오마이뉴스>와 함께 그 길을 걸어왔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