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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찾아오는 초미세먼지. 이 정도면 '국가 재난'이다, '이민만이 답인가'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세먼지는 우리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국내외 시민기자들의 사는이야기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잠 깨면 눈 감고도 하루 일과를 세울 수 있었다. 볼 수 없어도 간단했다. 빗소리 들리면 꼼짝없이 집에서 바닥 긁는 날이었다. 세찬 비만 아니면 언제든 밖에서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놀잇감들은 온통 밖에 있었다. 흙, 돌, 나뭇가지, 들풀, 그리고 친구들! 장난감이 아무리 많아도 집에서만 놀면 금세 지겨웠다.

집보다 바깥 놀이를 좋아하는 놀이 본능은 대를 이어 내려왔다. 큰 딸은 짚고 서던 9개월 즈음부터, 현관에서 신발을 흔들었고, 말문이 트이고부터는 눈만 뜨면 외친다.

"나가자요~."

딸은 59㎡ 네모난 작은 집을 벗어나 현관 밖 공기만 마셔도 생기가 돌았다. 수십 개의 장난감을 갖춘 집보다 흙바닥에 나뭇가지만 있어도 즐거워했다.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마음껏 발 구르고 뛰는 모습도 참 예뻤다. 그러니 나도 기회만 되면 딸을 데리고 바깥 놀이를 가려했다. 하지만 모녀의 다정한 외출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래, 그래. 오늘 나가도 되는지 좀 보자."

서둘러 스마트폰 날씨 위젯을 확인한다. 바깥 소리에 귀 기울여 날씨를 가늠했던 소녀는, 20여년이 흘러 스마트폰을 켜야 한다. 인간의 눈과 귀로 측정할 수 없는 1급 발암물질 수치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55㎍/㎥, 보통'

미세먼지 보통, 놀이터 가도 되는 걸까

아이와 함께 바깥 외출을 위해, 미세먼지 수치 확인을 해야한다.
 아이와 함께 바깥 외출을 위해, 미세먼지 수치 확인을 해야한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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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민감군(영유아, 어린이, 임산부, 어르신, 호흡 및 심혈관질환자)들은 의사 상의 후 마스크 착용권고에 해당하는 수치다. '마스크 착용권고'가 신경 쓰이지만 6개월 둘째와 31개월 첫째를 데리고 놀이터로 향했다. 마스크도 씌우지 않았다. 과학은 마스크를 쓰라고 권했지만, 엄마는 아이들과 마스크 쓰고, 벗고를 반복하는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노는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태백산맥 너머 있는 강원도 동해시라 해도, 미세먼지 민감군이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미세먼지가 '30㎍/㎥' 이하, '좋음'인 날은 적다. 수도권에 비해 대기질 형편이 낫지만, 대한민국에 미세먼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곳은 없었다. 결국, '보통'인 날도 놀이터에 갈 수 없다면, 2만 년 전 초원을 누볐던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들은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건강'과 '놀이욕구 해소' 중 더 소중한 가치를 선택하라면, 쉽게 '건강'을 고를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늘 이론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만 밖에서 놀고 들어오면 괜찮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을 품고 현관을 나서야 했다. 태풍이 부는 것도, 폭설이 쏟아지는 것도 아닌데 억울함이 치민다.

아이들을 마스크 안 씌우고 '보통' 수치에서 데리고 나간 탓일까. 마스크를 안 씌웠던 탓일까. 결국 큰 딸, 작은 딸 모두 기침, 콧물약을 5일치 처방받아 왔다. 죄책감으로 가슴을 쳤다.

추워도 더워도 좋으니 공기만 맑다면

좁은 집보다 넓은 바깥을 찾는 아이들.
 좁은 집보다 넓은 바깥을 찾는 아이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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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황사가 불어온다는 예보를 들었다. 서둘러 대기 상황이 양호한 낮 동안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어마어마한 황사 예보는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창문을 열 수 없음. 블록 통만한 공기청정기에 의존할 것'의 불호령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한동안 공기청정기 없는 현관 밖에서는 숨 쉴 수 없을 것이다. 숨 쉬는 일이 공포다. 아이들의 바깥 놀이 가부(可不) 뿐만 아니라 청소기를 돌리는 시점까지, 미세먼지는 일상 곳곳에서 우리를 괴롭혔다.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그리고 미세먼지 심한 날. 날씨 예보가 한층 복잡해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잘 클 수 있을까. 오감으로 만물을 이해하고, 시냅스 연결망을 넓히고, 정교하게 가꾸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집에서 셀프 감금하며 유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가엽다.

최악의 공기질.
 최악의 공기질.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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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날씨는 없어요. 나쁜 옷이 있을 뿐이에요."
- <완벽하지 않아서 행복한 스웨덴 육아> 중. 홍민정 지음

이젠 춥고 습해서 지독하기로 유명한 북유럽 날씨마저 부러울 지경이다. 종일 해가 흐려 햇살 한 줌이 귀하고, 비가 자주 온다 해도 패션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숨만큼은 편하게 쉴 수 있지 않는가.

1급 발암물질은 패션으로 극복 할 수 없다. 마스크를 쓰고 놀 수도 없다. 마스크는 답답한데다가 임시방편일 뿐더러, 미세먼지는 눈 점막과 약한 피부까지 거침없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눈사람처럼 패딩을 겹겹이 입고도 놀 수 있고, 나시티에 반바지 달랑 걸쳐도 괜찮다. 추워도, 더워도 좋으니, 공기만 맑으면 좋겠다.

셀프 감금을 잠금 해제하고 콧노래 부르며 나갈 날을 기다려본다.



태그:#미세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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