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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 바닐라와 초코가 각각 이성애와 동성애라면, 양성애는 무슨 맛일까?
세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 바닐라와 초코가 각각 이성애와 동성애라면, 양성애는 무슨 맛일까? ⓒ pixabay

성소수자에 대한 오해와 진실 ③ '양성에' 편 (상)에서는 '-필리아'와 '-섹슈얼리티'의 차이를 밝혔고, 바이엄브렐라 아래에 속하는 양성애, 다성애, 범성애 등과 같은 개념들과 그 정의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에 이어서, 이번 (하)편에서는 이들이 외부인, 그리고 때로는 같은 성소수자 당사자에게서도 당하는 오해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지난 글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양성애(바이섹슈얼)와 다성애(폴리섹슈얼), 그리고 범성애(팬섹슈얼)은 모두 '바이엄브렐라'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논-모노로맨틱 / 논-모노섹슈얼 정체성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정체성들은 모노로맨틱/섹슈얼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그 존재를 무시당하고, 다양한 편견들에 시달린다. 이는 때로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폭력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러한 오해들 중 오늘 다룰 오해는 "양성애는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중간지점이다?", "양성애자는 '박쥐'다?", 그리고 "양성애자는 두 명 이상의 연인(또는 배우자)를 원한다?" 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양성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성애와 범성애 등으로 확장이 가능하기도 하다.

1. 양성애는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중간지점이다?

사람들은 동성애와 이성애, 양성애를 생각할 때 이 셋을 하나의 스펙트럼에 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왼쪽 끝이 동성애라면 오른쪽 끝이 이성애, 양성애는 그 둘 사이에 있는 구간인 식이다. 흔히 하는 비유로, 이성애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고 동성애가 초코 아이스크림이면 양성애는 혼합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양성애를 혼합 아이스크림이 아닌 딸기맛으로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스펙트럼의 일부가 아닌 아예 별개의 정체성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양성애를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중간지점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일까? 이는 바로 그러한 시선이 양성애에 대한 많은 오해들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양성애를 스펙트럼으로 본다면 '양성애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몇 대 몇으로 혼합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생기게 된다. 실제로 이 방식의 설명을 받아들인 양성애자들 가운데에서는 자신이 몇 대 몇 정도로 이성애(또는 동성애)에 가까운지를 설명하려 드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양성애자가 이성(또는 동성)에게 치우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양성애자'가 아니라는 시선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성애자가 5:5로 각각 이성과 동성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양성애자가 아닌, 잠깐의 변덕으로 다른 성별을 조금 만나보는 이성애자(또는 동성애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또는 그 사람이 현재 사귀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 그 사람이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를 오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두 번째 오해로 이어진다.

2. 양성애자는 '박쥐'다?

성소수자들 사이에서도 흔히 퍼진 오해인데, 양성애자들은 '박쥐'라는 말이 있다. 이 비유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거나, '배신자'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 오해는 위에서 이야기했듯 양성애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체성이 아닌,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 존재하거나 그 사이를 오간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둘 사이에 존재하니 언제든 한 쪽으로 붙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양성애라는 정체성 자체를 불안정하게 보이게 하고, 양성애자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언제든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는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양성애자들이 배제되는 원인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양성애자들은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 의하여 압력을 받게 된다. 차라리 '완전히 동성애자'라면 가능성도 없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그러한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 더 많은 압력을 주는 것이다. 아니면 때로는 반대로,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기고 그들의 커밍아웃(자신이 성소수자임을 타인에게 밝히는 행위) 자체를 무시하기도 한다.

양성애자들에 대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의 배제와 이성애 위주 사회의 압력은 상상 이상의 결과로 나타난다. 우선 양성애자 여성에 관한 연구를 보자면, 이들 중 절반은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거나 시도한 적 있으며,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기분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두 명 중 한 명은 가까운 파트너에 의해 심하게 폭력을 당한 적 있으며(동성애자 여성의 경우에는 세 명 중 한 명, 이성애자 여성의 경우에는 네 명 중 한 명), 동성애자 여성에 비해 가난하게 살 가능성이 두 배이다.

양성애자 남성의 경우에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세 명 중 한 명은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거나 시도한 적 있으며, 동성애자 남성에 비해 가난하게 살 확률이 50% 높다. 거의 절반은 기분장애에 시달리며 셋 중 하나는 가까운 파트너에 의해 강간, 폭행, 또는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다(동성애자 남성의 경우에는 넷 중 하나이다).

3. 양성애자는 두 명 이상의 연인(또는 배우자)를 원한다?

모 변호사는 양성애를 인정하면 배우자 두 명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양성애자는 기본적으로 배우자가 두 명 있어야 한다. … 배우자 한 명을 전제하는 우리 헌법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양성애자에게는 두 명 이상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사회에 만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정체성과의 혼동이다. 실제로 폴리아모리/폴리가미라 하여 다자연애나 결혼을 지향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양성애와는 전혀 별개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혼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역시 양성애자를 동성애와 이성애를 동시에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동시에 실천해야 '진정한 양성애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은 다시 한번 양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는 데에 일조하며 양성애에 반대하는 이유가 된다. 모 변호사가 한 이야기처럼 '다자연애/결혼은 우리 에 맞지 않는다'라고 한다거나, 그 이유로 양성애자를 문란하다고 여기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성애자/동성애자에 비해 더욱 문란하다는 편견은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란'하면 성적인 행위를 동의 없이 행하거나 가볍게 생각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과 합쳐져, 양성애자들은 성희롱이나 성폭행 등에 더 쉽게 노출된다. 실제로 많은 여성 양성애자들이 남성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나를 포함해서 셋이서 성행위를 해 보는 것이 어떠냐'라는 제안을 받는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다. 동성애자라면 하지 않을 말을, 양성애자이기 때문에 본인도 참여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뱉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들의 뿌리는 모두 양성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러나 양성애를 불안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동성애를 불안정한 것이자 하나의 과도기로 여기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왜 동성애에 대해서는 한때의 변덕이라고 말하면 분노하면서 양성애에 대해서는 똑같이 말하는 것일까? 사람이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단지 '평균적인 사랑'의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불완전하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양성애를 비롯한 바이엄브렐라 아래의 정체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편인 <성소수자에 대한 오해와 진실 ⑤ 무성애 편>는 8월 5일 업로드 예정입니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더 조사 중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성소수자_오해와_진실#성소수자#퀴어#양성애#바이엄브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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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길냥이 집사이자 사회적 소수자. 제 시점의, 제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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