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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속된 말로 내 가방모찌였다. 학창 시절, 내가 수업을 마치고 전화하면 엄마는 시간 맞춰서 집 앞 정류장으로 늘 마중을 나오셨다. 날 만나자마자 무거운 내 가방을 얼른 받아드셨고, 집으로 오는 15분 동안 나는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떠들었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늦게까지 야근을 한 날이면 엄마는 전철역까지 나오셨고, 늘 책이 많아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셨다. 그리고 난 집으로 가는 동안 수다 한 보따리를 풀어 놓곤 했다.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 이야기를, 엄마는 아빠 흉을 보기도 했고 외할머니 걱정을 털어놓았던 것 같다. 그때만큼은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한 '내 편'이었다. 하굣길에서 퇴근길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엄마에게 내 가방을 맡기고 집으로 가는 그 시간은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즐겁고 비밀한 기쁨이 가득했다.

그런 당연한 일상이 깨진 게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운전을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전화를 안 하고 그냥 들어오는 게 당연해졌는데, 문득 그 변화를 감지한 날이 있었다.

퇴근길에 비가 내려서 엄마한테 우산을 갖고 나와 달라고 전화를 했다. 역사 안에서 만난 엄마는 내게 우산을 건네면서 무의식적으로 내 가방을 가져가려고 손을 뻗쳤다. 사실 그날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어깨에 담이 올 지경이었는데, 그 순간, 본능적으로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

"안 무거워. 괜찮아. 내가 들게."

집까지 오는 동안, 난 깨달았다. 결코 인식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보게 됐다는 걸.

너무나 작아져 버린 엄마

 내가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엄마는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던 것이다(사진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내가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엄마는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던 것이다(사진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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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방을 들기엔 이제 엄마는 너무나 작아져 버렸고,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약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난 엄마가 내 가방을 들어주기 위해 전철로 나온 것도 꽤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엄마는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난 의식적으로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제 나는 엄마가 넘어질까봐 걱정하고, 병원에 보호자로 같이 가고, 시장이나 여행을 갈 때 모든 짐을 내가 든다. 엄마와 나의 자리가 바뀌어서 내가 엄마의 가방 모찌가 된 것이다.

엄마와 내 자리가 점점 바뀌어 가는 만큼, 나도 늙고 있었다. 회사에서 잘릴 때, 잘리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마흔다섯이라는 '나이'였고, 다시 일을 찾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도 '나이'였다.

어느덧 나이는 내게 서러운 무언가가 되었다. 게다가 나이든 싱글인 탓에 어디를 가든 "어머님""사모님"이라는 호칭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 어떤 호칭에도 편안하지가 않은데, 다들 눈에 보이는 대로 사회의 시각으로 나를 규정하고 그렇게 부른다.

몸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삐그덕 거리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만, 작년에 갱년기를 겪으면서는 지옥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해야만 했다. 사회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이 듦'은 나를 자꾸 궁지로 몰고 간다.

늙어서 점점 작아지고 점점 사라지고 있는 엄마를 보는 건 고통스럽고 슬프다. 그리고 나의 늙어감을 체감하는 것도 못지않게 힘들다.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당신은 이제 유통기한이 다가오고 있어요'라고 끊임없이 말하지만, 난 아직 적응이 잘 되진 않는다.

사회에서 보는 내 나이와 내가 나를 인식하는 나이의 불일치. 거기서 계속적으로 불화가 생긴다. 게다가 싱글로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 불화를 자초한다. 나에겐 가방모찌를 해 줄 딸이 없으므로 내 인생을 오랫동안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이런 부담감은 싱글이든 자녀가 있든 비슷하겠지만)

'나이', '늙어감'과 사이 좋게 지내는 법

 싱글이든 아니든 나이 들수록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뭐든지 잘할 수 있는 사람보다 함께할 수 있는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이 진짜 성숙한 사람 아닐까
 싱글이든 아니든 나이 들수록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뭐든지 잘할 수 있는 사람보다 함께할 수 있는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이 진짜 성숙한 사람 아닐까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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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까지는 사회가 규정한 이미지를 통해 내가 나를 이해하고 그런 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30대에는 어떤 직급에 어떤 규모로 살아야 하고, 40대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정상이다, 적어도 40대 싱글이라면 이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는 표준 규격(?)과 만들어낸 이미지에 자꾸 나를 구겨 넣으려 했다.

표준규격에 끌려다니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 단순히 다짐이나 결심을 넘어서 내 기존의 생각이나 삶과 이혼하겠다는 각오로 작은 것부터 실천하려 한다. 우선은 한창 열심히 일할 때와 그때 번 수입들을 떠나보내기. 더 이상 젊지 않아서 예전처럼 일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내 마음은 여전히 '청춘'일 때가 많다. 그래서 무리하게 되고, 안 되는 걸 '열심히' '노오력'해서 어떻게든 해내려 용을 쓰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게 결과물도 만족스럽지 않은 데다가 몸도 너무 힘들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아직은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노후를 대비해 그만큼 벌어야 한다는 불안 때문이다.(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생각도 등을 떠밀고)

그런데 내가 대비하고 싶은 노후의 모습이란 것도, 사회가 만들어내고 내 자신이 만들어낸 모습인 거다. 그럴싸해 보이고 꿇리지 않는. 결코 만족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지금보다 조금 더' 축적하고 싶은 욕망만 아니면 무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조금 더' 벌고 싶은 마음을 놓는 훈련을 하고 있다.

나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찾았다면, 또 다른 하나는 역시 친구다. 작년에 17년 정도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연락이 돼서 만난 친구가 있다. 20대 때 단짝처럼 지냈는데, 그 친구가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으면서 언제부터인가 멀어졌고 그 뒤로 소식이 끊겨버렸다. 페북을 하다가 우연히 다시 연결이 된 게 지난해였다.

친구가 먼저 만나자고 해서 약속은 정했지만 사실 좀 회의적이었다. 그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서로 관심사가 많이 달라졌는데 대화가 안 되면 어떡하지? 공연히 만나서 실망만 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걱정을 한 사발 먹고 만났는데 세상 쓸데없는 기우였다. 그녀는 지난 15년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똑같았고, 우리는 그때처럼 잘 통했다.

지금은 그녀가 나의 의논상대가 되어 주고, 나 역시 그녀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애환을 들어준다. 우리의 모습이나 관심사는 분명 20대 때와는 달라졌지만, 어쩐지 더 깊어진 느낌이다. 이제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고, 둘째가 중3이긴 하지만, 훨씬 여유가 많아진 친구와 새롭게 만들어갈 시간들이 기대된다.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멀어지는 친구들을 보면서 서운해 했지만, 어쩌면 내 쪽에서도 밀어버린 적도 많았다. 그래서 놓쳐버린 좋은 관계가 얼마나 많을까.

싱글이든 아니든 나이 들수록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뭐든지 잘할 수 있는 사람보다 함께할 수 있는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이 진짜 성숙한 사람 아닐까. 서로의 짐을 들어주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나이들 수 있고, 늙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능력이 많아서 독야청청이 가능한 사람은 예외다. 그러나 그런 주제가 못 되는 나는 가방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꺼이 다른 사람의 가방도 들어줄 것이다.


태그:#비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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