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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에 이어, 이번에는 '신대방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원풍모방 노조 터 - ②세왕전기 터 - ③한영섬유 노조 터 - ④보라매공원 - ⑤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 ⑥김마리아 동상 - ⑦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
  
영화 <1987> 영화 <1987>에서 박종철이 고문당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의 모습. 이미 사망한 박종철이 중앙대용산병원으로 옮겨진 직후의 모습이다.
▲ 영화 <1987> 영화 <1987>에서 박종철이 고문당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의 모습. 이미 사망한 박종철이 중앙대용산병원으로 옮겨진 직후의 모습이다.
ⓒ 우정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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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왕전기는 1985년 대학생 박종철(1965~1987)이 공활(공장 활동)을 한 곳이다. 박종철이 남긴 '작업장 보고서'에 따르면 세왕전기 터는 원풍모방 앞 시흥대로의 대방역 방면에서 길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경찰에 불법 연행돼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다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수배 중인 한 선배의 거처 파악을 위해 자행한 경찰의 물고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버티다 사망에 이르게 됐지만,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됐던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박종철은 영화 < 1987 >이 흥행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고,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촛불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젊은 세대들에게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캠페인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결국 2005년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하고 있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2019년부터는 시민사회가 운영하는 '민주인권기념관'(가칭)으로 거듭나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공간으로 자리 잡을 예정이다.

대학생 박종철, 노동자의 삶 배우기 위해 공장활동에 나서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은 매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학과별 또는 동아리별로 농촌 활동을 했으며, 대개 2학년 여름방학 때는 공장 활동을 했다. 책으로만이 아니라 직접 체험을 통해 민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오기 1년 6개월 전인 1985년 여름방학에 안양에서 자취를 하면서 대학문화연구회(박종철이 활동한 동아리) 동기들과 함께 노동자의 삶과 노동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공활을 했다. 이때 박종철이 찾은 곳이 바로 신대방동에 있던 세왕전기였다.

대학생인 박종철은 자신의 신분으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노도와 같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들과 손잡고 노동운동을 벌였고,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를 막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 터져나온 '789노동자대투쟁'의 배경에도 바로 1980년대 내내 진행된 대학생들의 노동현장 투신이 있었다. 박종철은 할 수 없이 같은 과 친구의 도움으로 그 친구 동생의 이름으로 세왕전기에 취업한다.

박종철은 부지런하고 깔끔한 친구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함께 하숙했던 친구 최인호는 "하숙방을 육국사관학교 생도의 방같이 깔끔하게 관리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박종철은 공활 내용을 담은 일기와 '작업장 보고서'를 남긴다.

박종철이 공장 활동을 한 세왕전기는 공장 크기가 25평 정도에 사장과 공장장, 그리고 박종철을 포함해 노동자 4명이 근무하는 작은 규모의 회사였다. 나사못과 프레스 제품 등을 생산했다. 박종철은 좀 더 큰 규모의 공장에 취업하길 희망했지만,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철의 기록
 
박종철이 공장 활동을 하면서 작성한 '작업장 보고서' 박종철은 신대방동 세왕전기에서 공활을 하면서 일기와 '작업장 보고서'를 남겼다. 구체적인 내용은 '박종철 평전'(박종철출판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박종철이 공장 활동을 하면서 작성한 "작업장 보고서" 박종철은 신대방동 세왕전기에서 공활을 하면서 일기와 "작업장 보고서"를 남겼다. 구체적인 내용은 "박종철 평전"(박종철출판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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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종철이 남긴 일기를 통해 그의 공활 과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취직을 위해) 돌아다니다 (본) 한 공장 담벼락에서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 혼자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18~19세 정도의 한 노동자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 앞을 지나가는 내 모습을 의혹의 눈초리로 보면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 모습은 확실히 한국 내의 모순 구조를 가장 첨예하게 한 몸에 지닌 채 모든 세상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면서 불만을 간직한 한국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 같다.

그렇다! 이제껏 활자로서 내 머리 속에 고정되어 왔던 관념들을 과감히 깨뜨리자."(1985. 8. 1.)

본격적인 출근을 하기 하루 전 모습이다. 그동안 책으로만 접했던 노동자를 현장에서 직접 만나기 위한 공장활동에 임하는 박종철의 각오가 그대로 읽힌다.
 
"작업장 내의 조명, 환기, 위생 시설은 거의 0점에 가까울 정도다. 작업 시간은 오전 8시 30분에서 오후 6시 30분까지 10시간. 중간에 12시 30분부터 1시까지 30분 동안 점심시간. 점심시간 30분 외에 휴식 시간은 없었다. (중략)

하루종일 앉아서만 하는 일들이라 허리와 어깨가 몹시 아팠다. 이 일을 하다가 5시가 조금 지나서부터 서서히 피곤이 몰려오면서 노동자들이 왜 그렇게 철저하게 싸우는가 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사장 밑에 직원이 5명밖에 되지 않아서 공장 내에서는 사용주와 근로자 사이의 인격적 예속 관계가 뚜렷이 나타났다. 정말 가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축처럼 일을 시켰다."(1985. 8. 2.)

박종철이 공장에 취업해 일을 시작한 첫날 쓴 일기다. 박종철이 취업한 곳은 큰 공장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건도 더 열악했고, 근로기준법도 더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도 전근대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인격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독산동에 있는 한 프레스 공장에서 공활을 했던 내 경험과 비교해 봐도 세왕전기의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일당이 3500원으로 같았지만, 박종철의 세왕전기는 기본 노동시간이 9시간 30분이었다(박종철은 작업장 보고서에서 작업시간을 10시간이라고 했지만, 점심시간 30분을 빼면 9시간 30분이 기본 노동시간이다).

점심식사도 내가 다닌 프레스공장은 회사 식당에서 500원에 제공했는데, 힘든 일이어서 그랬는지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내가 다닌 프레스공장은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사장이 개신교도였는데, 매주 토요일 일이 끝나면 항상 예배를 드린 후 퇴근해야 했다. 강제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강제였다.
 
"사장이 출근하기 전에 고××와 일을 하면서 신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다. 굉장히 보수적이면서 자기 생활에 별다르게 큰 불만은 없이 대충 살아가려는 것 같았다. (중략) 점심은 고××가 먹는 공장 바로 앞 식당에서 같이 먹기로 했다. 한 끼에 550원 꼴인 식사가 너무 형편없었다.

아직까지는 일이 몸에 배이지가 않아서 굉장히 피곤하다. 오전에 일할 때는 졸기까지 했으니.

농활의 의미와는 다르게 철저하게 개인 신분을 감추고 노동자와 동등한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개별 단위 사업장에서 각각 의미를 정리하고 보다 깊숙이 현장 체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체험만으로 끝나서도 안 되고 반드시 그 경험들을 같이 공유할 수 있어야겠고, 또 이러한 현장 체험들이 학생운동 내부의 질적 발전과 전체 방향성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 경험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고민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1985. 8. 3.)

친화력이 남달랐던 박종철은 공장활동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과 친해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친해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실감했을 것이다.

아울러 박종철이 공활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날의 일기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박종철은 그동안 글로만 접했던 노동현장에 대한 직접 체험을 통해 그 의미를 정리하고, 학생운동 동지들과 그 경험을 공유해 학생운동의 질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기여함은 물론, 박종철 자신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에 그 깊이를 더하고 싶어했다.
 
"점심시간에 딴 공장 사람 두 명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고××가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결코 자기 생활에 불만이 없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사장이나 공장장과 굉장히 많은 마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속으로는 불만이 있으면서도 막상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보이지 않는 예속 관계 때문에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죽어서 지낸다.

이 기간이 조금만 더 길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으로 떠들던 노동운동론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동운동의 원동력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련만..."(1985. 8. 6)

박종철이 공장 활동을 한 기간은 열흘 남짓이었다. 이 과정에서 박종철은 노동자들이 겉으로는 별 불만 없이 일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불만이 대단하다는 것도 그들의 대화 내용을 통해 알게 된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실천적 원동력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해보고자 했던 박종철에게는 짧은 공활 기간에 대한 아쉬움 역시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막상 1주일이 지나고 보니 별로 정리된 부분도 없는 것 같다. 이건 사전 준비 부족인 것도 있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힘들고 피곤하니까 개인 학습을 게을리 한 탓도 있는 것 같다."(1985. 8. 8.)

더군다나 박종철은 예정된 공활 기간이 다 끝나감에 따라 초조감도 느끼게 된 것 같다. 노동자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 의미를 정리해보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성실했던 박종철은 이를 사전 준비부족과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며 반성하고 있다.
 
1호선 남영역에서 바라본 남영동 대공분실 박종철이 고문당하다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은 1호선 남영역 플랫폼 바로 옆에 있다. 창문구조가 좁은 5층이 바로 고문실로 사용된 곳이다.
▲ 1호선 남영역에서 바라본 남영동 대공분실 박종철이 고문당하다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은 1호선 남영역 플랫폼 바로 옆에 있다. 창문구조가 좁은 5층이 바로 고문실로 사용된 곳이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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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왕전기 터에서 친구 박종철을 기억하다

박종철은 이곳 세왕전기에서 공활을 하기 직전인 6월 초에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노학연대 투쟁에 참가했다가 3일간의 구류를 살기도 했고, 방학 직후인 6월 말에는 농촌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만큼 박종철은 민중지향성이 강한 학생운동가였다.

그래서 박종철은 그 짧은 공활 기간마저 역사와 사회의 주인인 기층 민중의 삶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계기로 삼는 동시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심화시키는 과정으로 삼을 수 있었다.

박종철이 공활을 했던 세왕전기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박종철이 공활을 하던 1985년 여름 그 세왕전기가 있던 자리 역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세왕전기 터에서 박종철의 흔적을 찾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대단히 아쉽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파쇼 경찰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가기 70여 일 전인 10월 말, 그때 마지막으로 봤던 친구 박종철의 모습이 떠오른다. 문득 하늘을 보니 그 큰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맑은 눈을 가진 친구 박종철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으며, 박종철 열사와는 학생운동을 함께 한 친구이자 동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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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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