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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다는 생각. 바쁜 일상을 사는 비장애인들은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막연한 마음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한 순간의 실수로 신체기능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척수 장애인들이 세상엔 많이 존재한다.

내가 작업치료사로 일하며 만난 척수장애인만 해도 수 백 명에 이른다. 지금은 퇴원해서 세상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잘 모른다. 연락이 닿는 몇몇 분들이 고작이다. 특히 마비 정도가 심할수록 소식 접하기가 어렵다. 나와 함께 했던 척수장애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휠체어 탄 장애인들을 길에서 마주하기 어렵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들의 장애인식 부족에서 비롯한 그릇된 시선이나 인프라 부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외 활동보조제도의 미흡함도 들 수 있겠다. 의료기관 문턱은 또 얼마나 높은지, 굳어져 가는 몸 때문에 재활을 받고 싶어도 발병일이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다. 직장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종합해보면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마땅히 설 곳이 없다. 
 
세바시에 출연하여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세바시에 출연한 이원준씨 세바시에 출연하여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세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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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척수장애인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그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입에 스틱을 문 채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어갔다. 어깨 밑으론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경수 손상 척수장애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표정에서 척수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말하고픈 절박함이 묻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어느 CF 광고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인공지능 기기 사용으로 타인의 도움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이었다. 척수장애인의 삶을 알리고자 노력하는 그를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척수장애인 이원준씨를 만났다. '장애공감연구회 함께 라온'과 '한림대학교 사회의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세미나에 강사로 그가 초대되었다. 그는 장애인식개선 교육 비수기에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곤 방송에서 본 모습 그대로 스틱을 입에 물었다.  세미나 시작 전 살갑게 나눴던 이미지와 다르게 다시 비장함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때론 슬프게, 때론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감동의 물결을 전했다. 

어린 시절, 그리고 장애인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신문배달부터 시작해서 LPG 충전소 일 까지. 이런저런 돈 되는 일 닥치는 대로 했다. 한 번은 호객행위를 하다가 붙잡혀 구치소에서 사흘을 지낸 적도 있다.

그러다 25살의 나이에 부사관으로 군대를 갔고, 그즈음 결혼하여 3남매를 두게 되었다. 군대에는 다자녀 가구에 주는 혜택이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근무할 수 있는 특혜를 준 것. 이원준씨는 자신의 고향 전라남도 장성으로 내려가 근무하게 되었다. 
 
수다회에 초대되어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이원준씨 강의 중 수다회에 초대되어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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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준씨의 취미는 자전거타기이다. 평지뿐만 아니라 산악지대에서도 곧잘 타던 그는 동호회에서도 손꼽히는 에이스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회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내리막길에서 넘어져 목뼈가 골절됐고, 척수신경까지 다쳐 사지마비 장애인이 된 것이다. 그것도 어깨 위 얼굴만 움직일 수 있는 중증 장애인. 결국 그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중증 장애인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는 병원 생활. 피부에 감각이 없다보니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고, 소변을 볼 수 없어 방광을 뚫어 카테터로 소변을 빼냈다. 한 가닥 희망이라는 줄기세포 임상시험도 해봤지만 어디까지나 '임상시험'이기에 결국 다시 제자리. 

마음이 힘든, 자존감의 문제

그는 가정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때를 가장 견딜 수 없는 순간으로 꼽는다. 화목한 가정을 이뤄 훗날 노부부가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꿈꿨지만, 한 순간의 사고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척수장애인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이원준씨. 척수장애인들이 사고 후 가족들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에서도 힘써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초기 재활 과정에서 가족 회복 프로그램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가족 중 한 명이 장애인이 되면 다른 구성원들의 충격도 크기 때문에 가족상담이 필요하다는 것. 젊은 부부의 경우 '성 재활'이 매우 중요한데, 이는 성 재활이 자존감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 재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병원이 거의 없어, 앞으로 보편적인 재활의 영역에 들어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우리 가족도 먹고 살아야지

이원준씨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중도장애인이 되면 몸의 불편함 때문에 기존에 해왔던 경제활동이 단절될 수밖에 없다. 특히 그는 군인이었기에 전역 이후가 더 걱정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세 아이의 아빠, 그런데다 휴일에 취미로 탄 자전거라서 공상이나 산재에 해당되지 않아 매우 막막했다. 

병원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다양한 환자들을 마주한다. 개개인마다 경제 사정이 다르다. 어떤 환자는 그나마 '산재' 라서, 또 어떤 환자는 '자동차보험' 이라서 비빌 곳이 있는데, 아무 것도 없이 자비로 모든 걸 해결하려니 정신적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일컬어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 이라고 부른다.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일수록 돈 때문에 부부싸움도 더 자주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에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 그는 웃으며 병원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래도 저 부부는 이런 상황에서도 웃으며 사는구나"라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태양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다는 말이 있듯이, 열악한 상황들은 그를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아내가 대로변 사거리에서 길로 뛰어나가려는 걸 목격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막막함. 뛰어나가는 아내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던 당시를 떠올리며, 다행히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멈추긴 했지만 무너지는 심정이었다고 얘기한다. 자살카페를 찾아 가입까지 했다는 그의 말에 강의를 듣던 몇몇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전하는 인생이야기

어떻게든 살아야했기에 퇴원 후 생계를 이어갈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장애인식개선 강사 업무를 알게 되어 양성과정을 모두 마쳤다. 또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인턴제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하지만 뭐든 순탄하진 않았다. 특히 부천 집에서 강남에 위치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출퇴근 하는 일은 사지마비 척수 장애인 입장에서 매우 버거웠다.

출퇴근 시간에 거대한 전동휠체어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었고, 그나마 장애인 콜택시가 있는데, 그 마저도 이용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장애인 콜택시는 지자체별로 운영하고 있어, 부천에서 강남으로 이동하려면 중간 지점에서 장애인 콜택시를 갈아타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이용자들이 몰릴 땐 최대 6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는 요즘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투쟁을 하는 방법도 생각했는데 실제 해보니 자신에겐 너무 어려워서 초상권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영상에 담겠다고 하면 무조건 OK했다. 집에 있으면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에 365일 중에 360일은 꼭 밖으로 나간다.

그러던 중, 작년 8월에 잘 타던 휠체어가 망가졌다. 휠체어 값은 어마어마하다. 어떻게 하나 막막하던 와중에 한 줄기 빛처럼 <세바시>에 출연하게 되었고, 연이어 '유플러스' 광고도 찍게 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어 지금까지 어리둥절한 상태라고 한다. 길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은 물론, 유투브 채널(버럭중사 이원준)에 응원 댓글을 달아주는 분들에게도 모두 감사한 마음. 

무엇보다 아빠의 방송 출연 덕분에 세 아이가 학교에서 더 당당해진 것 같아 뿌듯하다는 그의 말에 강의를 듣던 사람 모두 큰 감동을 받았다.   

살아갈 수 있게

그는 척수장애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들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으로 가는 과정이 어렵지 않게 바뀌어야하고, 퇴원 후 병원을 오갈 수 없다면 집에서 재활을 받을 수 있도록 방문재활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또한 생활보호대상자가 되기 위해 가족들이 찢어져야하는 안타까움도 빼놓지 않았다. 가족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할 땐 운동기능과 감각기능이 없는 그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토록 절박하다는 뜻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 뿔뿔이 집으로 향하는 데 그는 하염없이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린다. 원준씨도 마음만은 운전으로 혹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싶을 것이다. 그들이 사회에서 마음껏 이동하고 활동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며. 
 
'장애공감연구회 함께라온'과 '한림대 사회의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한 수다회를 마치고 참석자 모두 단체사진을 찍었다.
 "장애공감연구회 함께라온"과 "한림대 사회의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한 수다회를 마치고 참석자 모두 단체사진을 찍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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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장애공감 함께 라온'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장애공감연구회함께라온, #한림대사회의학연구소, #척수장애인, #이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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