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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 터에 세운 전봉준 동상과 동상의 비문을 쓴 여태명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다(관련 기사 : 촛불광장에서 전봉준 비문까지 함께한 여태명 교수). 거기에 전봉준에 대한 자료는 별도로 한 번 정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여태명 교수를 비롯해 '광화문 미술행동'을 책임지고 이끌었던 김준권 화백과 부대표로 활동한 류연복 화백을 필두로, 신학철, 박불똥, 홍성담 등 많은 미술계 중견 작가들이 광화문광장에서 활동했다. 민예총으로 확장된 1980년대의 민중미술협의회를 태동시킨 이들이다.

서예를 하는 이들로는 여태명 교수 외에도 정고암, 김성장 외에도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인사동에서 '나무화랑'이란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진하 관장은 기획 등의 다양한 작업을 했다. 
광화문 미술행동 서울문화투데이에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정영신 작가가 보도한 기사. 광화문 미술행동의 활동과 촛불문화제 현장은 정영신 작가와 조문호 작가가 촬영을 전담했다.
▲ 광화문 미술행동 서울문화투데이에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정영신 작가가 보도한 기사. 광화문 미술행동의 활동과 촛불문화제 현장은 정영신 작가와 조문호 작가가 촬영을 전담했다.
ⓒ 정영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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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다양한 이들이 광화문광장에서 활동하며 촛불문화제의 문화적 내용을 채웠다. 촛불문화제 자체는 여러 개별 시민단체들의 집합체인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이끌었다. 그리고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에 대한 항거로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박근혜 정권은 유권자들이 최소한의 역사에 대한 인식만 갖췄어도 애초 태어나지 못했다. "누가 되더라도 다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을 버리고 신중하게 스스로의 주권을 행사했다면 박근혜는 권력에 욕심을 내지도 못했다. 절대 지지층과, 박정희에 대한 그릇된 정보 탓에 눈먼 표가 욕망을 키웠다. 거기에 더해 우유부단함으로 기왕이면 이번엔 권력을 누려봤던 박근혜가 더 잘할 거란 착각이 역사를 후퇴하게 만들었다.

결국 바탕 자체가 혼탁한 박근혜와 무리들은 국민과 국가를 자신들의 사익추구 대상으로 삼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드러났음에도 이를 창조한 세력들은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려 했다. 1880년대나 2010년대 민중이 봉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좋은 세상으로 바뀔 힘을 상실했다. 어느 시기고 하늘 아래 새로운 땅 한 뼘 민중에게 허락되기 힘든 일인가.
 
광화문 미술행동 3·1절엔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대형 걸개그림으로는 역사와 함께 한 태극기를 ‘리준만국평화재단(이양재)’의‘ 협조를 받아 설치했다. 그리고 서예가들이 현장에서 쓴 다양한 깃발을 진눈깨비와 세찬 비바람 속에서 들었다.
▲ 광화문 미술행동 3·1절엔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대형 걸개그림으로는 역사와 함께 한 태극기를 ‘리준만국평화재단(이양재)’의‘ 협조를 받아 설치했다. 그리고 서예가들이 현장에서 쓴 다양한 깃발을 진눈깨비와 세찬 비바람 속에서 들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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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조선에 동학과 전봉준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민중과 함께 봉기했다면, 2010년대엔 유력 정치가나 지식인이 민중을 깨우쳐 일어설 힘을 내도록 하지 못했다. 민중이 먼저 자발적으로 일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촛불을 밝혔다.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민중이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시대도 민중이 함께 했고, 일제에 속박된 나라를 구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도 민중이었음은 부인 못한다. 직접 나서서 외쳐본 민중은 외면하면 속박을 면하지 못하고, 떨쳐 일어나 행동할 때 자유를 지킬 수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 조병갑을 축출하기 위해 동학군과 농민들이 규합하여 고부군을 친 직후, 조정에서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했다. 그리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해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고 수습하도록 조처했다. 이때 자연 발생적으로 고부 민란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다만 전봉준의 주력 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해 주둔한다.

그런데 안핵사(조선 시대에, 지방에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하여 보내던 임시 벼슬)로 내려온 이용태는 무참스럽게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 교도들에게 돌렸다. 체포하는데 그치지 않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전봉준은 격분했다.
 
녹두장군 전봉준 2018년 4월 29일 짬을 내 찾아간 전옥서 터엔 막 피어난 신록을 배경으로 전봉준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워진 동상 가운데 가장 실제 모습과 닮았다는 평이다.
▲ 녹두장군 전봉준 2018년 4월 29일 짬을 내 찾아간 전옥서 터엔 막 피어난 신록을 배경으로 전봉준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워진 동상 가운데 가장 실제 모습과 닮았다는 평이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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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 하순에 이르러 인근 각지의 동학 접주들에게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보낸다. 여기에 동조해 백산에 집결한 동학 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이때 전봉준은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뒤 손화중(孫和中)과 김개남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았다. 그리고 4개 항의 행동 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격문을 작성해 통문을 각처에 보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했다. 이로써 고부군에서 시작된 민란은 동학 농민 혁명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창의의 뜻을 밝히며 내세운 4대 강령은 아래와 같다.

-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 병(兵)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하지만 어리석고 무능한 벼슬아치와 정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조정에 외병(外兵)의 불러들일 것을 요청한 뒤였다. 이를 받아들인 조정의 원병 요청으로 청나라 군인들이 인천에 들어왔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해 조선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여기에서 일본이 조선 강토를 짓밟게 되는 텐진조약에 대해 살펴본다. 조선 고종 22년인 1885년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이 톈진(天津)에서 맺은 조약이다. 그들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군대를 동시에 철수하는 걸 조약으로 맺었다. 그런데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 조약 상대국에 미리 알리기로 내용을 만들었다. 이 조약이 청나라가 인천에 상륙함으로서 일본도 군대가 들어오는 빌미가 됐다.

외부로부터의 침략도 아닌, 학정에 견디다 못해 민중이 들고일어난 민중봉기를 핑계로 다른 나라의 군대를 불러들인 몰상식함이 치욕스러운 망국의 한을 겪게 했다.

전봉준은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히자"라는 선무(宣撫)에 일단 응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다.

- 불량한 양반의 죄를 조사하여 벌줄 것
-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 불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없앨 것
- 일본인과 내통한 자를 엄중하게 처벌할 것


홍계훈이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전봉준의 동학농민군과 홍계훈 사이에는 1894년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맺어져 일단락된 듯 보였다.

하지만 홍계훈의 요청으로 조정에서 불러들인 청나라의 군대와 일본군이 이 시점에서 순순히 철수할 턱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사태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 농민군은 항일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한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남접 농민군과 최시형(崔時亨)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 휘하의 10만 북접 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한다.

전봉준은 자신의 주력 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남 순천 및 황해도와 강원도에서 일부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후퇴하여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으로 피신했다가 순창에서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음력 12월 2일 체포된 뒤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됐다.

여기에서 반드시 상기해야 할 건 자주국방을 포기하고 외세의 힘을 빌리면 그에 상응하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일, 자신을 지킬 힘을 갖추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국민 개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녹두장군 전봉준 2018년 4월 29일 막 피어난 신록을 배경으로 만났던 전봉준 동상을 3·1절 100주년을 기념해 치러지는 ’생명평화제전‘에 참여하기 위해 사흘 전인 2월 26일 다시 찾았다.
▲ 녹두장군 전봉준 2018년 4월 29일 막 피어난 신록을 배경으로 만났던 전봉준 동상을 3·1절 100주년을 기념해 치러지는 ’생명평화제전‘에 참여하기 위해 사흘 전인 2월 26일 다시 찾았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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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눈이 먼 세도가들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전봉준을 처형하려 했겠다. 그러나 조선이 왕권으로 통치하는 군주제 국가라 하더라도, 엄연히 도덕과 민의를 거스르는 일을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수만의 백성이 일본군과 전투를 치러 목숨을 잃었는데 조선은 그 백성을 지켜주지 못했다.

일본군은 전봉준과 같은 기개를 지닌 인물을 그대로 살려둘 수 없었다.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하지 않았더라도 살려두면 그들의 야욕을 채우기엔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한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을 처형해야 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의금부의 옥에 갇힌 다음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의금부에서는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사실 여부의 추궁이었다. 이때 전봉준은 대원군과 만났느냐는 추궁에 흥선대원군에 대해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다.

고문은 계속되었으나 자백이 없자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이감된다. 그리고 음력 2월 9일과 음력 2월 11일, 음력 2월 19일, 음력 3월 7일, 음력 3월 10일 다섯 차례에 걸쳐 일본영사관에 설치된 헌병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도 역시 목적이나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다가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의 나이 불과 41세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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