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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창원 못지않게 빠르게 피던 양양 벚꽃이 며칠 주춤거렸다. 대청봉에 봄눈이 사흘이 멀다 내리는 꽃샘추위에 맹렬한 기세로 오던 봄도 잠시 숨고르기를 한다. 하지만 봄은 봄, 어느 시인의 시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처럼 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봄은 기어코 꽃을 피운다.
  
양양향교의 벚꽃 오랜 역사를 지닌 양양향교엔 오랜 세월 봄을 맞이했을 고목이 된 벚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 정덕수
 
현산공원으로 친구와 벚꽃을 촬영하러 나섰는데 새벽까지 비를 뿌리던 구름이 걷히지 않아 '현호색'과 '산자고'만 만나고 양양향교로 발길을 옮겼다. 남대천과 현산공원은 바람을 곧장 마주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꽃이 피기 시작하고도 며칠 주춤거렸다. 그 덕에 길어야 닷새 안팎으로 즐기던 꽃구경을 제법 길게 만날 수 있다.
 
임천교에서 지금은 빈 건물만 남은 관동대 방향으로 조금 가면 양양에서 제법 많이 알려진 식당이 나온다. 그 앞으로 우회전하면 곧장 양양향교다. 양양향교(襄陽鄕校)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거마천로 52-20 (임천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향교다. 1985년 1월 17일 강원도에서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했다.
 
잘 알다시피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는 목적도 지니지만,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했다. 그런 혜택으로 선발된 학생은 숙식을 제공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다.
  
양양향교 홍살문에서 명륜당으로 오르는 계단까지 넓은 평지는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늘 만백성이 살아가는 온누리를 잘 살피라는 교육의 목적을 지니지 않았을까. ⓒ 정덕수
   
양양향교의 흥학비 홍살문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3기의 흥학비와 1기의 거사비가 오랜 역사를 반증하며 서 있다. 여타 고장에서 만나는 선정비나 공덕비와 달리 양양향교의 흥학비는 고장의 교육에 기여한 인물을 기려 세웠다. ⓒ 정덕수
 
양양군에서는 향교재단이 운영되어, 양양읍이 한국전쟁을 통해 수복된 직후인 1954년에는 명륜중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배울 기회를 제공했다. 1970년 기술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75년 폐교되어 양양향교의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게 된다.
 
아들 녀석을 데리고 나서려 했지만 누나가 걸린 감기가 문제였는지 열이 있어 함께 찾지 못하고 친구와 동행했다. 양양향교엔 산이 바람을 막아준 덕에 홍살문 너머로 보이는 명륜당 앞에 벚꽃이 활짝 폈다.
 
아직 새잎을 내지 못한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4개의 비가 있다. 그리고 새로 세운 중수비가 계단 양쪽에 안내문과 함께 나란히 있어 문무석처럼 보인다. 양양향교는 "고려 충혜왕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해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고 소개되어 잇다.
 
그때 당시 창건기를 "존무사(存撫使) 안축(安軸)이 양양부 구교리(舊校里)에 설립"하였다고 양양군비에서 본 기억이 난다. 지금의 위치에 한국전쟁에 소실된 건물을 1952년에 새로 지은 뒤 기록한 비문을 통해 내용을 확인했다.
  
양양향교 명륜당 홍살문에서 평지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다시 신도가 나온다. 신도는 정면으로 명륜당의 가운데 아랫부분을 통과하게 돼 있다. 그 안쪽으로 들어가야 명륜당에서 공부하던 70명의 학생이 생활하던 동제와 서제가 있다. ⓒ 정덕수
   
동제와 서제 명륜당 안으로 마당이 나오고 동제와 서제가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 아래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 정덕수
   
명륜당 서제 명륜당 안 동제에서 마주 본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서제다 향교에서 수학하는 학생의 수를 조선시대엔 90명과 70명, 50명, 30명으로 정해놓았다고 한다. 양양향교에서 70명이 수학했다 하니 큰 규모의 향교였음을 알 수 있다. ⓒ 정덕수
 
고려 충혜왕 때 양양향교를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충혜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의 왕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믿기 어려운 문제를 많이 지닌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방의 교육까지 살폈다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상투적인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해 배향"과 같은 한자식 설명은 설명이라 보기 어렵다.
 
한자를 모르는 이들, 한자를 안다고 해도 양양군의 한자 '襄陽'을 양양으로는 읽어도 그 뜻을 모르는 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도울 양(襄)은 오를 양으로도 사용되고, 볕 양(陽)은 해를 의미해 해가 오르는 고장이란 뜻이 양양군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한 지명이란 걸 일러줘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현유(賢儒)도 어진 선비를 이르는 말이란 걸 설명해 주어야 된다. 그렇다고 무작위로 고을에서 인정하면 다 어진 선비가 되는 건 아니란 걸 일러줘야 한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향교는 대성전에 그 답이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유교와 관련된 인물들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올렸음을 설명해 놓아야 된다. 양양향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의 모든 향교가 똑 같은 설명을 해 놓았으니 이젠 고쳐야 될 습관이다.
  
대성전과 서무 명륜당 안 서제 옆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대성전과 서무의 모습이다. 이곳에 5성과 공자가 인정한 열 명의 제자를 이르는 10철과 동방18현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18명 유학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정덕수
 
대성전에는 5성(五聖)과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의 위폐가 있는데 이들 모두 중국의 인물들이다. 5성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불리는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顔子)·자사(子思)는 동쪽에, 증자(曾子)·맹자(孟子)는 서쪽에 배치한 걸 이르는데, 중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성현을 왜 우리가 섬겨야 하는지아이들이 물으면 대답하기 조금 난처하다.
 
그리고 10철이라 함은 공자가 인정한 10명의 제자다. 그들은 안회(颜回, 颜渊), 민손(闵损, 闵子骞), 염경(冉耕, 冉伯牛), 염옹(冉雍, 仲弓), 재여(宰予, 宰我), 단목사(端木赐, 子贡), 염구(冉求, 冉有), 중유(仲由, 季路), 언언(言偃, 子游), 복상(卜商, 子夏)이다.
 
그리고 송조6현은 중국 송나라의 인물들로 이들은 북송시대와 남송시대 살았던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주희(朱熹)․장재(張載)․소옹(卲雍)․정이(程頤)를 이른다.
 
대성전 앞 좌우로 두 채의 건물인 동무와 서무에 동방 18현(東方 十八賢)으로 불리는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올라 문묘에 종사된 18명의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을 모셔 놓았다. 다른 내용은 몰라도 최소한 우리 아이들에게 이 분들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먼저 동무에 배치된 분들의 위패다. 동배향 제1위 홍유후(弘儒侯) 설총을 시작으로, 동배향 제2위에 문성공(文成公) 안유, 동배향 제3위로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동배향 제4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동배향 제5위 문순공(文純公) 이황, 동배향 제6위 문성공(文成公) 이이, 동배향 제7위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동배향 제8위 문경공(文敬公) 김집, 동배향 제9위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이 아홉 분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그리고 서무엔 서배향 제1위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그 옆으로 하여 서배향 제2위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서배향 제3위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서배향 제4위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서배향 제5위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서배향 제6위 문간공(文簡公) 성혼, 서배향 제7위 문열공(文烈公) 조헌, 서배향 제8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서배향 제9위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이 아홉 분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아이들에게 문충공 정몽주 할아버지 덕에 그나마 양양향교에 대해 "네 24대조 할아버지도 여기 모셔져 잇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옛말을 빌려 "정승 10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다시 대제학 10명이 문묘에 모셔진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라"란 말을 한다.
  
서제 뒤란의 담장과 벚꽃 명륜당 안 서제를 뒤로 돌아가면 담장과 굴뚝이 있는데 겨울철에 건물을 불을 넣어 학생들이 따뜻하게 생활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담장 밖 벚나무 꽃이 한옥의 지붕과 함께 잘 어울린다. ⓒ 정덕수
   
해우소 지붕과 벚꽃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근심은 풀어야 된다. 해우소는 서제 뒤를 돌아 담장 밖으로 있다. 지붕 위로 벚꽃이 곱다. ⓒ 정덕수
  
양양향교의 벚나무 양양향교에서 수학한 인물이 널리 이름을 떨친 이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 나름으로 고장의 역사를 지키며 살아가지 않았겠는가. 4월 4일은 양양만세시위가 있던 날인데 이때 그들의 역할이 컸으리라 본다. ⓒ 정덕수
 
하지만 자식이 어디 내 맘을 따라 공부를 하겠는가.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학교만 갔다 오면 방에 들어가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지만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어 크게 나무라진 않는다. 그나마 일찍 학교에 입학한 탓에 맨 앞에 서야 했던 작은 녀석이 동급생과 견주어 작단 말 안 들으니 고맙기만 하다.
 
향교에 흐드러진 벚꽃을 아들과 함께 오려던 이유는 방에만 있는 녀석을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밖으로 끌어내고 싶어서였는데… 이런 속셈을 미리 알아차렸는지 감기가 걸렸으니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대성전과 동방18현을 모신 동무와 서무로 통하는 문은 빗장을 질러 잠가두었고, 쪽문도 자물쇠가 야속하게 가로 막았다. 하지만 담장 너머로 안을 살피기엔 충분하다.
 
벚꽃이 만개한 향교는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조상들의 삶을 가르칠 좋은 장소고 기회도 된다. 한옥의 구성과 구조, 그리고 자연과의 어울림 또한 얼마나 근가한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보고 스스로 느끼게 할 일인데 이보다 좋은 기회 많지 않겠다.
 
명륜당 아래를 통해야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제와 서제로 들어갈 수 있다. 다시 거기에서 계단을 올라 대문을 들어서야 정면으로 대성전을 볼 수 있고, 좌우로 동무와 서무를 만나게 되니 조선시대에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는지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홍살문 주변 넓은 평지가 만백성이 삶을 누리던 온누리라면, 명륜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공부하기 어려운 일임을 깨우치는 구도의 길 되겠다. 또한 명륜당 가운데 마루 아래를 통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자존심 강했던 당시의 부모들이 아무리 자식이 보고 싶어도 자식들이 모여 공부하는 엉덩이 밑을 통과하는 굴욕은 견디기 어려웠을 노릇이다. 자연스럽게 공부에 방해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문 하나 없이 무시로 찾아오는 버릇을 경계하지 않았을까.
 
향교는 성현을 본받아 너희도 그와 같이 세상의 본이 될 위치에 우뚝 서는 인물이 되라는 가르침의 장소다. 배치 자체 또한 학업의 어려움과 뭇 세상과 배움이 큰 삶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저절로 깨닫도록 만든 절묘한 조상들의 풍수사상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벚꽃 홀로 피어선 고독하다. 함께 피어야 아름답다. 아이들에게 혼자가 아닌 더불어 함께 함이 더 아름답다는 걸 벚꽃을 통해 일러준다. ⓒ 정덕수
 
학교도 아닌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병영에까지 간섭하려는 부모가 많다는 얘기가 뉴스로 들리는 세상이다. 그런 간섭이 자식을 나약하게 키운다. 향교를 찾아 그 배치의 면면을 살펴 조상들의 경계심을 본 받았으면 싶다.
 
현산공원에서 흐렸던 하늘도 맑게 갰다. 햇살 눈부시고 벚꽃은 부는 바람에 춤을 춘다. 해오름의 고장 양양의 정명 600년 역사를 어룬 바람과 햇살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양양군, #양양향교, #흥학비, #양양벚꽃 명소, #양양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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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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