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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4대 사고 중 하나였던 전주사고, 실록각. 1472년(성종 3년)에 <세종실록>과 <예종 실록>이 완성되자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편에 전주사고를  건립하였다. 현재의 실록각은 1991년에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4대 사고 중 하나였던 전주사고, 실록각. 1472년(성종 3년)에 <세종실록>과 <예종 실록>이 완성되자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편에 전주사고를 건립하였다. 현재의 실록각은 1991년에 복원하였다
ⓒ 현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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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인 문화유산과 역사까지도 파괴시키며 돌이킬 수 없는 물적, 정신적 피해를 남긴다.

일찍이 5세기 초, 유럽 민족의 대이동 시기에 지중해 연안과 로마제국을 점령한 게르만 반달(vandal)족은 문화유산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으며 약탈을 자행했다. 서구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문화유산 파괴 행위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반달족의 '무지와 고의에 의한 반문명적 문화유산 파괴 행위'에서 유래하여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 탈레반이 자기들의 종교적 신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불교 유적을 무차별 파괴했다. 간다라 미술의 걸작품이며 크기가 53m나 되는 세계 최고의 인류 문화유산, '바미안 마애석불 입상'을 다이너마이트로 산산조각 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2003년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공격했을 때는 국립 이라크 박물관이 털렸다. 17만 점의 유물이 도난당했고, 세계 최초의 법전인 '함무라비법전'도 약탈당했다. 인류 4대 문명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순식간에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유독 전쟁이 많았던 우리나라도 반달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외세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고자 고려 현종 때 제조를 시작하여 77년에 걸쳐 완성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아이러니하게도 1232년에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의 무차별 방화로 궁궐이 불탓고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구한말 서구 열강들의 문화재 약탈도 심각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있던 귀중한 도서들을 약탈해 갔다. 6·25 한국동란은 전 국토를 초토화시키며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우리 불교문화유산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아비규환의 전쟁 와중에서도 목숨 걸고 문화재를 지켜낸 영웅들이 있었다.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중의 한 곳인 용굴암. 전라북도 기념물 제130호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중의 한 곳인 용굴암. 전라북도 기념물 제130호
ⓒ 정읍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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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시골 선비들

요즘 핫 프레이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전라북도 전주 한옥마을 부근에는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적 339호,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1410년(태종 10년)에 지어진 경기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선왕조 실록이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317호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국보 제151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 오늘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닥치는 대로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며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이 와중에 조선왕조실록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한양의 춘추관, 충청도 충주사고, 경상도 성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이 모두 불타버렸다.

4대 사고(史庫)중 유일하게 전라도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있는 실록만 남아 있었다. 당시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1322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해 6월, 왜군은 남원을 거쳐 전주성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왜군들이 도착하기 전에 실록을 안전한 곳으로 숨겨야 했다. 전주사고를 지키던 경기전 참봉 오희길(1556~1625)은 다급해졌다.

오희길은 평소 근방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읍에 사는 유생 손홍록(1537~1600)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생들에게 실록은 곧 그들의 근본이나 다름없었다. 오희길의 급보를 받은 손홍록은 흔쾌히 동의하고 근처에 사는 유생 안의(1529~1596)와 함께 집안의 머슴들과 말을 이끌고 전주로 달려갔다. 손홍록과 안의는 한여름 무더위와 싸우며 태조의 어진과 60여 개의 실록 궤짝을 지고 낮과 밤을 지새우며 피난길에 나섰다.

그들이 선택한 피난처는 내장산에서도 산세가 험한 금선계곡의 용굴암이었다. 6월 초에 시작된 피난 행렬은 6월 22일에 용굴암에 도착했다. 그 후에도 손홍록과 안의는 왜군들을 피해 장소를 옮겨가며 일 년이 넘게 주야로 보초를 서며 태조의 어진과 실록을 지켰다. 이때 손홍록은 56세, 안의는 64세의 노구였다.
 
 경기전 ‘실록각’ 앞마당에는 손홍록과 안의를 기리는 ‘조선왕조실록보존기적비’가 서있다
 경기전 ‘실록각’ 앞마당에는 손홍록과 안의를 기리는 ‘조선왕조실록보존기적비’가 서있다
ⓒ 현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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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사고가 있었던 경기전 '실록각' 앞마당에는 427년 전 여름의 드라마틱한 사연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지켜낸 손홍록과 안의를 기리는 '조선왕조실록보존기적비'가 서있다.

두 시골 선비의 눈물겨운 헌신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고, 후손들은 <왕의 남자>나 <대장금> 같은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게 되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 연합회'에서는 정읍의 유생 손홍록과 안의가 실록을 안전하게 피난시킨 1592년 6월 22일을 기념하여, 6월 22일을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재정·선포하였다. 제1회 '문화재지킴이날 기념식'이 오는 6월 22일 역사의 현장인 정읍 내장사 야외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 연합회’는 2018년 6월 21일 경복궁 수정전에서 6월 22일을 문화재지킴이날을 제정·선포하였다. 정읍의 유생 손홍록과 안의가 조선왕조실록을 안전하게 피난시킨 1592년 6월 22일을 기념하여,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재정하였다. 조상열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 연합회장이 깃발을 흔들며 문화재지킴이날을 선포하고 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 연합회’는 2018년 6월 21일 경복궁 수정전에서 6월 22일을 문화재지킴이날을 제정·선포하였다. 정읍의 유생 손홍록과 안의가 조선왕조실록을 안전하게 피난시킨 1592년 6월 22일을 기념하여,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재정하였다. 조상열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 연합회장이 깃발을 흔들며 문화재지킴이날을 선포하고 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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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며 화엄사와 팔만대장경을 구한 '경찰과 군인'

민족의 명산, 지리산 남서쪽 끝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에는 화엄종의 본산인 천년고찰 화엄사가 자리하고 있다. 1500여 년 전 백제시대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는 승병을 일의 켰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탓다. 인조와 숙종 때 다시 지었다. 이때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을 건립했다.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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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세월을 견디며 화엄사상을 꽃피운 화엄사에 또 다른 위기가 닥친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을 전후로 지리산은 남부군, 빨치산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 제18전투경찰 대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1920~1958)에게 빨치산 소탕 명령이 떨어졌다.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화엄사를 전소시키라"는 유엔사령부의 명령이 하달됐다.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1920~1958) 총경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1920~1958) 총경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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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출신 차일혁 총경은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절을 불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다시 짓는 데는 천년이 걸려도 부족하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차일혁은 묘안으로 각황전의 문짝 하나만 떼어내서 불태우는 것으로 화엄사를 지켜 냈다.

국보 제67호 각황전을 비롯하여 4점의 국보와 8점의 보물, 다수의 지방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이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 화엄사를 지킨 차일혁 총경의 문화재 사랑이 눈물겹다.
 
 1998년 화엄사 부도전 맞은편에 차일혁의 공적비가 세워졌다
 1998년 화엄사 부도전 맞은편에 차일혁의 공적비가 세워졌다
ⓒ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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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대가로 차일혁 총경은 한직을 전전하다 1958년 공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생을 마감했다. 1998년 화엄사 부도전 맞은편에 공적비가 세워졌고, 2008년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보관문화훈장'을 추서 하였다.
  
 “해인사를 즉각 폭격하라”는 공군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한 김영환 대령 (1920~1957)
 “해인사를 즉각 폭격하라”는 공군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한 김영환 대령 (1920~1957)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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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황에서 목숨을 내걸고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또 한 사람의 참군인이 있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퇴로가 막힌 북한군들이 경남 합천 해인사를 점령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해인사가 남부군의 지휘부가 되었다. 공군사령부에서 '즉각 폭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해인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폭격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1920~1957)은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하다"며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폭탄 투하 목표지점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에서 하얀 연막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부하들에게 "절대로 폭격하지 마라"면서 전시체제에서 군인의 생명과도 같은 명령을 거부하며 해인사를 지켰다.

1200여 년 전 신라시대에 창건된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와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 세계문화유산 장경판전(국보 제52호)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참군인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해인사 입구에 세워졌다. 정부도 2010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보 제32호)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보 제32호)
ⓒ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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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입구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
 해인사 입구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
ⓒ 합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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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6월 22일은 '문화재지킴이의 날'이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의 국위를 선양하게 된 데에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문화재를 지켜낸 지킴이들의 숭고한 문화재 사랑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곧 '한 국가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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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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