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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에게 행군은 전술 차원에서 중요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과 싸워 이기는 것은 진지전으로는 불가능했다. 단위 전투에서 일제 군경을 물리치고 다음 전투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독립군의 행군이었다. 곧 이동전이 독립군의 강력한 전술일 수밖에 없었다.

홍범도부대는 행군을 전술로 중시했다. 3.1혁명 후 청산리전투까지 과정을 보면 홍범도부대는 계속 행군하며 적과 싸우고 추격을 벗어났다. 경술국치 전후 국내 의병전쟁의 경험이 전술적으로 체화된 결과였다. 홍범도부대는 독립군단의 행정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군사활동에 치중했다. 곧 지역 주둔군이 아니라 이동군의 성격을 지녔다. 한때 국민회의 지원을 받고 또 다른 독립군단과 연합하기도 했지만 홍범도부대는 지역 위수보다 장차 국내 진입을 위해 이동하는 군대였다.

봉오동전투 뒤의 행군은 홍범도부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홍범도부대원이었던 이종학의 회고(<홍범도 군대 독립군>)로 행군 과정을 보면 이렇다. 신민단, 독군부, 국민회군대 등과 연합한 홍범도부대는 전투에 승리했다. 승전 후 각 단위 부대는 분리되어 활동했다. 1차 항일전쟁의 승리 소식을 들은 동포마을(노투거우 교회촌)에서 홍범도부대 환영회를 베풀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부대원들이 마침 굶주려서 그곳을 향해 행군했다. 수 십리를 앞두고 행군노선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왼쪽은 탄탄대로로 빠른 길이고 오른쪽은 산골짜기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중대장/소대장들은 쉬운 길을 건의했지만, 홍범도는 산골짜기로 행군을 지시했다. 걷기 쉬운 길은 그만큼 왜적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었다.

산 위에서 휴식을 하던 중 왜적이 공격해왔지만 고지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적을 물리쳤다. 지휘관들이 전장을 수습하자고 했지만 홍범도는 빨리 산을 오를 것을 명령했다. 왜적 수비대가 몰려올지 모르므로 바로 퇴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전투 뒤의 신속한 행군은 이어졌다. 장교들이 교회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 가자고 했지만 홍범도는 돌아가는 행군을 지시했다. 눈앞의 음식보다 부대의 안전, 나아가 혹여 전투가 동포 마을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려고 빨리 부대를 움직이려 했다.

야간 행군으로 전투 지역을 벗어나 새벽에야 산간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시 행군해 동포 마을에 들어갔고 주민들이 홍범도부대를 환영했다. 혹여 있을지 모르는 왜적의 추격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동포 마을에 들어갔던 것이다. 홍범도는 마을 동포에게 돈을 내놓고 돼지를 잡아줄 것을 부탁하고 그것으로 부대원들을 배부르게 먹게 했다. 이후 다시 행군해 안전을 확인한 후 예수교촌에 들어가서 2-3일간 머물며 마을 사람들에게 연설도 하고 훈련도 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이종학이 '교회촌'이라 한 곳은 화룡현 서성진(西城鎭) 명암촌(明岩村)이다. 어릴 때 작은북을 두드리며, 홍범도부대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던 양환준은 부대의 이동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마을 사람들이 며칠 머물도록 청했지만 하루 잘 것이라고 했으며 자고 일어나니 독립군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밀정의 정탐을 피해 새벽에 행군을 시작했던 것이다(<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이종학과 양환준의 회고에 머문 일시는 차이나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르게 새벽에 행군을 시작한 점이 중요하다.

위의 과정을 보면 홍범도부대는 계속 이동했다. 전술적 목적은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적에게 노출되기 쉬운 길보다 적을 피하거나 또는 부딪히더라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산길로 행군했다. 마을에 주둔하더라도 군세를 정돈한 뒤 빨리 숙영지를 떠나 행군했다.

이종학은 홍범도가 독립군으로 살아남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전투를 피하지 않지만 소부대가 왜적과 대처하며 장차 국내로 진공하기 위해서는 항일 무장대오의 보존·강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홍범도부대의 행군은 그 전술적 표현이었다.

동포사회 행정조직을 바탕으로 한 북로군정서의 행군

청산리전투의 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북로군정서 군대는 동포 사회의 행정조직인 북로군정서를 기반으로 했다. 곧 부대가 이동을 전제로 편제되지 않고 근거지를 담보하고 있었다. 관할 구역에서 청장년을 모아 병력자원으로 삼은 것도 무장대오가 근거지를 바탕으로 편제되는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군이 만주 침략을 계획하자 중국군은 북로군정서부대의 이동을 강요했다. 중국군과 싸울 수 없는 북로군정서는 근거지 이동을 결정하고 행군에 나섰다.

9월 9일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거행하고 부대를 편제한 뒤 9월 17-18일 근거지 왕청현 서대파를 출발했다. 우선 대감자로 행군했다. 서일 등의 행정 지휘부는 일제 세력이 닿지 않는 노령 접경 지역으로 북상할 것을 주장했다. 김좌진 등의 사령부는 백두산 쪽으로 남하해 무장을 강화해 일제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서일의 주장은 일제의 추격을 완전히 벗어나 장기전을 염두에 둔 것이고 김좌진의 주장은 노령 접경 지역은 동포 사회의 기반이 약하므로 동포의 지원이 담보되는 쪽으로 남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주1) 대감자에서 근거지와 행군 방향을 두고 논의했다. 이후 군정서 부대 주력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로 행군하고 서일 등 군정서 간부 일대(一隊)는 노령 접경지대로 북상했다.
 
졸업식 때 찍은 사관연성소 모습.
▲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전경(全景) 졸업식 때 찍은 사관연성소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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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 부대가 청산리 부근에 도착한 것은 10월 12-13일이다.(주2) 서대파에서 출발해 25일 정도 걸렸는데 이로써 1차 행군을 마쳤다. 청산리가 최후 목적지는 아니었다. 안도현 경계의 삼림에 근거지를 구축하거나 서로군정서 부대와 합병할지 청산리에서 결정하려 했다('기밀제34호'). 안도현 내두산은 백두산에 인접한 곳으로 서로군정서 교성대가 왜적의 수색을 피해 이동해서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수림과 물길이 교차하는 지역으로 독립군이 일본군 대부대와 싸우기 좋은 군사 거점이었다. 하지만 수림 지대였던 만큼 동포가 적었다. 북로군정서는 이 때문에 내두산으로 옮기는 것을 고심했다. 식량이 부족해서 주둔이 어렵다고('기밀제272호') 생각했다.

안도현을 목표로 행군하던 홍범도부대가 청산리 인근으로 이동해 와 10월 19일에 북로군정서 지도부와 군사 회의를 열었다.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에 대한 대처를 논의했는데 '광복의 맹아(萌芽)'인 독립군을 보호하기 위해 피전을 택했다. 하지만 포위는 좁혀오고 군사적 근거지를 정한 뒤의 행군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21일부터 일본군과 싸워 청산리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다. 그 승전의 성과와 뜻은 별도로 논의되어야 한다. 행군의 전술 차원에서 보면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 도착하기까지 25일 정도 걸렸고 그 뒤 근거지 이동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 발발까지 8-9일이 경과했다. 합하면 30여 일이 된다.

한 달 남짓 행군한 것은 사실이다. 북로군정서 장교 김훈도 대감자에서 청산리까지 30여 일 걸렸다고 했다(<북로아군실전기>). 병사 이우석의 행군로를 밝혔던 한 연구도 한 달 걸려 10월 초순에 청산리에 도착했으며 "하루에 2-30리 밖에 진군하지 못[해서] 작전상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고 분석했다. 곧 군대 이동이 신속하고 은밀해야 하는데 장기간 드러나게 이동해서 일본군에게 행군 정보가 노출되었다는 것이다.(주3)

하루 평균 10킬로미터 안팎의 행군은 일반적 행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북로군정서부대는 이동군이 아니라 주둔군 성격이 강했다. 동포 사회의 지원, 곧 독립군단의 행정조직에 근거했다. 일본군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이동전에 맞게 전술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행군을 시작했던 것이다.

식량과 연관해 보면 북로군정서는 근거지의 우선 조건을 군량(軍糧) 준비, 곧 동포사회의 지원에 두었다. 내두산으로 이동하지 못한 것도 식량조달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행군 중에도 동포 마을에 주둔해서 식사할 때가 잦았다. 자체 군량을 가지고 산악을 가로지르는 형태의 신속한 행군과는 차이가 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일지를 보면 일지를 쓴 70일 동안 사관양성소에서 큰 소 다섯 마리를 먹은 기록이 있다. 동포들이 보낸 것이다. 사관훈련생들의 체력과 사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식사 방식이 행군에서도 유지되면 행군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동포들이 환영하는 곳마다 머물러 가는 행군이 이어졌다.

'낮이면 촌에 주둔하고 밤이면 행군'(강근, <나의 회상기 일편>)하는 노정이 이어졌다. 야간행군은 사실이다. 하지만 행군 지연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루 평균 두 시간 정도의 행군 노선은 낮에는 동포 마을에 머물다가 밤에 멀리 않은 곳으로 옮겨 숙영했음을 뜻한다. 또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군량, 곧 건량(乾糧: 말린 곡식가루 등)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는 채로 행군했다는 뜻이다. 식사할 수 있는 동포 마을을 오래 벗어날 수 없는 행군이 되었다.

건량 없이 행군한 것은 확실하다. 강근은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15호 정도 있는 동포 마을에서 '식료로는 다만 생감자를 한 베도자 넣어' 짊어졌다고 회고(<나의 회상기 일편>)했다. 김훈도 '일시용(一時用) 식량을 준비'해서 청산리 삼림으로 들어갔는데 이튿날 식량이 떨어져 하루를 굶었다고 했다. 이에 밤에 식량을 조달해서 한 사람에게 감자 3개, 좁쌀 1주발 나누어주며 한 번에 먹지 말고 남겨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여러 끼를 굶어서 한 번에 다 먹고 말았다(<북로아군실전기>). 장기 행군과 전투에 필요한 건량이 없었다.

둘째, 새 근거지를 확정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행군이 지연되었다. 행군 초기에 노령 접경지대와 안도현 방면으로의 이동이 논의되었지만 이후 행군 중에도 최종적으로 어디로 갈지 확정하지 못했다. 중간 목적지를 청산리로 정하고 그곳에서 최종 목적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곧 서로군정서와 합대(合隊)할지, 안도현 삼림지대에 새 근거지를 구축할지 청산리에서 '형세를 보아 결정하기로' 했던 것이다('기밀제34호'). 청산리에 도착한 뒤에도 다음 행군 목표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의 포위에 맞닥뜨렸다. 일본군은 밀정의 정보를 통해 북로군정서의 행군 목적지가 청산리라는 것을 알고 병력을 청산리로 전진 배치했다. 이 때부터 북로군정서의 행군은 '정면과 배후에서 압박'(<북로아군실전기>)해 들어오는 일본군에 대한 전투와 퇴각의 행군이 되었다.

독립군단들의 북정(北征)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는 청산리에서 5000여 명의 일본군 아즈마지대(東支隊)와 싸워 이겼다. 처음에 피전을 택했지만 만일 싸우게 되면 들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일본군을 삼림 속으로 끌어들여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싸울 것을 결정했는데 결국 이를 실현했다. 삼림 고지로 행군해서 공격 지점을 선점하고 많은 일본군을 대적하여 승리했다(<북로아군실전기>).

장기전은 불가능했다. 계속 전투할 식량이 없었다. 사흘 계속된 전투에 감자 몇 개로 버텨서 모두 '기력'이 없었다. 솔잎, 소나무껍질, 배낭 속의 초도 먹을 정도였다(<북로아군실전기>). 홍범도부대도 식량이 없었다. 홍범도부대는 의병전쟁의 전술 경험이 있어서 행군할 때는 혹여 있을 전투에 대비해 식량을 준비해두었다. 10월 중순경에는 1인당 1주일분 식량을 지니고 있었다('기밀제321호'). 하지만 며칠 동안의 전투에 준비한 식량이 떨어졌다.

군사 정황도 전투 마감을 요구했다. 곧 일본군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전투 패배의 화를 무고한 동포에게 돌려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었다. 새 근거지로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 청산리에서 포위를 뚫은 북로군정서부대는 왕청현을 거쳐 노령 국경의 밀산으로 행군했다. 앞서 북쪽으로 향한 서일 등 행정지휘부 일대(一隊)와 합치기 위해서였다. 의군부와 군무도독부도 일본군의 침략에 앞서 북쪽으로 행군해 있었다.

고난의 행군이었다. 전투 때 이미 식량이 떨어졌거니와 일본군이 동포를 학살하는 때라서 행군은 동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길을 택해야 했다. 윤정현(북로군정서 탁지국장)은 "(식량도 없이 떠나) 낮에 잠복하고 밤에 행군하기를 78일 하는데 아무 먹을 것이 없었다"고 굶주린 행군을 말했다(<독립신문> 1922.12.13.).

동포 마을을 지나기도 했지만 가난한 동포들에게 충분한 식량은 없었다. 나자구를 지나 팔면통에 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쌀밥과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또 홑옷을 벗고 솜바지 저고리 등 겨울옷을 입을 수 있었다. 팔면통은 부유한 동포 마을로 일찍이 안중근 의사가 살던 곳이다. 마을 전체가 독립사상으로 무장한 곳이었다(강근, <나의 회상기 일편>).

홍범도부대는 전투 후 원래 행군 노선에 따라 안도현으로 진입했다. 그곳에서 서로군정서 교성대, 흥업단부대와 합동해 대한의용군을 편제하고 11월 초 노령으로 북정을 시작했다. 동포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쉬운 행군 노선을 택하지 않고 산악 지대를 통과해 팔면통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 남짓 걸렸다. 안도현에서 대사하를 거쳐 산악지대를 가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북쪽의 산은 더 험해지고 행군 속도도 늦어졌다. 한겨울 맹추위에 천지는 빙설로 덮이고 신은 얼음덩이가 되었다. 총검으로 얼음을 깨며 허벅지까지 쌓인 산악을 돌파해나갔다. 눈길을 터야 하는 선두 부대는 30분마다 교체되었다. 눈보라는 멈추지 않고 준비한 식량은 이미 오래 전에 떨어졌다. 북간도에서 험하기로 유명한 팔덕령을 넘어서 팔면통을 거쳐 12월에 밀산 근처 '십리와'에 도착했다.(주4)
 
중앙 타원 부분이 팔면통이고 옆으로 목릉하(穆陵河)가 흐른다. 안중근 의사가 한때 살던 곳으로 항일의식이 높은 동포마을이었다. 팔면통 동포들은 독립군 북정의 숨은 공로자였다.
▲ 북만주 팔면통 중앙 타원 부분이 팔면통이고 옆으로 목릉하(穆陵河)가 흐른다. 안중근 의사가 한때 살던 곳으로 항일의식이 높은 동포마을이었다. 팔면통 동포들은 독립군 북정의 숨은 공로자였다.
ⓒ 이중연 (1차 저작권 텍사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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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을 아낌없이 지원한 팔면통 동포들

팔면통 동포들은 노령으로 가는 모든 독립군 부대에게 의복과 신발을 마련해주고 정성껏 후원했다(<나의 회상기 일편>). 의군부와 독군부의 연합부대는 나자구에서 노령으로 행군을 시작했는데 며칠 만에 식량이 떨어졌다. 일본군이 추격해 오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팔면통으로 행군했다. 김재규의 회고(<의군부>)에 따르면, 행군 중 중국군이 길을 막기도 했는데 그들은 "조선 독립군들은 국가 독립을 목적으로 저와 같이 동삼(한겨울)에도 홑옷을 입고, 초신(짚신)을 신고, 식료가 없이도 생사를 내놓고 싸우니 언제든지 국가를 독립하고야 말 것이니, 그들을 조금이라도 대항치 말라"고 하며 길을 내주었다. 팔면통으로 들어간 뒤에 동포들이 마련해준 군수품이 도착해서 비로소 마음껏 먹고 겨울옷을 입었다.

군비단은 청산리전투 이후 1921년 봄부터 부대원을 여덟 차례에 걸쳐 노령으로 파송했다. 대부분이 비무장이어서 행군은 더욱 간고했다. 군비단은 실전 경험이 있는 장교가 매우 적었다. 255명이 이동하는데 장교는 3명이고 대부분 훈련 받지 못한 신병이었다. 이들은 낮에는 인적 드문 곳에서 머물고 밤에 행군했다. 일본군이나 중국군이 앞길에 없을 때는 강행군을 했다. 다른 독립군부대에서 낙오한 병사나 신입 병사들 57명이 합류해 노령 이만에 도착할 때는 312명이 되었다.(주5) 강상진부대 36명이 행군할 때는 <행군요략(行軍要略)>이란 행군지침서를 준비해서 지도와 함께 지니고 행군을 시작했다. 이들도 주로 밤에 행군해서 굶기를 예사로 하며 노령 이만에 도착했다(강상진, <군비단>).

만주에서 노령 이만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일은 출발 지점과 군사 상황, 행군 노선 등에 따라 다르다. 군비단 임표부대는 안도현에서 노야령을 넘어 영안, 목릉, 밀산, 호림을 거쳐 이만까지 2천여 리를 35일 만에 도착했다. 군비단 강상진부대는 장백현에서 이만까지 3700여 리를 100일 걸려 이만에 도착했다.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에서 10월 말에 행군을 시작해서 한 달 남짓 걸려 팔면통에 도착했다. 안도현에서 출발한 대한의용군은 팔면통을 경유해서 밀산까지 한 달 정도 행군하여 도착했다. 북로군정서와 대한의용군은 팔면통에서 밀산으로 행군하여 그곳에서 부대를 통합해 단일부대로 만들었고 곧 국경을 넘어 이만으로 진입했다.

팔면통까지의 행군은 간고하고 급박한 산악 행군이었지만 이후 행군은 군세를 정돈하면서, 또 뒤이어 오는 부대를 기다리며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강근은 팔면통에서 20일, 밀산에서 20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나의 회상기 일편>). 이 때는 각 독립군단이 북정하면서 후술하듯이 부대 통합과 최종 근거지를 정하기 위한 모색이 진행했다. 따라서 일본군 추격이 급박하지 않은 상황에서 행군을 조절했다.

이상으로 보면 각 독립군은 2000-3700여 리의 거리를 한 달 남짓에서 몇 달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로군정서, 대한의용군, 임표 군비단의 행군이 신속했다. 팔면통까지의 행군은 빠르고 그 뒤에는 상대적으로 늦었는데 임표 군비단만 이만까지 행군이 빨랐다. 1921년 봄에 행군을 시작했고, 또 이만이라는 목표 지점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대들은 한겨울에 팔면통까지 극도의 고난의 행군을 했고 이후 식량과 군복 등 군수품을 마련해서 군세를 정돈하고 노령으로 넘어갔다.

독립군은 북정으로 새 근거지를 만들고 부대 통합을 이루어냈다

독립군의 노령 이동은 전략적 장정이었다. 일본군의 대부대의 포위가 가중되고 학살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독립군의 새 근거지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장정은 불가피한 퇴각이었지만, 단순한 퇴각이 아니라 행군 과정에서 여러 독립군단의 통합을 일구어내고, 나아가 근거지를 확보하는 이중의 군사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 북정은 장기항전을 위한 새로운 국면을 창출했다.

첫째, 독립군의 통합은 행군 속에서 이루어졌다. 청산리전투 전에 독립군 통합이 목표로 제시되었지만 통합에 이르지는 못했다.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군사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정하고, 홍범도부대와 국민회군, 신민단 등이 연합해서 봉오동전투를 치렀지만 부대 통합은 없었다. 청산리전투를 겪으면서 분산된 항전력으로는 대규모 일본군과 싸워 결정적 승전을 이끌기 힘들다는 군사적 판단 아래 부대가 이동하는 곳에서 통합이 이루어졌다. 최초의 통합은 홍범도부대와 서로군정서(교성대), 흥업단이다. 행군 노선에 따라 홍범도부대가 안도현에 도착한 직후 대한의용군이 결성되었다. 이어 밀산과 호림의 접경지대 십리와에서 대한의용군과 북로군정서 지휘부가 만나 통합을 시작했고 며칠 후 호림 도목구에서 통합부대를 편제했다.(주6)

부대 통합 후 곧 이만으로 행군해서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주 독립군과 노령 항일군 각 부대가 모여 통합을 위한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큰 뜻을 위해 독립군단을 통합하려는 만주 독립군의 뜻과 달리 노령의 부대는 군사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고 실제 만주, 노령을 아우르는 통일된 독립군단을 결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령으로 이동하기 전의 독립군 통합은 실제 부대 통합이 실현되고 장차 독립군 통합의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뜻이 깊었다. 이를테면 백순(白純)이 임시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밀산에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통일하여 대한독립군'을 결성하고 노령으로 진입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어서(주7)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해 독립운동 지도부에서 독립군 통합에 대해 기대하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둘째, 비록 노령에서 대규모 통합군단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만주 독립군의 북정은 군사 활동 근거지의 확장이란 점에서 뜻 깊었다. 이르쿠츠크의 고려혁명군관학교를 통해 만주에서 불가능하게 된 사관 양성을 지속했다. 만주 독립군의 참여로 노령의 항전력도 강화되었다. 만주의 근거지 강화는 북정하지 않은 재류 독립군과 노령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만주로 귀환한 지휘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독립군 주력부대가 북정에 성공함으로써 독립군 절멸을 기도했던 일본군의 만주 침략은 실패했다. 행군 과정에서 통합을 통해 독립군은 역량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행군은 새 근거지를 담보하려는 노력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만난 부대는 힘을 합치기 위해 노력했다. 강상진(<군비단>)은 북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머나먼 거리를 허다한 시련을 타승하고 도보 행군해 온 과정도 실지 행동상 혁명의 새길, 새 방향을 확신한 투쟁성이었고 자체의 발전 수준을 제고시키는 주요 행정에서는 본위 관념이 없이 동지를 흡수하고 적임자를 서슴없이 등용함으로써 실력을 튼튼케 한 주장도 특점이었으니 시대적 인식이 있는 누구를 물론하고 우리 사회에서 유래하던 이전의 각 단색(團色)을 벗어나서 합치할 수 있는 새 길을 활발히 열어 놓았던 것이다.
 
군비단은 이만에 도착해서 북로군정서 지휘관(북로군정서 지휘부 일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다시 국경 근처 만주로 돌아갔다)들을 사관 양성을 위해 초청하기도 했다. 새 근거지에서 다른 독립군단 지휘관들과 힘을 합해 군인을 양성하려 했다. 비록 성사되지 못하고 뒤에 이용, 한운용 등과 협력해 군인을 양성했는데, 당시 행군을 통해 새 근거지를 확보한 독립군부대가 다른 부대와 함께 새로운 항일전쟁의 전망을 모색하던 노력을 알 수 있다. 각 독립군은 새 근거지 상황에 맞추어 경신참변 이후의 항일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독립군의 북정은 군사적 퇴각이었지만 독립전쟁의 전략·전술로 볼 때 단순한 후퇴가 아니었다. 새 근거지를 만들고 각 독립군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힘을 합해 통합부대를 만들어 장기항전으로 나아가는 바탕이 되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중국공산당의 장정이 유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1920년 겨울 독립군의 북정은 침략군에 대한 독립군의 전략적 장정으로 뜻이 컸다. 경신참변 때 독립군과 동포의 희생은 행군 속에 독립전쟁의 결의로 승화되어 장기항전을 이어갔다.

(주)
1)박영석, <<한 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 박영사, 1984, 97-98쪽.
2)신용하,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36쪽.
3)박영석, 위의 책, 100-101쪽.
4)김두찬, <논픽션 오광선장군>, <<신동아>> 1971년 2월호, 236-237쪽; 김승빈, <中領(중국령)에서 進行된 朝鮮解放運動>.
5)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95, 100-101쪽.
6)김승빈, 위의 글; 박환, <김혁의 민족의식 형성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2002, 248쪽.
7)<백순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 1921년 12월 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덧붙이는 글 | '새로 쓰는 독립군사', 다음 이야기는 '독립군의 행군과 식량'입니다. 8월 24일에 이어집니다.


태그:#독립군 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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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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