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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고향 수유리를 답사하며 가장 안타까웠던 건 어렸을 적 다닌 '동원유치원'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유치원이 어떻게 변했나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아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사라진 모양이었다. 오직 졸업년도가 1973년이라고 적힌 낡은 앨범만이 추억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앨범을 들추다 보니 동원유치원이 어떤 교회와 마당을 함께 썼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그 교회를 찾으면 어떻게 된 사연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살았던 수유동 주변으로 설립된 지 최소한 50년 이상 된 교회를 찾아봤다. '수유동교회'와 '우이중앙교회'가 검색됐다. 하지만 두 교회 홈페이지에서 유치원과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만 했다.

그렇지만 난 두 교회 역사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모두 '실명의용촌'에서 시작한 교회라는 것이다.
 
1955년 07월 31일 실명의용촌 17호에서 4인이 첫 예배
1955년 09월 25일 실명의용촌 공회당에서 7가정 12명이 모여 '실명의용촌교회'로 칭함 (수유동교회 홈페이지)

1960년 08월 28일 성북구 우이동 산 1번지 실명의용촌 내 강당에서 장년 20명, 유년 25명이 모여 설립 예배 (우이중앙교회 홈페이지)
 
실명의용촌의 시작
 
상이용사촌(1961) 6.25 전쟁 후 전국 곳곳에 부상 제대 군인들을 위한 집단 거주촌이 세워졌다. 사진은 1961년에 촬영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상이용사촌이다.
▲ 상이용사촌(1961) 6.25 전쟁 후 전국 곳곳에 부상 제대 군인들을 위한 집단 거주촌이 세워졌다. 사진은 1961년에 촬영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상이용사촌이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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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교회는 원래 한 교회였는데 나중에 분리됐다. 가까운 곳에 자리한 두 교회가 실명의용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다닌 유치원이 사라진 사연도 궁금했지만 난 실명의용촌이라는 단어 혹은 지명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실명의용촌은 6.25 전쟁에서 눈을 다쳐 시력을 잃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우이동(현재 수유동)의 한 동네를 의미했다.

<조선일보>는 1955년 6월 30일자 '우이동에 실명의용촌(失明義勇村)' 기사를 통해 "6·25 전쟁에서 시력을 잃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18동의 건물을 육군 공병단이 짓는다"며 실명의용촌의 시작을 알린다. <경향신문>은 1955년 7월 26일자에 실린 '이십칠일에 입주식 우이동의 실명의용촌' 기사에서 '실명의용촌이 완성돼 21세대 81명의 입주식이 열렸다'고 전한다.

당시 실명의용촌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다음은 <조선일보> 1955년 7월 28일자에 실린 '손에 손을 잡고'라는 기사의 일부다.
 
잔솔 자욱하게 우거진 속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의 새로운 주인들은 아내가 이고는데 따라 새로 들게 된 따스한 보금자리의 문가에 서서 눈을 섬벅거리며 아내와 귓속말을 소근대는 정다운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으며 이 또한 새로 꾸민 양계장에서 모이를 쫓던 닭이 헤설피 우는 소리에 고개를 들며 "우리 닭을 더 많이 기르고 싶다" 하며 옆에 부축해 서 있는 아내의 얼굴과 마주 서서 마치 이 마을의 모습들을 살피려는 듯 보이지 않는 눈을 크게 뜨다가 눈물이 글성해지는 얼굴에 웃음을 짓는 상이용사도 있었다.

(중략) 당국에서는 한 사람 앞 하루 세 홉씩 한달치씩의 식량과 한 사람 앞 담요 두 장 한세대 앞 한달치 부식비 삼(三)천 환 그리고 식기 등을 나누어 주었다. 돼지우리에 다섯 마리의 돼지가 여물통을 쑤셔대며 꿀꿀대고 닭장에서는 오십 마리의 닭이 모이를 쪼며 한낮의 정적을 곱게 흔들어주며 '꼬꾜' 울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노동력을 잃은 상이군인들을 위해서 거처는 물론 생활비도 부담했다. 그들의 자립을 위해 각 가구당 닭 50마리와 돼지 5마리도 제공했다. 입소 당시에 정부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그곳은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입소 1년을 기념해서 찾아간 기사 몇 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졌다. 적어도 언론에서는 그렇다.

마을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다

입소 10년이 가까워져 오는 1964년에야 기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1964년 7월 17일자에 '상이촌에 생업자금' 기사를 실으며 재향군인회가 실명의용촌에 생업자금을 지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실명의용촌 입주 20년이 훌쩍 지나서야 기사 하나가 겨우 나온다. <매일경제>는 1976년 7월 1일자 '조달청장 수유 실명의용촌에 원호성품 전달'이라는 기사에서 조달청 직원들이 모은 성금으로 '블록 벽돌 제조 틀' 20대를 전달했다고 밝힌다.

실명의용촌 자료를 살펴보다 보니 오래전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내가 다닌 동원유치원은 어머니가 다닌 우이중앙교회 안에 있었다. 1960년대 초 경상북도 상주에서 올라온 우리 가족 중 어머니는 유독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어머니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는 교회 교인이 운영하던 달걀 가게에서만 달걀을 샀다. 아마 내가 유치원도 다니기 전,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달걀 사러 갔었는데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가게를 지키고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아저씨는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아줌마의 남편이었다.

혹시 그 가게가 있던 곳이 실명의용촌이 아니었을까. 당시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구들과 선배에게 물어보니, 실명의용촌이라는 곳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고 다만 분위기가 좀 다른 동네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실명의용촌의 흔적 '물댐길' 실명의용촌 농장에 물을 대던 길이라 해서 '물댐길'이다. 지금은 경로당 이름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 실명의용촌의 흔적 "물댐길" 실명의용촌 농장에 물을 대던 길이라 해서 "물댐길"이다. 지금은 경로당 이름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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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의용촌의 흔적 '물댐길' 이 근처에 과거 실명의용촌이 자리 했다고 마을 노인들이 증언했다. 골목 구획에서 과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실명의용촌의 흔적 "물댐길" 이 근처에 과거 실명의용촌이 자리 했다고 마을 노인들이 증언했다. 골목 구획에서 과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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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의용촌이 자리했던 곳을 답사해 보니 지금은 그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평범한 주택가가 된 것이다. 그 동네에서 아주 오래 산 주민들도 대략만 기억했다. 농장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주택이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섞여 살았다고 한다. 당시 실명의용촌 농장에 물을 대었다는 '물댐길'이라는 지명만 경로당 간판과 골목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경향신문> 1987년 6월 9일자에 실린 '역전의 勇士(용사)는 自活(자활)에도 勇士(용사)'라는 기사에서 그들의 말년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기사에는 전국에 산재한 상이 제대 군인들의 마을, 세칭 의용촌 혹은 용사촌의 모습이 묘사됐는데, 수유동 실명의용촌 소식도 있었다.

기사는 "설립 당시에는 모래땅이었으나 지금은 100여 가구의 일반인들과 잘 어울리며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다"며 집단 거주촌의 모습이 사라진 1980년대 평범한 주택가의 정경을 그리고 있었다. 동네 입구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가 박힌 '실명의용부(失明義勇部)'라는 기념비가 있다고 기사는 전했다.

기념비가 있었다고? 난 기사에 적힌 주소를 토대로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그 동네에서 오래 거주한 주민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기념비는 찾을 수 없었고 사람들도 모른다고 했다. 기념비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수유리에 있던 기념비, 수원에서 발견한 사연
 
'실명의용부' 기념비 실명의용촌 입구에 놓였던 기념비. 지금은 수원 보훈교육원 앞마당에 있다.
▲ "실명의용부" 기념비 실명의용촌 입구에 놓였던 기념비. 지금은 수원 보훈교육원 앞마당에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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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의용부' 기념비  실명의용촌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념비 글씨를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는 안내석이 놓여있다
▲ "실명의용부" 기념비  실명의용촌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기념비 글씨를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는 안내석이 놓여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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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교육연구원과 실명의용부 기념비 수유리에 있던 실명의용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2미터 남짓의 돌로만 남았다.
▲ 보훈교육연구원과 실명의용부 기념비 수유리에 있던 실명의용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2미터 남짓의 돌로만 남았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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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의용부 기념비는 경기도 수원 보훈교육연구원 앞마당에 놓여 있었다. 그곳은 보훈요양원 등 각종 보훈 관련 시설이 들어선 세칭 '보훈단지'라 불리는 곳이다. 작은 호수가 있고 나무도 우거져 산책하기 좋은 곳이었다. 다만 근처의 일반인 주거 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돼 분리된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수유리 주민들도 실명의용촌을 그렇게 느꼈으려나.

보훈교육연구원 측에 실명의용부 기념비가 언제 그 자리로 옮겨왔는지 문의해 봤다. 정확한 기록은 남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보훈처로부터 업무가 이관된 1999년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1987년까지만 해도 수유리에 있던 기념비가 1999년에는 수원에 있던 것이다.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했던 수유리 실명의용촌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높이 2미터 남짓의 돌로만 남았다.

덧붙이는 글 | 수유리에 있던 실명의용촌과 수원으로 옮긴 기념비에 대해 아시는 분은 제 이메일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속 취재할 예정입니다.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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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40년 넘게 살던 아파트를 떠나 산 아래 옥상집에 사는 경험과 동화 공부를 하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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