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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시행된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조치로 타격을 입은 음식점을 비롯해 고위험시설로 분류되 영업을 할 수 없게된 PC방과 노래방 등에서 폐업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쌓여 가는 폐업 매물은 코로나19 장기화로 벼랑 끝에 선 자영업자의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늘어가는 자영업자의 한숨, 쌓여가는 폐업 매물, 2020.09.15, 한국일보)

코로나로 인한 노래방 폐업 기사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흥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노래방만큼이나 추억이 깃든 곳이 또 있을가. 가족끼리 화기애애하게, 회사 동료들과 어려운 프로젝트를 마치고, 또는 친구 둘이, 가끔은 혼자서 부르던 그 노래는 우리 삶의 소중한 조각이다. 노래방 마이크와 함께 한순간들은 진주같이 반짝였고 비타민처럼 보약도 되었다. 노래방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며 자영업자들의 고충이 얼마나 클지 공감해보았다.

"노래는 부르지 말고..." 목사님의 그 한마디 

나의 어린 시절, 마을에 없는 놀이터가 교회에는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에 가면 맛있는 간식을 주었다. 기독교 집안이든 아니든 방과 후 어린 자녀를 교회에 맡기는 것에 대하여 서로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사실 우리가 기독교가 무엇인지는 알았을까. 마을의 보육 기능을 하는 것이 교회 입장에서도 차세대 신도를 위한 투자이기도 했으리라.

목사님은 따뜻하셨다. 물론 나는 간식 시간을 제일 기다렸고 기도하기, 찬송 부르기, 성경 읽기도 좋았다. 그림 그리기 시간에는 예수님과 양 떼에 크레파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코흘리개 우리들을 모아놓고 상기된 얼굴로 중대 발표를 했다. 그날이 내 긴 터널의 시작일 줄이야.

"얘들아. 우리 찬송가 합창 대회에 나갈 거란다. 우리 열심히 해서 1등 하자."

목사님은 신앙심의 깊이만큼 상품을 바랐고, 동시에 이 대회는 시골 목사에게 '스펙'을 쌓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문제는 합창단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 마을의 아이들을 다 모아야 했다. 그것이 '음치'인 나를 단원에서 뺄 수 없는 목사님의 딜레마였다.

본격적인 노래 수업이 시작되었고 1등에서 멀어진다는 목사님의 불안도 함께 시작됐을 것이다. 열정적인 목사님이 속 타건 말건 눈치 없는 나는 천진난만했다. 친구들도 나의 나머지 공부를 개의치 않아 했다. 드디어 대회 전날. 목사님은 날 따로 부르셨다

"음, 내일 우리 같이 버스 타고 갈 건데... 있잖아, 무대 올라가면 노래를 부르지는 말고 입만 벙긋하는 거야. 할 수 있지?"

그때 알았다, 내가 필요 없는 존재란 것을.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으니 목사님의 바람대로 우리 팀은 1등을 했다. 교회 어디서도 보이는 곳에서 그 찬란한 트로피를 놓았다. 그 트로피는 언제나 눈이 부시게 빛났다. 합창단 해체 후 나는 예전과는 다르게 목이 메어 교회 간식을 먹은 것 같다. 영광과 야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 사건이 낙인이 된 것일까. 나의 립싱크는 계속되었고 국민학교 중학교 내내 음악 시간에 누구도 내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한 명씩 무반주로 노래하는 실기 시험날은 불주사 맞는 날보다 더 가기 싫었다. 음악 수업이 없는 고등학교가 차라리 살 만했다.

어쨌든 졸업도 했으니 노래 부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대학교 때 노래방이라는 신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내 차례가 다가오면 화장실 가는 척하며 그 순간을 겨우겨우 모면했다.
 
코로나로인한  노래방 폐업기사에 마음이 아프다.
▲ 노래방의 추억 코로나로인한 노래방 폐업기사에 마음이 아프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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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은 한반도를 점령했고 바야흐로 전 국민의 가수화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나의 직장 생활에서의 난관은 잦은 야근도 박봉도 아닌 늘 있는 회식이었다. 외로우셨나보다, 우리 부서장님은. 모든 부서원을 항상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노래방까지 끌고 다녔다. 나의 립싱크는 시즌2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대회 전날 그 목사님이 나에게 '괞찮으니까 맘껏 불러'라고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내 노래와 바꾼 그 트로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전국에 노래방이 창궐하니 마치 밤이 돼야 비로소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들처럼 음치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걸까. 음치클리닉이란 것이 생긴 것이었다. 구원받지 못한 형제들이여. 십자가 아닌 여기로 모일지어다. 그러나 위로도 희망도 한순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첫 수업, 선생님은 수강생 한 명씩 앞에 나와서 자기소개하고 노래 한 곡씩 하라는 게 아닌가. 태국에서 빙판길에 미끄러졌다는 얘기만큼 말이 안 됐다. 노래를 못해서 찾아온 건데 노래로 자기소개를 하라니. 전화 받는 척하며 나갔다. 나의 연기는 이제 김혜자도 울고 갈 지경이 됐다고 할까. 지하 주차장에서 수강료 환불을 구걸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떤 터널도 끝은 있는 법.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자발적 조기 은퇴를 실천했고 이제 조직 생활은 없으며 싫은 자리는 가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생각도 바뀌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괴로워했을까.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의 노래방 스트레스는 완전히 끝났다.

얼마 전부터 문득 그냥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맺힌 응어리를 풀겠다는 것도 아니고 음치를 극복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도 못 듣겠는 내 노래를 즐기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유튜브로 피아노를 독학하고 있다. 건반음과 내 노래는 지금도 서로 다른 산맥을 넘고 있지만 나는 흐뭇하다. 도전 자체에 뿌듯함이 있는 듯하다.

내 수준에 맞는 동요부터 근사한 연주곡까지 악보집을 만들었다. 동요계의 가요탑텐 '도깨비 나라'를 연주 한 날은 소고기를 기꺼이 먹었다. 악보 마지막 장 '캐논 연주곡'을 펼칠 날을 고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합창대회, #트로피, #노래방, #음치,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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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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