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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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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별세한 지 46년이 지난 1882년 고종은 내각에 지시하여 『여유당전서』는 전부 필사하여 내각에 수장케 하고, 순종은 1910년 7월 18일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 제학(정2품)"에 추증한데 이어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가 추종과 시호를 내림으로써 사후이지만 그에게 씌워졌던 누명을 공식적으로 벗게 되었다. 정약용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그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정약용 세계관이 대중화 기회를 얻지 못했던 역사적 원인을 간단히 해명할 차례이다. 정약용은 뛰어난 유학적 학식과 남다른 독창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유학에서의 독창성은 한국 유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황과 이이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들과는 달리 그가 한국 역사에 끼친 영향력과 명성은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된 원인이 분명하게 해명되어야 한다. (주석 6)
 
여유당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 여유당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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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와 뜻을 함께했던 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노론벽파가 한말에 이어 국치(조선병탄)에 가담하면서 식민통치기에도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해방 후 급속한 서구문화에 편입되었다.

"정약용의 메시지는 최근까지도 영속적인 추종자 집단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내외의 역사적 상황이 있었다. 일제에 의한 조선왕조의 패망과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계승발전 노력이 배제된 채 서구적 모델에 따른 근대화의 추구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주석 7)

그가 로마에서 태어났으면 레오나르드 다 빈치, 독일에서 살았으면 괴테에 못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이었다면 아담 스미스가 미치지 못했을 터인데,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반시대적 정파인 노론(벽파) 세력이 집권한 시대에 살면서 천재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였지만 욱일승천의 기세를 띤 영국과 서산낙일의 운명에 맡겨진 조선의 시대 상황 속에서 생존해야 했던 아담 스미스와 다산 정약용의 삶의 형식과 내용은 퍽 대조적이었다.

영국이 앞에 있는 목적지를 향해 힘껏 달리는 말이었다면 스미스는 거기에 채찍을 가하는 기수(騎手)에 비유될 수 있고, 조선이 난파 직전의 위기에 몰린 배였다면 다산은 영광스러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배 안의 감옥에 갇혀 있는 타수(舵手)에 비유될 수 있다. (주석 8)

 
다산 유적지 정약용 생가와 뒷동산 묘소
▲ 다산 유적지 정약용 생가와 뒷동산 묘소
ⓒ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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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을축년 7월 중남부 지방의 대홍수로 정약용의 고택 〈여유당〉이 떠내려갔으나, 천우신조로 현손 정규영이 유고를 구출해냄으로써 보존될 수 있었다. 

그의 저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한말의 언론인 장지연의 『황성신문』1899년 4월 17일자와 18일자의 논설에 「아국의 경제학 선생 정다산 약용 씨의 소술한 바를 적요하노라」라는 두 차례 논설에 의해서였다.

이 논설은 정약용의『여유당집』을 읽고, 다산이 효종의 대동법 개혁, 영조의 노비법ㆍ군포법ㆍ한림천법ㆍ균역법 개혁을 들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국정 전반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을 요약 해석한 것이다. 

이어서『황성신문』 1899년 8월 3일자와 4일자 논설에 「대한 경제선생 다산 정약용 씨의 소찬한 수령고속법(守令考續法)을 좌에 명기하노라」는 2회에 걸친 논설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서문ㆍ목차ㆍ내용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었다. (주석 9)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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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가장 먼저 정약용의 저술에 관심을 보인 이는 매천 황현이다.  

"다산이 저술한 책들은 하나도 간행된 것이 없고 개별적으로 서로 베껴 써서 책에 따라 각기 흘러다니고 있다. 『흠흠신서』, 『목민심서』의 경우 더욱 지방행정과 형사소송에 절실한 내용이기 때문에 비록 당론이 다른 가문의 사람이라도 보배로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매천야록』에 썼다. (주석 10)

정약용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1934년부터 언론인 정인보와 안재홍에 의해 모든 저서가 간행되어야 한다는 논의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38년 신조선사에서 두 사람의 교열로 『여유당전서』 76책이 간행되고, 1939년에는 최익한이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보완해서 '다산학'에 대해 본격 연구한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단행본을 간행함으로써 큰 기여를 하였다.


주석
6> 차성환, 『글로벌 시대 정약용세계관의 가능성과 한계』, 232~233쪽, 집문당, 2004. 
7> 앞의 책, 235쪽. 
8> 박흥기, 『다산 정약용과 아담 스미스』, 67쪽, 백산서당, 2012.
9> 신용하, 「19세기 말 장지연의 다산 정약용의 발굴」, 『한국학보』 제10집, 3쪽, 일지사, 2003, 봄.
10> 박석무, 앞의 책, 582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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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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