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삶은 우리 의지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사회라는 거대 구조 속에서 개인은 제도와 법, 규제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 때로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된 권위적 가치와 규범에 얽매인 채 살아간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틀에 갇혀 있는 삶에 질문하게 하는 책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권혁준 옮김, 문학동네, 2015)이다.
 
소송, 프란츠 카프카(지은이)
 소송, 프란츠 카프카(지은이)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서른 살 생일 아침, 느닷없이 '소송' 당했다는 통보를 받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는 무언가 착오가 있을 거라 확신하며 금세 진실은 밝혀지고 모든 게 한낱 헤프닝으로 끝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소송에 대한 심리가 시작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삶은 소송에 사로잡히고 만다.

은행의 간부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살아왔던 K는 소송에 대한 생각으로 일에서 마저 유능함을 잃는다. 숙부의 소개로 알게 된 변호사를 선임하고 은행 고객이 소개해준 화가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화가 티로렐리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은 법원에 속해" 있으며 법원은 한 번 판단하면 번복하는 일이 없고 무죄판결이 나는 사례 또한 전무하다. 변호사를 다섯이나 두고 몇 년 째 소송에 매달리고 있지만 변호사의 하녀가 내어준 방에 기거하는 상인 블로크의 모습은 암담할 지경이다.
 
"법원이 일단 고소를 제기하면 피고인의 죄를 확신하는 것이며, 법원이 그런 확신을 철회하게 만들기가 정말 어렵다는 겁니다." "어렵다고요?" 화가가 한 손을 공중으로 높이 쳐들면서 되물었다. "법원이 그런 확신을 철회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요. 내가 여기서 판사들을 캔버스에 모두 그려 넣고, 당신이 이 캔버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게 실제 법정에서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많을 겁니다." - 184 p

"수많은 소송 사건들을 중요한 단계에서 직접 방청했고, 볼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주의 깊게 봤어요. 그런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단 한 번도 실질적인 무죄 판결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 190p

마지막까지 요제프 K의 소송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법원의 실체 또한 드러나지 않는 이 소설에 독자는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심리가 진행되는 법정은 교외의 가난한 셋집들이 있는 곳이고 법원 사무처는 공기가 통하지 않는 다락방이다.

카프카가 묘사하는 '소송'과 '법원' 관련 장면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초현실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듯 보여진다. 하지만 요제프 K를 강제하는 '소송'의 흔적들은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면서 그의 실생활을 옥죈다. '법'과 '법원'은 절대권력처럼 그의 삶에 군림한다.

'소송'과 '체포'는 K로 하여금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은행 일과 일상을 병행하며 끝없이 반복되는 청원서 작성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소송에 몰두한다 해도 희망적인 결과는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K는 무력하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인다. 무죄에 대한 확신은 희미해지고 소송을 미루고 회피한다. 거부할 수 없는 죄가 있고 파멸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K는 알고 있었던 걸까.

소설에서 '법'과 '법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옮긴이 권혁준의 해설에 따르면 개인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한 전체주의적 지배체제에 대한 예견이거나 실재하는 현대의 사법 제도일 수 있다. 여러 권위에 의해 대표되는 가치와 규범의 내면화 또는 종교적 권위를 의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카프카는 유대교 신자로 <소송>은 유대교의 회개 기간 중 쓰여졌다).

이에 근거해 K의 죄도 유추해볼 수 있다. 부당한 권력과 체제에 복종하는 것 자체이거나 자신이 받아들인 가치나 규율, 절대적 권위에 따르지 못한 삶일 수 있다.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이나 종교적 의미의 '원죄'라 해석해볼 수도 있다.
 
"당신은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신부가 물었다. "처음에는 틀림없이 좋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K가 말했다. "지금은 때때로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 263p

'종말'에 이르면 K는 기다렸다는 듯 처형인들을 따라 나선다. 저항의 몸짓없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죽음 조차 그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개 같군!" 그는 외치며 '치욕'을 느낀다. 죄 없이 '소송'에 휘말리고 결국 '처형' 당하고 마는 K의 삶은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게 한다. 위선과 권위로 우리를 억누르는 사회 구조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삶, 그리고 끝내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로서, 우리 모두는 K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소송'은 인간 삶에 대한 탁월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는 권위적이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숙명적 한계를 지니고 살아간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죄의식을 생각하면 모두의 삶 자체가 자신의 정당성을 항변해야 하는 하나의 '소송'일 수 있다. 그 '소송'에서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끝없이 자신을 해명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 게 인간 아닐까.

새해를 맞으며 지인의 안타까운 부고를 전해 들었다.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으로 인한 급작스런 죽음이었다. 예고없는 생(生)의 마감이었다. '소송'으로 내려지는 '처형'이 현실에서는 더 가혹할 수 있다. 각자의 인생이라는 하나의 '소송' 속에 있는 우리는, 모두가 K다. 자기만의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항변할지, 오히려 '소송' 자체에 저항하며 삶을 개척해 나갈지에 대한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어디에도 수월한 삶은 없다. '소송'의 무게에 시달렸던 K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헤아려본다. 신화 속 시지프처럼 매일 그 앞으로 다시 굴러 떨어졌던 '소송'이라는 돌맹이를 K는 묵묵히 짊어지고 나아갔다. 그의 일그러진 뒷모습에 너와 나를 겹쳐본다. '소송'에 맞서 각자의 방식으로 한 발씩 내딛는 지금, 바로 이 순간만이 우리가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소송 (양장)

프란츠 카프카 (지은이), 권혁준 (옮긴이), 문학동네(2010)


태그:#소송, #프란츠카프카, #우리는모두K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은 목소리로 소소한 이야기를 합니다. 삶은 작고 작은 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