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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각) 워싱턴D.C.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성경을 들고 있는 이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각) 워싱턴D.C.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성경을 들고 있는 이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
ⓒ 연합뉴스=U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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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행정부 시기에도 한반도 평화협정을 향한 여정은 계속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처럼 '호쾌한' 대북 접촉이 일어나기는 쉽지 않겠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도 대담한 북미조약을 마음에 품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을 갖게 한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이니 '불량국가'니 '테러와의 전쟁'이니 하며 세계를 불안케 하던 시절, 민주당의 바이든 상원의원은 외교 전문가로서 공화당 정권의 자문에 응했다. 부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백악관을 찾아 가기도 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자주 만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북미 대화를 확대하고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방안도 고민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자서전인 <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 나의 삶, 신념, 정치> 제18장에서 "나는 외교위원회의 공화당 동료인 척 헤이글과 리처드 루거와 함께 이란과 북한과의 외교 대화를 넓히기 위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그녀(라이스)에게 계속해서 열심히 알려줬다"고 그는 회고한다.

같은 장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루거 상원의원과 나는 북한과 직접 접촉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며 "우리는 김정일이 핵무기 제조에 이용할 수 있는 더 많은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 불가침조약을 목표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바이든도 북미협상 확대와 불가침조약 체결을 생각한 적이 있지만, 지난 20일(현지 시각) 취임사에서 증명된 것처럼 그가 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은 국민통합과 코로나 방역이다. 또 지난 18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중국 및 러시아 억제가 바이든 행정부의 현안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중국을 최대 주적으로 설정했던 트럼프 행정부와 약간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 더불어 러시아에 대한 견제에도 주력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정들로 인해, 북한이 적극 나서지 않는다면 북미관계가 바이든의 관심 사항에서 뒤로 밀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이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도 만만치 않을 거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미국이 서둘렀던 평화협정

한국전쟁이 끝나고 68년이나 흘렀는데도 북미 평화협정은 이처럼 여전히 요원하지만, 이와 달리 베트남과 미국은 '느낌상' 꽤 수월하게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3년 만에 끝난 한국전쟁과 달리 베트남전쟁은 1960년부터 15년간이나 진행됐다. 전쟁 기간을 생각하면 '수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근 70년이 지나도록 평화협정이 나오지 않는 한국전쟁과 비교하면 그런 말이 지나치지 않을 수도 있다.

베트남 전쟁이 종식된 것은 1975년 4월이다. 그런데 베트남과 미국의 평화협정은 이보다 훨씬 전에 체결됐다. 파리평화협정으로 불리는 이 협정은 프랑스에서 1973년 1월 27일 체결되고 28일 발효됐다. 미국은 평화협정에 즈음해 종전선언을 발표하는 자국의 관행에 맞춰 가조인 다음날인 24일 종전을 이미 선언했었다.

그달 24일 발행된 <동아일보> 1면 톱기사는 "닉슨 미국 대통령은 23일 밤(한국 시간 24일 정오) 전쟁을 종결시키고 월남 및 동남아시아에 명예로운 평화를 가져오는 협정을 매듭지었다고 발표했다"며 종전선언의 핵심 내용을 소개했다.

하지만 종전선언과 함께 나온 평화협정은 북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을 종식시켰을 뿐, 베트남전쟁 자체를 끝내지는 못했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특유의 비밀외교로 인해 북베트남과 미국이 협정 체결을 주도한 것에 불만을 품은 남베트남은 협정 발효 다음날인 29일 군사공격을 재개했다. 이로 인해 재개된 전투는 1975년 4월 남베트남 붕괴와 전쟁 종식으로 귀결됐다.

평화협정 발효 뒤에도 전투가 계속됐다는 점은, 실제로는 평화협정이 체결될 상황이 아닌데도 미국이 서둘렀음을 보여준다. 계속되는 폭격(이른바 북폭)으로 인한 인명 손상에도 북베트남이 굴복하지 않는 데다가 세계적인 반전여론으로 자국이 위축되는 상황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였다.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파리평화협정은 한국전쟁 휴전협정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평화협정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북베트남과 미국의 대결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훗날 통일 베트남과 미국이 화해하고 수교하는 일이 그만큼 수월해질 수 있었다.

내용상으로는 5-0으로 끝났어야 할 축구 경기가 골 결정력 부족으로 1-0으로 끝나면, 먼 훗날에는 1-0이라는 스코어를 근거로 그 경기를 기억하기 쉬워진다. 파리평화협정도 비슷했다. 실질적으로는 베트남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됐다는 사실관계 자체가 갖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파리평화협정 22주년인 1995년 1월 27일 베트남과 미국이 연락사무소 개설에 합의하고 그해 7월 11일 국교 체결에 성공한 것은, 평화협정이 성사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갖는 '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에도 그런 '힘'이 내재돼 있었다. 협정 전문(서문)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한다고 했고, 부칙(제5조) 제62항은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 때까지 휴전이 유효할 거라고 선언함으로써 평화협정 체결을 예고했다.

이에 따라 1954년 4월 26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정치회의)이 결실을 맺어 평화협정이 성사됐다면, 한국인들이 그 후 오랫동안 평화협정을 고대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백악관 주인이 바뀔 때마다 미국 대통령들의 대북관(觀)을 확인하는 수고도 조금은 덜게 됐을 수 있다.

우리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남-북 정상, 군사분계선 사이에 두고 첫만남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27일 오전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첫 만남을 하고 있다.
 지난 2018 남북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처음으로 만난 모습.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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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사자들이 휴전 이상의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제네바 정치회담에서도 성과를 내지 못한 데는 베트남전쟁과 다른 한국전쟁만의 특수 사정이 작용했다.

우선, 전쟁의 승부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 1919년 베르사유 평화조약 체결이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평화조약은 승자와 패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한국전쟁에서는 명확치 않았다. 북한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휴전을 승전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제3자들의 눈에는 승부가 명확하지 않았다.

또 한국전쟁 당사자들이 마주앉아 평화를 이야기하기 힘든 사정도 있었다.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탓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사자들도 어느 정도는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한국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특히 심각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과 북한 정권을 공식 부인했다.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유엔총회 결의도 있었다. 남북한 역시 서로를 극단적으로 부정했다. 이로 인해 한국전 당사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평화협정에 서명하기 힘들었다. 베트남전 당사자들도 어느 정도는 서로를 부인했지만, 세계적인 반전 여론이 이들을 평화회담으로 밀어 넣은 측면도 있다. 이런 행운이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실질적 주역이 미국과 중국이었다는 점도 평화협정에 걸림돌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 베트남전쟁의 경우에는 전쟁의 실질적 주역인 미국과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반해 한국전쟁 당시의 미국과 중국은 전쟁을 끝내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한반도 평화에는 애착이 크지 않았다.

여기다가 제네바 정치회담의 핵심 의제가 한반도 통일이었다는 점도 의도치 않게 평화협정 체결에 지장을 초래했다. 남북의 인구 차이가 큰 상황에서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북한에 의해 수용될 가능성은 낮았다. 베트남 평화협정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분단된 상태에서도 체결됐다. 이에 비해 제네바 정치회담에서는 통일 문제가 핵심 의제가 됐고 여기서 나타난 이해관계 대립이 협정 체결을 방해했다.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한민족보다는 외세가 한반도 문제의 주역이 되고, 최종 의제에 치중하느라 현실적 이익을 놓친 것 등으로 인해 1950년대의 한반도 평화협정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 인한 불이익과 불안과 불편이 근 70년간 한민족을 옥죄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 출범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평화협정을 위한 한민족의 여정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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