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창덕궁의 정궁이다. 세종시대의 인정전은 조일전쟁 때 소실되었다. 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왜군이 입성하기 전 불탔다. 광해군 2년에 중건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소실되었다. 현존 건물은 순조4년(1804)에 복원한 것이다.
▲ 인정전. 창덕궁의 정궁이다. 세종시대의 인정전은 조일전쟁 때 소실되었다. 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왜군이 입성하기 전 불탔다. 광해군 2년에 중건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소실되었다. 현존 건물은 순조4년(1804)에 복원한 것이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조일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조명 연합군이 편성되고 휴정 휘하의 승군이 합세하여 평양성을 회복한 것을 시발로 전라감사 권률의 행주산성싸움, 김시민의 진주성싸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등이 이루어지면서 왜군은 차츰 전의를 잃었다. 

토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해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하고, 일부 병력을 부산에 남긴 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선조는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왔다. 경복궁은 불타고 없었다. 선조가 도망치듯 왕궁을 빠져나가자 분노한 백성들이 몰려가 불을 질렀던 것이다. 

허균은 스물여섯 살이 되는 1594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해 1월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정시문과는 초시ㆍ복시에 이은, 서생으로서는 마지막 시험으로 임금이 친히 보게 하는 과거였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선조는 인재를 찾고자 정시문과를 실시하고 허균이 급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왠일인지 관직을 내리지 않았다. 3년이 지난 159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문과중시는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골르고자 치르는 특별한 시험이었다. 장원한 허균의 능력이 새삼 평가되었다.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관련사진보기

 
허균은 전란으로 크게 어지러진 나라를 바로 잡고자 거듭 과거를 치렀다. 스물여섯 살에 문과중시의 장원이었으나 그동안 과거공부는 뒷전이고 폭넓은 학문을 해왔기에 그의 능력으로 보아 다소 늦은 급제였다.

그에게 관계진출은 유학자로서는 피할 수 없는 사회참여의 길이다. 유학자가 급제하고 벼슬하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하다. 또 아무리 양반이라도 3대에 걸쳐 벼슬하지 못하면 평민으로 전락한다. 

처음 주어진 벼슬은 승문원(承文院) 사관이었다. 외교에 관계되는 문서를 맡아보는 일이다.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도와주면서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는 국운을 좌우할 정도의 막중한 업무였다. 선조는 허균의 능력(문장력)을 알았고, 또한 그의 큰형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올린 정확한 정세 보고서를 외면하면서 왜란을 막지 못한 자책감도 작동했을 터이다. 

허균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당나라에 다시 원병을 요청하고자 종사관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첫 연행길이었다. 이때 지은 「압록강을 건너며」라는 시에 소회가 담겼다.

 압록강을 건너며

 오늘은 길일이라
 내 수레는 떠날 차비 마쳤네.
 관료들 어지러이 모여들어 
 강가에서 앞길을 빌어 주네.
 긴 강에는 연이은 배 가득하고 
 피리소리 북소리엔 슬픔이 흐르네.
 벗이여 술잔을 비우게나 
 사랑하는 이들과 오늘로 이별이니. 
 앞길은 얼마나 아득한가 
 연경(燕京) 가는 길 멀기도 하지.
 대장부는 먼 길 떠나는 게 귀하다지만 
 아녀자는 이별이 마음 아플 뿐.
 사공이 일어나 노를 저으니
 순식간에 벌써 강을 건너네.
 고개 돌려 오래된 장성(長城) 바라보니
 어둔 기운이 담장에 잠겼어라.
 해 떨어져 변방은 캄캄하고
 밤 깊어 나그네는 배가 고프네.
 그래도 아름다운 고향의 달이
 만 리 먼 길 내 뒤를 따라왔구나. (주석 1)


연경행이 성공적이었던지 이듬해 선조는 그를 병조좌랑에 임명했다. 병조(兵曹)는 6조의 하나로 수도(서울)의 경비에 관한 일을 맡는 관청이다. 좌랑(佐郞)은 정5품 벼슬로 정랑(正郞)를 돕는 역할을 했다. 우두머리는 병조판서로 오늘의 국방장관이다. 

1년여 만에 황해도 도사(都事)로 바뀌었다. 주로 관리들의 감찰과 규탄을 맡아보는 자리다. 정5품이지만 공직자들을 감사하는 자리여서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사단이 벌어졌다. 급속한 출세 때문이었는지, 분방한 성품 탓인지, 부임 6개월 만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서울의 기녀들을 관아 별실에 끌어들여 놀아나고 시중의 무뢰배들을 드나들게 하여 관청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 탄핵의 내용이었다. 그의 임관과 해임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첫 번째 겪게 된 시련이다.


주석
1> 정길수, 앞의 책, 19~2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