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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파크 미래청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나영
 혁신파크 미래청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나영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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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는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힘을 많이 받아요."

활동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전쟁 같은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데 도망가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여기'라고 느끼다니, 신기하다. 그들은 왜 한결같이 '투쟁현장'에 있을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힘을 받는다고 할까.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한 활동가 인터뷰가 어느새 열네 번째가 되었다. 모두 치열하고 역동적으로 살고 있었다. 두세 시간의 인터뷰로 그들의 삶을 다 풀어낼 수 없지만 '잠시나마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는 말을 들으면 (정리하느라) 머리를 쥐어뜯다가도 힘이 솟는다. 이 맛에 활동가를 만나 인터뷰를 한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슬슬 가고 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깬다는 '경칩'이 코앞에 다가온 지난 2월 26일,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center for Sexual rigHts And Reproductive justicE)의 대표인 나영을 혁신파크에서 만났다. 

낙태죄가 한창 사회적 이슈로 제기됐던 지난 2010년, 여성의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존중으로 논쟁이 흘렀다. 논쟁 중에 장애인 여성은 '생명권 vs 선택권'의 프레임으로 논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다. '모자보건법'에 따르면 유전학적 장애나 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셰어는 기존의 낙태죄 논쟁에서 벗어나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에 대한 담론까지 함께 논의하고자 했고, 문제의식을 이어나가기 위해 만든 단체다.

나영은 여성 운동뿐 아니라 성소수자 운동, 장애인 운동, 이주민/난민 운동 등 어떤 투쟁의 현장이든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사람이다. 3월이면 어김없이 '여성의 날'이 오니 그가 생각났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남다른 통찰력 가져"
 
2020년 10월 낙태죄 관련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안 좋은 내용으로 나오자,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년 10월 낙태죄 관련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안 좋은 내용으로 나오자,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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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31일 낙태죄 폐지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온 날, 헌법재판소 앞에서 감격을 나누면서 춤을 췄어요. 이날은 좋은 결과 때문에 춤추고 웃었지만 꼭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 요구하고 바꾸려고 소리치는 그 현장에서 힘을 많이 받아요.

사람들은 싸우는 사람들을 불쌍하고 힘든 사람들로 생각해요. 그렇지만 차별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쫓겨난 사람,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회에서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투쟁현장이에요.

최근에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 걷는 희망뚜벅이를 진행할 때도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  LG트윈타워 빌딩 청소 노동자, 김진숙님이 같이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거든요. 세 분이 말씀하시는 거 들으면서 힘을 많이 받았어요.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9명 이내에서만 집회를 할 수 있거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에너지를 못 받아서 힘들었어요(웃음)."


때론 지치고 힘들어도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고, 싸움의 결과가 좋게 나왔을 때 활동가는 가장 보람을 느낀다. 지난날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그 순간만큼은 마음껏 환희를 누린다. 그래야만 충전이 되니까. 그리고 다시 뚜벅뚜벅 걸어간다. 

나영을 처음 만난 건, 2014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etwork for Glocal Activism: NGA는 성, 노동, 생태, 인종의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구지역적인 문제를 네트워크를 통한 운동으로 대응하고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는 단체다. 중국, 멕시코, 남아공, 한국의 글로컬 포인트(GP)들이 페미니즘 학교, 액티비즘 센터를 만들어 활동한다)의 후원주점에서였다.

지인의 초대로 후원행사에 갔다가 그곳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나영과 인연을 맺었다. 많은 사람이 들고 났던 자리라 무척 정신없고 피곤했을 텐데 뒤풀이까지 여유있고 침착하게 잘 마무리하는 나영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나영은 학창시절부터 모임을 만들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전교조 세대라서 각종 학생회 활동을 많이 했다. 

"너무 공적인 메시지에 압도되지 않기로"

"이런저런 일을 많이 벌리는 성격이었어요.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았고, 잘 놀고. 고등학교 때는 야간자율학습 빼먹고 콘서트도 많이 다녔어요. 주로 락(rock) 콘서트 이런 거(웃음).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활동가로 살기로 했죠. 원래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밴드를 하고 싶었는데 음악적 재능이 없어서 포기했어요. (잘 못 치지만) 기타 치는 걸 좋아해요. 

대학에 갔더니 재단 문제로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제가 1학년 때 비리로 쫓겨났던 재단 이사장이 4학년 때 다시 돌아올 준비를 하는거예요. 구 재단과 싸우기 위해 졸업을 1년 미루고 총학생회장을 했어요. 1년 동안 수업거부, 총장실과 행정동 점거, 삭발, 혈서, 단식, 거리집회 등 온갖 싸움을 한 끝에 구 재단 이사장의 복귀를 막아냈어요. 그 이후에 건강에 크게 타격을 입었어요. 공황장애가 왔거든요. 건강을 회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학교와 싸운 나영은 아직도 후유증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의사는 나영에게 '이렇게 살다가 언제 어디서 객사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을 정도다. 몸의 회복을 위해 심리치료를 받고 뜸을 뜨고 요가를 시작했다.

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문화연대'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 문화연대는 문화예술인들이나 문화예술 관련 연구자들이 많이 모인 단체다. 거기서 문화교육위원회 활동을 하고 2010년 8월부터 2019년 2월까지 NGA에서 활동했다. 

"활동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관계가 힘들거나 소진이 왔을 때는 여행을 가거나 공부를 해요. 세미나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막막하고 지쳤을 때도 새로운 방향을 찾게 돼요. 최근에 한 가지 결심을 했어요. 너무 공적인 메시지에 압도되지 않기로. 약간의 거리두기를 하려고요. 의무감 때문에 조직의 상황에 맞추려는 생각을 안 하기로 했어요. 올해 세운 계획 중의 하나가 '사적인 자아에 좀 더 충실하자'예요. 

(꾸준히 한 것은 아니지만) 요가를 한 지 17년 정도 됐어요. 요가가 좋은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도 있지만 깊고 길게 호흡하게 되거든요. 활동하면서 생긴 긴장감과 불안함을 다스리기 위해 수시로 요가의 호흡법을 떠올리며 연습하고 있어요."
 

"차별과 혐오, 폭력을 겪지 않도록 함께 나서주셔야"

나영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자신이 이성이 아닌 동성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민은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계속됐고 4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인의 성 정체성을 인정할 수 있었다. 

"2016년도에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했어요. 엄마도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저에게 확인 하지 않았어요. 저도 말을 못 하다가 카톡으로 긴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편지를 받고 6개월 정도 아무런 연락도 없으시다가 그해 겨울에 제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어요. 패딩을 두 개 사가지고 오셨더라고요.

그날 처음으로 엄마에게 모든 걸 얘기 했어요. 여전히 엄마는 결혼하라는 말씀을 하시지만 그 전보다 훨씬 관계가 좋아졌어요. 15년째 같이 살고 있는 제 파트너를 좋아하시기도 하고요.  

재작년에 파트너가 발에 약간 큰 종양이 있어서 수술을 할 때였어요. 수술 동의서를 받아야 했는데 보호자 사인을 할 때 병원에서 안 받아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했어요. 제가 열심히 설명했더니 병원에서 무리 없이 진행을 할 수 있게 해주었어요.같은 병실에 있던 분들은 환자와 저의 관계를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웃음).

앞으로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에 더 많이 부딪히겠죠. 그때를 대비해서 돌봄관계를 제도적으로 어떻게 만들어갈지 고민하고 있어요."


성소수자 당사자의 경험을 털어놓던 나영은 얼굴이 굳어졌다. 최근 연이어 발생한 트렌스젠더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추모조차 할 수 없는 성소수자의 죽음이 많아요. 부모님한테 커밍아웃도 못하고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대통령도 그랬고,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사람도 동성애자를 반대한다는 말을 했죠.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 인권을 개별적인 취향으로 인정할 거냐 말 거냐로 생각해요. 하지만 이것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문제거든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정과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심각한 폭력을 겪기도 해요. 특히 트랜스젠더는 제도적인 차별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요.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어요. 

'나는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당신이 광장에 나오는 건 보기 싫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에요. 자신의 옆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차별과 혐오, 폭력을 겪지 않도록 함께 나서주셔야 해요."


"단체에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활동 못할 때 제일 답답"
 
2019년 가을, 교회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있는 나영
 2019년 가을, 교회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있는 나영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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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의 인터뷰를 정리하던 3월 3일, 트렌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가 자택에서 숨졌다는 보도를 접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불과 1주일 간격으로 두 명의 트렌스젠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로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당황스런 비보였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개인의 성정체성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로 판단하고 있다. 변화의 더딤을 곳곳에서 확인할 때마다 숨이 막힌다.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으로 충분했던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요(웃음). 일찍부터 동생들이랑 할아버지의 돌봄을 하면서 살았고. 활동을 계속 했기 때문에 활동비 수준에 맞춰서 살아요. 뭔가를 갖고 싶은 욕구가 별로 없어요. 예전에 활동비가 너무 적을 때는 학원 강사, 편의점 아르바이트, 녹취록 정리 등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활동비 외에 강의료나 원고료 수입이 있어서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않아요.

너무 운동권 같은 말인데, 정말 돈이 없어서 힘들다고 생각했을 때는 하고 싶은 활동이 있는데 단체에 돈이 없어서 못할 때죠. 그럴 때 제일 답답하고 속상했어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오랫동안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계신 엄마를 좀 더 안전하고 편리한 주거공간에 모시고 싶어요. 

활동가로서의 삶을 멈출 생각은 없지만 만약에 그만두는 날이 오면 한적한 곳에 가서 요가 하고 주위 사람들과 책 읽으며 살고 싶어요. 그런데 분명히 거기서도 뭔가 일을 벌이고 투쟁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웃음)." 


인터뷰가 끝나고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지만 나영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홀연히 떠났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읽고 싶은 책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시대의 창(2018)."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서울 청각장애인 문자통역지원 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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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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