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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회 미얀마 민주화 시위 지지 영상
ⓒ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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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서 민망한 고백이지만, 이따금 아이들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그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교실에서 배운 수험용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그들의 감각과 재능에 깜짝 놀랄 때도 많다.

매번 눈치를 보며 잇속만 차리는 영악한 아이들도 많지만, 옳다고 믿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저러다 마음에 생채기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스럽긴 해도 가로막진 않는다. 넘어져도 그 한 번의 경험이 백 번의 수업보다 낫다는 확신 때문이다.

섣부르지만, 난 아이들의 성품이 타고나는 것이라 믿는 편이다. 학교에서 쌍둥이 형제를 여럿 만났지만, 성격이 비슷한 경우보다 상극이라고 할 만큼 다른 경우가 훨씬 많았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같은 초중고를 다녔는데도 그러하다면 자라온 환경을 탓할 순 없지 않나.

영어 잘하는 아이가 수학도, 과학도, 심지어 음악과 미술, 체육도 잘하지만, 성품은 교과 성적과 비례하지 않는다. 성적은 경제적 여건과 학군 등 주위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만, 성품과는 별개다. 별개이기는커녕 경험상 성적과 성품이 반비례하는 경우를 더 자주 봤다.

여전히 학교는 착한 아이들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더 호의적이다. 학교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의 성적을 끌어올려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다. 참으로 민망한 정의지만,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현실이 됐다. 학교에선 공부 잘하는 게 '장땡'이다.

선수를 키우는 곳으로 가지 왜 인문계고로 왔느냐며 친구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축구광인 준석(이하 모두 가명)이. 영상을 편집하는 기술이 전문가 뺨치는 근욱이. 기타부터 드럼까지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자타공인 음악 신동 성준이. 이들에겐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사지만, 수업 시간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학교는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축구를 잘하면 유소년 클럽을 운영하는 학교로 가고, 영상 편집이나 음악에 흥미가 있으면 예술고로 진학하지 그랬냐며 눙칠 뿐이다.

기성세대의 편견

호기심이든 실력이든 특출나지 않고 어중간하다면 이도 저도 안 되는 곳이 우리 학교 교육의 현실이다. 그 아이들도 교사들도 인문계고에 온 이상 오로지 대입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는 걸 선선히 수긍하고 있다. 남다른 재능은 대학에 간 뒤 발현하라고 종용하는 셈이다.

그들이 부모와 교사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충고'가 있단다. 사는 곳도, 학급도, 재능도 다 다른데,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들어왔고, 교사가 된 지금 반면교사 삼고 있는 이야기여서다.

"공 차는 것만큼(영상 편집하는 것만큼, 악기 다루는 것만큼) 공부를 해라."

기성세대의 편견은 여전히 강고하다. 축구와 영상 편집, 악기 연주 등은 공부와 비교될 수 없는 '하찮은' 재능이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능력인데도 학교에선 무시당하기 일쑤다. 체육대회나 축제 때 잠깐 반짝하고 마는 처지다.

공부하는 것만큼 축구를 하라거나, 공부하는 것만큼 악기 연습을 하라고 말하는 부모와 교사는 없다. 초중고 모든 학교가 대학 진학을 위한 훈련소로 전락한 상황에서, 오로지 교과 성적에 목매달 수밖에 없다. 교육과정 속 동아리 활동만이 잠시 그들의 숨통을 틔워줄 뿐이다.

그나마 그런 재능들은 하찮게 여겨질지언정 친구들의 부러움이라도 사지만, 정의감이나 의협심 같은 건 조롱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짐짓 잘난 척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지내다 보면 정의로운 아이와 정의로운 척하는 아이는 쉽게 구분이 된다.

공부는 못해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한 아이가 분명 있다. 그들은 말하기보다 듣는 것에 익숙하고,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민다. 대입을 앞둔 수험생이라도 자신의 금쪽같은 시간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줄 아는, 진짜 '모범생'이다.

교사들의 착각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회 미얀마 민주화 시위 지지 영상의 한 장면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회 미얀마 민주화 시위 지지 영상의 한 장면
ⓒ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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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학생회 아이들을 자랑하고 싶어 멀리도 돌아왔다. 솔직히 작년 학생회장 선거 결과를 받아들고 담당 교사로서 적잖이 당황했다.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 예상했던 아이는 떨어지고, 득표율에서 꼴찌를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이가 외려 큰 표 차로 당선되었다.

그가 내건 공약이 조금은 황당했고, 하다못해 만든 선거 홍보물조차 성의가 부족해 보였다. 졸업을 앞둔 고3의 장난기 섞인 투표가 당락을 결정한 모양새여서, 할 수만 있다면 선거 자체를 무효로 처리하고 싶었다. 동료 교사들도 의외의 결과라며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에 대해서 아는 건 없었다. 수업 시간에 만난 적도 없고, 친구들로부터 그에 대한 평판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저 학생회장 선거에 나선 이유와 교과 성적이 그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홍보물에 붙인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긴 동급생이었던 다른 후보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무난한 당선과 낙선을 예상했던 근거는 교과 성적에 눈길이 쏠렸기 때문이다. 후보자 간 성적 격차는 선거를 지켜보는 교사들의 주목도에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교사로서 깊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학생회 일도 잘하고 친구들의 지지도 받을 거라는 생각은 교사들의 착각이었던 셈이다. 학생회장이 된 그는 함께 일할 부장단을 꾸렸고, 코로나 와중에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수시로 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량을 발휘했다. 담당 교사와의 '케미'도 예상외로 좋았다.

모두가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는 학생회실을 지켰다. 유난히 행사가 많은 학교라 힘들 법도 하건만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가 학생회실과 방송실, 강당, 교무실 등을 수시로 오가다 보니, 일과 중에 그와 열 번도 더 마주친 날도 있다.

미얀마 시민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지난달 5.18 즈음, 매일 방과 후에 학생회가 무척 분주해 보인다 싶더니 영상 작품 하나를 들고 왔다. 학교에 아무런 도움을 청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고 소품도 준비하고 직접 연기도 한 6분짜리 영상이다.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뜻을 모았다고 했다.

일전에 학생회장이 미얀마 민주화 시위 응원을 위한 티셔츠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미 그때 영상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하다. 응원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학생회 아이들은 당분간 교복 대신 이 티셔츠를 입은 채 지낼 예정이라고 했다.

영상을 보고 좀 울컥했다. 미얀마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연기일지언정 하나같이 진지한 그들의 표정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여태껏 이해타산적이고 삭막하다고 싸잡아 나무라왔는데, 그릇된 편견이었음을 반성하게 됐다.

제작에 참여한 학생 중엔 얼마 전 급식소에서 내게 버릇없다고 혼쭐이 난 아이도 있다. 당시 그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 하나의 행동으로 되바라진 아이라고 단정했던 게으른 생활지도 관성을 또한 반성했다. 나중에 오가며 그를 마주치게 되면 '하이 파이브'를 건넬 것이다.

그들이 만든 영상을 반복해 보면서 '교육은 기다림'이라는 금언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함부로 아이를 판단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계기가 됐다. 한낱 계량화한 성적 따위로 아이들을 품평하려는 건 야만적이다. 연재의 제목처럼 '아이들은 나의 스승'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부디 학생회 아이들의 정성이 담긴 이 영상이 온갖 고통을 겪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오늘도 가방에 '세 손가락 배지'를 달고, 'Everything will be OK!'(다 잘 될 거야)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태그:#미얀마_민주화 시위, #학생회, #5.18민주화운동, #인권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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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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