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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김응태 지사의 장남 김정일 할아버지. 그가 김응태 지사에게 수여된 표창장과 훈장을 보여주고 있다.
ⓒ 최유림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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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조국독립의 큰 뜻을 품고 활동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랑스럽지만, 모진 고초만 겪다 돌아가신 것 같아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김정일 옹(96)의 아버지 김응태 지사(1900~1957)는 지난 3.1절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서훈(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김정일 옹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독립운동 역사를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다. 그가 오랜시간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아버지의 비밀을 밝힌 것은 2018년경이다.

인천시의원을 지낸 사위(이한구)에게 아버지의 독립운동이야기를 알리면서, 김응태 지사의 독립운동 활동사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김정일 옹과의 인터뷰는 김응태 지사를 처음 발굴해 소개한 이설야 시인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이설야 시인은 인천을 소재로 한 다양한 시작(詩作)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 명예 회복되면 여한이 없겠다"

김응태 지사는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인천 신흥동에 있던 가등정미소(加藤精米所)에 다니면서, 가등정미소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적 노동환경에 맞서 싸웠다.

"아버지 김응태 지사가 가등정미소에 다닐때 서울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파고다공원을 직장동료들과 다녀왔는데 어떤 놈이 밀고를 했대요. 일본경찰들이 매일 직장에 와서 서너명 끌어내 매로 두들겨 패고 괴롭혔나봐요. 그때부터 일본 경찰이 아버지를 감시하기 시작한 거지요."

김응태 지사는 가등정미소에서 정미기계를 수리하는 철공반에서 일했다. 그는 가등정미소의 열악한 노동현장과, 부당한 처우에 분노해 1930년 1월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파업을 주도했고 이로 인해 감옥에서 10개월을 살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본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됐다.
 
 인천
 김응태 지사. 김응태 지사는 가등정미소의 정미기계를 수리하는 철공반에서 일하면서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해 파업을 주도했고, 인천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김 지사는 지난 3.1절에 대통령표창(서훈)을 받았다.
ⓒ 아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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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동에 있었던 가등정미소 모습. 가등정미소는 인천에서 규모가 큰 정미소 중의 하나였다. 가등정미소에서는 가혹한 노동탄압에 맞서 크고작은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 아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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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태 지사는 답동 소공원 밑에 살았다. 한국인 마을과 일본인 동네는 길 하나 사이로 마주했다. 일본 경찰은 툭하면 집에 찾아와 "김상 있으까, 김응태 어디갔어" 하면서 아버지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다.

"아버지는 툭하면 일본경찰에 끌려갔지만 절대 고분고분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일본 놈들이 심리전을 써서 아버지를 더 괴롭힌 것 같습니다."

김정일 옹은 당시 일본 경찰들이 한국인들에게 했던 못된 짓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일본 순경들은 한국사람들이 지나가면 일부러 불러 세워놓고 무조건 발로 걷어차거나, 따귀를 때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순사들은 칼을 차고, 일본 형사들은 홀태바지를 입었는데, 한국사람들은 먼저 알아보고 피해 다녔다고 한다.

김응태 지사는 감옥에서 나왔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로 취직이 어려웠다. 운좋게 취직을 해도 일본경찰이 어떻게든 알아내 금방 쫓겨나야 했다.

아버지 김응태 지사가 취직을 할 수 없자 집안은 빈곤했다. 김정일 옹의 어머니는 고모가 하는 식당일을 거들며 아버지 대신 가정을 보살폈다.

일본의 압제에 맞서며 조국독립의 뜻을 늘 가슴속에 담고 있었던 김응태 지사는 애국지사들과 자주 어울렸다. 송씨와 윤씨라 불렸던 독립운동가들이다. 김정일 옹은 아버지가 이 사람들과 술집이나 밥집 구석에 모여 자주 토론을 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을 자주 보았다고 구술했다.

김응태 지사는 일본인들 때문에 '장물아비' 누명을 쓰고 곤혹을 치른 일도 있었다. 김 지사는 취직이 안되자 가족들의 도움으로 신포동에서 고물상을 차렸다. 그때 일본사람이 맡긴 물건이 남의 물건을 훔쳐서 판 거라는 장물누명을 쓰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에 가서 항의하고, 증거를 대도 소용없었다. 김 지사는 다시 1년 6개월간 억울한 형무소 생활을 해야 했다. 김정일 옹의 눈에 비친 아버지 김응태 지사는 식민지 조국에서 제대로 뜻을 펴지도 못하고 고난만 겪는 사람으로 비쳐졌다.

김응태 지사는 장물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나온 뒤 갑자기 병에 걸렸다. 잦은 투옥과 고문으로 몸은 망가져 있었다. 그는 풍을 맞았고, 5~6년 정도 누워있다가 1957년 갑자기 임종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된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불쌍해서 눈물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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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옹이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 최유림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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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 장남 김정일의 고단했던 삶

김정일 옹의 삶은 궁핍하고 힘들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그렇듯 그 역시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김정일 옹은 박문초등학교와 인천공립상업보습야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나왔다. 곤궁한 가정형편 때문에 제때 수업료를 낸 적이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가족들의 삶도 힘들었고, 일본경찰들에 의해 감시받고 쫓기는 삶의 연속이었다.

김정일 옹의 삶은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했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려서부터 가장의 역할을 짊어져야 했다. 그는 인천공립상업보습야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인천의 곡물중개업소인 삼성상회에서 일했고, 서점도 운영했다.

김정일 옹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당시 역사의 혼란기속으로 뒤엉켜 들어가 많은 곤혹을 치렀다. 해방정국과 6.25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좌익과 우익의 단체에 참여하기도 했고 국군방위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사나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김정일 옹은 부산에서 18년간 살았다. 부산에서는 슈퍼를 운영했고 병원에서도 근무했다. 고향인 인천은 1978년 경에 다시 돌아왔다. 인천에서는 가족의 만류에도 덤프트럭에 손을 대 돈을 날렸고, 학교 경비로도 일했다. 고되고 힘든 삶이었지만 독립유공자 후손의 자긍과 자부심을 잊지 않았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김정일 옹의 삶은 인천의 역사와 같다. 그는 70, 80년 전 신흥동, 답동의 모습을 머릿속에 훤히 그리고 있다. 답동공원 옆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간장공장, 유명한 냉면집 사정옥 배달원들의 배달묘기 등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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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동에 위치했던 유명한 냉면집 사정옥. 이 집의 냉면 배달부들이 자전거를 타고 묘기를 부리듯 냉면을 배달하는 모습을 김정일 할아버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 아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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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옹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아버지의 독립운동 역사를 밝혔지만 그의 삶이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아버지의 서훈 수여로 가족들은 독립운동 유공자 자손에게 주는 약간의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게 전부다.

100년 가까이 살아온 김정일 옹에게는 한가지 소원이 있다. 늙은 아비를 부양하고 살고 있는 딸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김정일 옹은 9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고 기억력도 좋다. 인천의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한 그의 인천 이야기는 정리해 남겨야 할 귀중한 자료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최유림 자유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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