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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아름답다는 석등을 만나다.
▲ 진구사지 석등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아름답다는 석등을 만나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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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가 많은 해에 농사가 풍년이라는 속담이 있다. 번개가 공기 중의 질소를 이온화하여 비가 오면 천연 비료가 내려오는 셈이다. 올해는 벼농사가 대풍일 거라고 한다. 벼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는 입추 절기인 8월 7일에 전라북도 임실군 진구사지 석등을 찾아갔다.

17번 국도가 호남정맥 슬치를 남동쪽으로 넘으면 섬진강 상류에 사선대의 고장 임실 관촌이다. 관촌역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신평면 들녘의 여름 풍경을 지나간다. 신평면 소재지를 통과하여 745번 도로 '석등슬치로'에 진입하면 신평면 용암리 북창마을의 진구사지에 도착한다.

진구사지(珍丘寺址)는 섬진강 상류 감입곡류 하천의 물돌이동 형태 구릉지에 아늑하게 터를 잡았다. 불전(佛殿)도 없고 석탑도 없는 폐허 된 사찰 터에, 석등이 홀로 마을 집 지붕보다 높게 우뚝 서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이슬 함초롬히 머금고 연못의 연꽃처럼 생기롭고 의연하다. 예로부터 광명석등(光明石燈)으로 불렸다.

이 석등은 조성 연대가 9세기 후반이다. 1100년이 넘는 풍상을 이기고 화강암에 섬세하게 조각된 단아한 연꽃을 피우고 있으며, 연꽃 향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는 듯하다. 이 석등이 폐허 된 사찰 터에서 6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이만큼 스스로 보존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진구사지 석등(보물 267호)은 높이가 5m가 넘는 큰 규모다. 석등의 상하 부위가 8각의 전통 양식을 따랐으며 고복형(鼓腹形) 간주석 석등의 개성을 잘 나타냈다. 하대석과 옥개석에 귀꽃이 강조되었다. 상하대석과 옥개석에 앙련 복련 등 연화문이 화려하다. 이 석등은 상륜부 일부가 없어졌을 뿐 대체로 온전한 모습이다. 이 석등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한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과 양식이 유사한 고복형 석등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111호)과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35호) 등이 있다. 석등의 높이가 5m 넘게 큰 규모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실상사 석등과 진구사지 석등으로 3개다.
  
좌로부터 화엄사 각황전 앞, 진구사지, 실상사 석등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2001년), 석등조사보고서Ⅱ
▲ 석등 측면도 비교 좌로부터 화엄사 각황전 앞, 진구사지, 실상사 석등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2001년), 석등조사보고서Ⅱ
ⓒ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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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2001년), 석등조사보고서Ⅱ의 석등 제원표에서 석등의 대석 화사석 옥개석 상륜부 등 각 부재(部材)의 높이를 찾아서 계산해 보면,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614.8cm, 실상사 석등은 504.5cm이다. 진구사지 석등은 노반 앙화까지 506.7cm다. 이 책자에서 세 석등의 각각의 측면도를 복사하여 비례에 맞추어 함께 비교해 보았다. 좌측에서부터 화엄사 각황전 앞, 진구사지, 실상사 석등이다.

화엄사 앞 석등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이고, 진구사지 석등은 두 번째로 큰 것이라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 세 석등을 비교한 사진을 보면 진구사지 석등이 상륜부가 완전했다면, 제일 클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진구사지 석등 상부까지의 부재를 기준으로 세 석등을 비교하면 진구사지 석등이 가장 크다. 석등의 조각 수법도 진구사지 석등이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이나 실상사 석등보다 섬세하고 화려한 자태로 보인다.
 
석등의 화사석은 8면 8창이고, 옥개석이 올려 보인다.
▲ 진구사지 석등 화사석 석등의 화사석은 8면 8창이고, 옥개석이 올려 보인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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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사지 석등에서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의 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석등이 있는 진구사가 불전과 석탑 등 사찰로서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던 신라나 고려 시대에는 얼마나 규모가 큰 사찰이었을지 상상해 본다. 현재 이곳 진구사지가 있는 신평면 용암리 북창마을 전부가 당시에는 모두 사찰 권역이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7세기 중반에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한 보덕 화상의 제자 적멸과 의융이 창건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인 9세기 후반에 남원 실상산문 출신인 관휴(款休)가 중창하였다. 이때 실상사 석등 양식인 고복형 석등을 이 사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은 고려 시대에는 왕자가 주지로 주석하기도 하였고, 권문세족 가문의 정권 실력자의 비호를 받기도 한 큰 사찰이었다.

이 사찰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는, 임실 관아의 관리들도 이 사찰에 출입하기를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세력 있던 사찰의 화려함 뒷면에 승려들의 부패와 횡포, 여기에 비례하는 백성들의 원성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고복형 간주석으로 안정감 있게 상대석, 옥개석과 상륜부의 하중을 받치고 있다.
▲ 진구사지 석등 간주석 고복형 간주석으로 안정감 있게 상대석, 옥개석과 상륜부의 하중을 받치고 있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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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사는 원래 지금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진구사는 고구려 승려들이 백제로 망명하여 세운 사찰이다. 익산 금마 지역에 존재했던 고구려 유민이 세운 보덕국(報德國)의 중요한 사찰이었고, 보덕국이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신라에 의해 평정되면서 진구사가 폐찰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섬진강 변 현재의 위치에 진구사가 중창되었고 9세기 후반에 이르러 진구사지 석등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대몽 항쟁기에 진구사가 다시 파괴되었고 권문세족에 의해 다시 중창된다. 조선 시대 태종 때는 자복사(資福寺) 88개의 비보 사찰 중에 속했으나, 세종 때에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전국에 36개 사찰만 남길 때 결국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진구사라는 이름이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 이 자리에 중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폐허된 터에 석등만 남아 있는 곳에 1920년대에 중기사가 중건되었다. 진구사지에 문화재 발굴 조사를 하면서, 중기사는 진구사지 외곽으로 이전했다. 이렇게 천년 사찰 진구사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굽이굽이 파란의 과정을 겪어왔다.

이 사찰 부지에 1992년부터 몇 차례에 걸친 문화재 발굴 조사가 있었고 1998년에 진구사(珍丘寺)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구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진구사와 진구사지라는 이름도 되찾았다. 그 이전에는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용암리사지 석등이라고 했다. 지금도 어떤 지명 검색 앱은 '용암리 석등'으로 검색해야 나온다. 이제 진구사지 석등도 제 이름을 찾았으니, 석등의 가치도 격에 맞게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대석에 복련 무늬가 선명하고 귀꽃이 큼직하다.
▲ 진구사지 석등 하대석 하대석에 복련 무늬가 선명하고 귀꽃이 큼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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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사지 석등은 이 사찰이 융성할 때 몇백 년 동안 화사(火舍)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석등의 화사 팔면 창마다 비단으로 장식된 격자창에 불빛이 환했을 사찰의 야경을 상상해 본다. 진구사지에서는 천년 넘게 피어 있는 연꽃의 향기를 바람결에 느낀다. 석등 화사 위쪽에 남은 불꽃의 흔적 탄소 그을음을 보며 천년의 시간 여행을 해본다.

진구사지 석등은 상륜부가 온전하지 않아도 전부가 완전한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폐허 된 사찰 누리에 석등 홀로 화사하여 충분하다.

진구사지에서 가까운 곳 섬진강 상류 강기슭에, 2만 년 전의 구석기가 발굴된 하가 구석기 유적지가 새롭게 조명된다. 상가 유적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 시대 대형 윷판 암각화가 있다. 이 지역이 예로부터 예사로운 터전이 아니었다. 진구사지에서 옥정호로 넘어가는 죽재 고갯길에는 영화배우 장진영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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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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