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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김지하 시인. 김지하 시인.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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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본명 金英一)는 1941년 3월(음력 2월 4일) 아버지 김맹모(金孟模)와 어머니 정금성(鄭琴星)의 외아들로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김해김씨 목경파(牧卿派)다.

"나는 1941년 음력으로 2월 4일, 먼동 트기 전 캄캄한 시간에 전라남도 목포시 연동 뻘바탕 수돗거리 물전 건너 옛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주석 1)

어째서 외가에서 났을까? 외갓집 바로 곁에 우리 친가가 붙어 있었는데 나 낳기 얼마 전에 나보다 한 살 위 배다른 형이 그 집에서 죽고 이어 닷새 전에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무엇인가 좋지 않다 하여 서둘러 자리를 외가로 옮겼다는 것이다. (주석 2)

김지하의 선대는 언제부터인지 전남 신안군 암태면 입금리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소작쟁의로 유명했던 그곳이다. 증조할아버지가 목포로 이사하여 이곳에 자리잡았다. 증조할아버지는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동학꾼이었다. 

할아버지는 역전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 포목 장사서 기계 수선까지 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가 골패로 재산을 날렸다.

"문재철이란 사람이 있었다. 일제 때 암태도 대지주였고 목포 조선면화 사장이었고 문태중학교 교주였고 암태도 소작쟁의 때는 농민들의 원한의 표적이었던 친일파 악질지주 바로 그 장본인이다. 이 사람 아버지 문 아무개 씨가 바로 우리 집안의 말하자면 불구대천의 원수다." (주석 3)
시인 김지하가 책 출판에 즈음해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시인 김지하가 책 출판에 즈음해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시인 김지하가 책 출판에 즈음해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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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증조부가 이 문씨와 재산을 걸고 골패를 하다가 속임수에 걸려 모두 빼앗기고, 이에 항의하자 일제관헌을 끌어들여 곤장을 치게 하였다고 한다.

김지하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을 잡고 "영일아, 집안을 일으켜라." 하시고, 운명 시에는 손자를 애타게 찾으셨다고 한다. 그때 김지하는 감옥에 있었다. 

김지하의 고난에 찬 생애는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 모른다. 박해의 땅 전라도 목포, 동학도의 후예, 공산주의자인 아버지….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 가네미야(金宮) 직공학교에 3년간 고학하면서 전기기술을 배우고 돌아와서 목포에서는 최고 기술자로 큰 전파상을 열었다. 일본에 있을 때 접했던 것인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때의 공산주의는 반일을 앞세워 조선청년들이 많이 가담했었다. 김지하의 술회다. 

"아버지 김맹모 씨는 공산주의자였다."

이 한마디는 나의 육십 생애 안에 깊이깊이 감추어진 비밀주문 같은 것이다. 미당(未堂)이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한마디에 그 일생이 결정되었듯이, 내게도 이 한마디가 나의 생애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나는 이 한마디를 끝끝내 함구하려고 했었다. 이미 폐지되었다지만 실제로는 시퍼렇게 살아 있는 연좌제의 굴레에 빠지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 의식과 삶 속에서는 여전히 폐기되지 않고 또 하나의 연좌제처럼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리하여 4.19 직후 통일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민족통일연맹엔 가입하지 않았던 것. 5.16 뒤 반파쇼운동,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헌신적이었을 때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에는 가입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친연성을 가졌음에도 내내 비판적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내 혈통이나 이념 인식이나 타고난 기질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중요하게는 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그 그늘진 생애가 내 마음에 깊이 드리워진 결과였다. (주석 4)

그가 태어난 일제말기,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필두로 이른바 황국신민화와 전시수탈에 광분하고, 각 가정의 수저와 제사용 놋그릇까지 빼앗아 갔다. 한국어의 교육과 사용을 금지하고 징병제ㆍ학병제ㆍ여자정신 근로령을 잇따라 발동하여 조선의 청춘남녀를 총알받이와 군수공장 그리고 위안부로 끌어갔다. 김지하가 다섯 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다. 

이 한반도, 특히 남한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실패한 공산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일본에서 기술을 배울 무렵에 공산주의를 접했다고 한다. 그 후 해방 직전에 동료들과 함께 조선해방 게릴라 운동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헌신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침착하고 냉정한 주요 간부로서 목포시당에서는 알아주는 투사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 중선(中鮮) 지대로 피신한 경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여러 차례 중선을 여행한 적이 있다. 모두 아버지를 찾아 떠돈 것이며 때로는 직접적인 감시나 추적을 피해서 떠돈 피신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나의 초등학교 입학이 늦어졌고 또래 아이들과는 늘 거리가 있는 우울한 아이가 되었다. (주석 5)

7세에 목포산정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반장이 되었다. 졸업 후 목포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13세) 아버지가 영화기사로 강원도 원주에 취직이 되어 가족이 함께 이사하여 강원도 원주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때 소년의 꿈은 그림이었다.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온 어머니의 강한 만류로 꿈은 사라졌지만, 그는 두고두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림, 나의 한, 끝끝내 이루지 못한 나의 꿈. 평생을 떠나지 않는, 좌절한 첫 사랑의 깊이 파인 그늘 같은 것.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태생이 시인 쪽보다는 그림쟁이다. 두꺼비 흉내를 내고 참새 흉내를 내고 고개 숙인 해바라기 모양이며 할미며 온갖 산 것은 다 흉내내려 했으니 그 첫 조짐이다. 무슨 물건이든 그 특징이 먼저 눈에 들어와 박혔고 그걸 그리고 싶어 안달을 했고 그리면 그렇게 신명이 났다. 

종이와 연필이 귀할 때다. 흙마당에 돌판으로 그리고 회벽에 숯이나 부지깽이 끝으로도 그렸다. 돌아오는 것은 구박과 매. 그럴 때면, 그래도 그리고 싶어 못 견딜 때면 방바닥에 맨 손가락으로도 그리고, 마루 위에 물을 찍어 그리기도 했다. (주석 6)


주석
1> 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1)>, 59쪽, 2003, 학고재. (이후 <회고록> 표기)
2> 앞과 같음.
3> 앞의 책, 35쪽.
4> 앞의 책, 53쪽. 
5> 앞의 책, 53~54쪽.
6> 앞의 책, 13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지하, #시인김지하평전, #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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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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