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치열한 정진의 과정 속에서 좋은 스승은 홀연히 나타난다. 제자는 스승을 만나 도약의 결정적 계기를 맞고, 스승은 제자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두 스승의 이야기를 들어본다.[기자말]
☞이전기사 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
 
전영애 교수는 1986년 박사학위 논문을 끝낸 이후부터 동서독 분단과 독일문학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 전영애2 전영애 교수는 1986년 박사학위 논문을 끝낸 이후부터 동서독 분단과 독일문학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 주미영

관련사진보기


1986년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고부터 전영애는 동서독 분단과 독일문학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동독의 문학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삶과 심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싹튼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독일 분단은 위험한 테마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오는 책은 다 금서로 지정돼 있었다. 서독에서 출간된 동독 작품만을 구해서 읽고 번역을 시작했다. 그때 가장 눈을 번쩍하게 만든 작가가 바로 '시의 스승' 라이너 쿤체다.

"동독 출신인 쿤체 선생님은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강의를 했어요.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민주자유화 운동 무렵부터 선생님은 핍박을 받기 시작했죠. 1976년 동독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하여 결국 서독으로 넘어왔지요. 동독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이었지만 시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생명 윤리의 본질에 천착했습니다. 고요하고 정적인 저항시를 썼던 겁니다. 독일어는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데, 쿤체 시인은 그런 명사마저 다 소문자로 표기했습니다. 마침표와 콤마도 가능하면 다 뺐습니다. 동독 사회는 강성의 프로퍼갠더가 난무하는 곳인데, 시인이 그 강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었겠어요. 목소리를 낮춰 발언하는 전략적 고려를 했던 것 같은데, 거기서 좋은 저항시가 나왔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죠. 어떻게 보면 기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언론과 출판계의 시사적인 요구도 급증했습니다. 1989년에 제가 번역한 동독 작가의 책 다섯 권이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 두 권이 쿤체 시인의 작품이었습니다."

전영애가 라이너 쿤체를 처음 만난 해는 1992년이다. 캐나다 뱅쿠버 대학에서 학회가 열렸는데 그 때 그는 라이너 쿤체의 시에 대해 주제 발표를 했다. 발표가 끝난 뒤 사람들이 쿤체 시인이 바로 건너편 방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의 동쪽 한실. 서원 전체가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로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서원 곳곳 전영애 교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가 없다.
▲ 여백재 동쪽 한실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의 동쪽 한실. 서원 전체가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로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서원 곳곳 전영애 교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가 없다.
ⓒ 주미영

관련사진보기


"그 분을 처음 뵙고 너무 놀라서 사과부터 했습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번역을 한 것에 대해서였죠. 그런데 이 분은 한 명의 번역가가 12명의 대사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앉아서 5~6시간 대화를 나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20세에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39세까지 시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마침 우연히도 현장에 있었던 탓에 250편이나 되는 우리 말 시가 쓰이게 됩니다. 시집을 내기도 했고 잠깐 문단을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곧 포기했습니다. 시인이 되려면 압도적인 재능이 있거나 문단에 얼굴도 내밀고 술도 좀 마실 줄 알아야 하는데 저는 그런 재능이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제가 또다시 시를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니까 시도 꾀를 부리더군요. 독일어 시가 마치 방언처럼 분출했습니다. 스스로 심리분석을 해봤습니다. 한국어로 쓰면 출판 욕심이 생길 것을 두려워해서 아예 독일어로 시작(詩作)을 하게 되었나 봅니다."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감성 넘실거리는 시편

그런 독일어 시조차 더욱 많이 쌓이자 고민을 하다 오래 전에 만났던 라이너 쿤체 시인이 떠올랐다. 2005년 1월 도나우 강변 쿤체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오랜 만에 그와 해후했고, 자신이 쓴 독일어 시를 그에게 전했다. 

"선생님이 우체통에 넣었던 저의 시를 밤새 보시고 다음날 저를 만났어요. '당신을 교수에서 나의 동료로 격하시키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시인의 반열에 저를 두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과분한 상찬이었죠. 6시간 30분 동안 저를 앉혀놓고 아주 꼼꼼하게 제 시를 고쳐주셨는데, 놀랍게도 제가 드린 시 전체를 연필로 필사해 놓으셨더라고요. 왜 여기는 마침표보다 쉼표가 나은가, 여기는 왜 어순을 바꾸는 것이 좋은가 등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뮌헨 제 숙소에 돌아온 후 전화를 받았어요.

그해 가을에 제 시집이 독일에서 출간될 것이란 소식과 함께 여기에, 즉 독일 안에 뿌리내리라는 제안을 하셨어요. 그건 바로 제가 차마 하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두 언어 사이에서, 학문과 시 사이에서 몸 둘 바를 몰랐던 시기였어요. 제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볼 사람을 찾아 간 것이었는데 그 질문을 차마 못했거든요. 선생님이 하루 사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 출간 교섭까지 해놓으셨던 거예요." 

 
2005년 독일 라이너 쿤체 시인 자택에서 만나 자신이 쓴 독일어 시에 대해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전영애 교수.
▲ 라이너 쿤체와 시공부 2005년 독일 라이너 쿤체 시인 자택에서 만나 자신이 쓴 독일어 시에 대해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전영애 교수.
ⓒ 전영애

관련사진보기

 
그 해 가을 쿤체 시인은 자비를 들여 한국을 방문했다. 한 단체의 초청을 두 번이나 거절했던 시인이 전영애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서울대에서 열린 시 낭독회는 대성황이었다. 낭독회에 이어진 사인회가 세 시간이나 소요됐을 만큼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오시기 직전 율곡의 '고산구곡가' 첫 곡에 화답하는 '메아리 시조'를 팩스로 보내셨습니다. 한국에 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신 거예요. 율곡과 황진이, 황지우의 시를 찾아서 화답시를 썼고 이듬해 한국시가 포함된 시집 '보리수의 밤'이 출간되었습니다." 

'고산구곡가' 1곡을 화답한 '메아리 시조'를 쿤체 시인은 이렇게 썼다. 
 
"술이어서가 아니라/단지 안에 든 단지여서가 아니라/숲 안에 든 숲이어서가 아니라/시 안에 든 무언가에 나 끌리네/이 나라로, 산이/그림에서처럼 펼쳐져 있다는,/기꺼이 시인의 세계 속/ 저 이가 되어 보려네/시로 인해/ 시인의 벗이 된다는" 
 

라이너 쿤체는 2018년 마치 마지막 시집처럼 읽히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출간했다. 출간된 즉시 바로 번역했다. 읽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그의 시를 더 읽고 싶어 하는데, 이전에 나온 번역본 네 권이 다 절판되었다. 그래서 번역자가 만든 책이 <은엉겅퀴>라는 제목의 쿤체 시인 선집이다. 두 시집 모두 전영애가 번역했음은 물론이다. 언제나 바늘 끝처럼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이 넘실거리는 시편이다. 특유의 간결한 시어에 삶의 무게와 성찰이 더해졌다. 2006년의 시집 <보리수의 밤>에는 12편의 한국시가 실렸다. 모두 촌철살인의 기지가 엿보이는 시편들인데 그 중 하나 '서울의 거리 모습' 은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들이 그래 보인다 
길 위에 있다 
젊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날씬하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서로에게 맹세하고 있는 듯하다 
저마다 나는 너를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하지만 길 위에 있다.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여

 
 
지난 해 9월 전영애 교수는 쿤체 시인의 도나우 강변 자택을 방문해 인사했다.
▲ 쿤체 시인 부부 지난 해 9월 전영애 교수는 쿤체 시인의 도나우 강변 자택을 방문해 인사했다.
ⓒ 전영애

관련사진보기

 
"2005년 방한했을 때 독일학술교류처 주최로 한국에 체류하는 독일인, 독일과 관련된 한국인을 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오늘 독일에서 아름다운 시집이 한 권 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올라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독일시집 탄생 소식을 그렇게 알려주셨던 겁니다. 한국 방문 중 독일에서 시집이 나왔다는 전갈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나온 저의 첫 독일어 시집이 '프란츠 카프카를 위한 무지개'입니다."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

전영애는 독일에 감사한 일이 많아 시정(詩亭)이란 이름의 작은 한옥 정자를 세웠다. 쿤체 시인이 설립한 재단 부지 안이다. 시인은 처음 이 '과분한 선물'을 받기를 주저했다. 제자의 부담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문의 편지를 보내와 '전영애 교수 부친의 유지를 기린다'는 팻말을 만드는 조건으로 이 선물을 받아들였다. 부친이 생전에 검약한 생활을 유지하며 모은 돈 1억 원이 정자 건립의 종자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자택이 마을의 끝이고 거기서 바이에른 숲이 시작되는데, 그 사이 빈터에 이 정자가 반듯하게 세워진 것이다.  
 
전영애 교수는 독일에 감사할 일이 많아 쿤체 시인이 설립한 재단 부지 안에 시정(詩亭)이란 이름의 작은 한옥 정자를 세웠다.
▲ 쿤체 시인 한옥정자 전영애 교수는 독일에 감사할 일이 많아 쿤체 시인이 설립한 재단 부지 안에 시정(詩亭)이란 이름의 작은 한옥 정자를 세웠다.
ⓒ 전영애

관련사진보기

 
이 한옥 정자는 창덕궁의 가장 작은 건물인 서고 '운경고'의 모양을 본떴다. 한 칸은 전기온돌에 들창을 달고, 반 칸에는 마루를 들였다. 네 쪽 들창을 접어 들어 올리면 도나우강 물굽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여름이면 방과 마루를 터서 방에서도 도나우 강을 볼 수 있는 정자가 완성됐다. 국내에서 지어 해체해서 보냈지만, 작아도 들 건 다 들어야 해서 연인원 18명이 독일로 가서 세웠다.

전영애는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의 '괴테 금메달'을 받았다. 100년이 넘는 전통의 괴테 금메달은 관련 연구자 사이에서는 최고 영예의 상으로 꼽힌다. 수상자 대부분은 독일 출신 괴테 연구자로, 외국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동양인으로는 전영애의 수상에 앞서 일본 학자 한 명이 받은 일이 있을 뿐이다. 테렌스 제임스 리드 옥스퍼드대 교수의 시상식 축사는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된다. 전영애의 학문 여정에 대한 압도적인 예찬으로, 그는 이렇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전영애 교수가 번역한 작품의 풍부한 양과 폭을 상상하자면, 그것은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라서 자문하게 됩니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하루가 몇 시간인가요?"

세계적인 괴테 전문가인 스승 헨드릭 비루스가 2019년에 비로소 이 상을 받았으니 어떻게 보면 청출어람의 의미도 있다. 

"비루스 선생님이 이 상을 받았을 때 제가 제일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불경하게도 제가 먼저 그 큰 상을 받아 정말 송구했거든요. 상을 받은 것 자체로도 도무지 송구했고요. 수상 연설에서 '이제 비로소 이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춰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제가 발표한 논문과 700편이 넘는 괴테 시 전부를 번역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상이야말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독문학 연구와 많은 저술의 결정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난 5월 5일에는 라이너 쿤체 상도 수상했다. 이 상은 1933년 욀스니츠(Oelsnitz) 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쿤체의 시적 성취를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욀스니츠 시가 주관해 격년으로 시상하는데, 전영애는 여덟 번째 수상자가 됐다. 학자가 아니라 시인 전영애의 진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번역가나 기타 공로자에게 주는 상은 아니다. '독일어로 시를 쓰는 뛰어난 시인'에게 주는 상인데, 그 방점이 '저항으로서의 문학'에 찍힌다. 그 저항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을까. 그것은 쿤체 시인이 낮은 목소리로 수미일관 주창한 '민감한 길(노선)과 바른 걸음'에서였다. 전영애는 수상 소감을 통해 시인의 '바른 걸음'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저항의 형식을, 심지어 삶의 원칙을 발견했다고 토로했다.

"통일 독일 이후에도 그는 언제나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판만을 능사로 삼는 게 아니라, 매우 민감하고 따스하게 생명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억누르는 것에 대한 비판과 고발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시는 날카로움과 섬세함, 그리고 '올곧음'을 늘 함께 지향합니다. 쿤체 시인은 여러 개의 중요한 상을 받았지만 제게 가장 감동적인 연설은 심사위원 7명이 모두 학생인 상의 수상소감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을 요약하자면 '아름다운 것에 손대지 마라'는 것이었죠. 메르켈 총리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시인이 바로 쿤체 선생님이었습니다. 몇 년 전 메르켈 총리 부부가 라이너 쿤체 시인의 댁을 다녀가며 제가 기증한 한옥 정자도 구경했습니다. 바쁜 총리가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 6시간 동안이나 귀한 시간을 내어 시인의 말을 들었습니다. 6시에 베를린에서 푸틴 대통령과 통화 약속이 있다며 떠났다고 합니다. 놀랍도록 유능할 뿐만 아니라 시를 좋아하는 메르켈이 지금도 총리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쩌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더 좋은 타인의 시를 전하는 일이 중요

독일에서 큰 상을 받으며 전영애는 독일 학계와 문화계가 시상식을 진행하는 형식에도 주목했다. 내용뿐만 아니라 그 형식도 시상의 취지를 정중하고 완벽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축사든 답사든 요식 행위는 일절 배제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서 깊은 전통인 라우다치오(Laudatio;축사)는 수상 이유를 깊게 평가, 분석하는 본격적인 강연이다. 수상자가 그 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축하하는 사람은 오래 수상자를 연구하여 연설문을 쓴다. 수상자도 답사를 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철저하게 준비한다. 수상자는 답사를 통해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론, 또는 시론을 개진한다. 그 밖의 행사도 세심하고 치밀하게 구성하여 시상식의 품격을 높인다.
 
전영애 교수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전달되는 ‘내면의 힘’이 우리 시대의 삶을 감당할 것이란 믿음을 전영애는 갖고 있다.
▲ 전영애9 전영애 교수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전달되는 ‘내면의 힘’이 우리 시대의 삶을 감당할 것이란 믿음을 전영애는 갖고 있다.
ⓒ 주미영

관련사진보기

 
"이번에는 수상자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배려하더군요. 시장이 베를린 한국문화원을 통해 가야금 연주자를 섭외했지요. '한국과 독일을 잇는' 윤이상과 '한국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황병기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인근 드레스덴시의 시장 부인이 한국인으로 성악가였는데, 그도 초대받아 축가로 가곡 '동심초'를 들려주었습니다. 차려진 음식도 한식과 독일식이 절반씩이었습니다. 홀 한구석에서는 서점에서 나와 라이너 쿤체 시인의 시집과 제가 독일에서 펴낸 책을 나란히 전시, 판매도 하고요. 또 사전행사로 고교 1, 2학년 학생들과 대담도 이뤄졌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은 독일어로 된 제 책을 다 읽고 왔습니다. '언어, 경계, 카프카' 를 제 저작의 3개 테마로 설정했더군요. 그 주제로 각자 미술 작품까지 만들어 왔습니다. 작품들은 나중에 행사장에 전시했고요. 질문의 수준도 굉장히 높았습니다. 답사에서 '저의 시는 더 좋은 타인의 시를 전하는 일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을 했는데, 취재했던 기자가 제 발언 취지를 정확하게 포착해 기사의 첫 머리에 올린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괴테는 스승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영애는 이렇게 답했다. "살면서 여러 훌륭한 작가를 만났는데, 오랜 여정 끝에 가장 큰 인물인 괴테를 종착지로 삼게 된 것"이라고. 괴테는 스승이라기보다 문학 연구의 마지막 탐구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파우스트>에 나오는 두 개의 비문(非文)이 함축하는 바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파우스트를 요약하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를 꼽았다. '천상의 서곡'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로 통상 번역되던 것을 전영애는 "지향이 있다"고 바꿨다. 

실상 노력만 한다면 무슨 방황을 하겠는가. 지향이 있어야, 갈 곳을 찾느라 방황도 생기는 것이다. 더구나 독일어 동사 'streben'은 '일로매진'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지향이 있기에 이루어지는 것, 식물이 빛을 향하거나, 탑이 하늘로 치솟는 것도 'streben'이 포괄하는 의미가 된다.

새로운 번역이 훨씬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비문의 문제도 그렇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은 완벽한 비문으로 느껴지지만,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말은 비문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거꾸로 아무런 지향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방황이 있겠는가. 또 방황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게 지향이 있기 때문이라니 또한 얼마나 위로를 주는가.

같은 맥락의 다른 문장,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역시 비문이다. 역시 주님이 악마에게 파우스트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오는 문장이다. 심한 비문이어서 단박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곱씹어 읽어보면 깊은 울림과 여운이 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을 누가 '선한 인간'이라 부르는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까지 그 안에 있는 선(善)의 알맹이와 뿌리를 보고,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며 큰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가르치려는 자세는 전혀 없다. 이 비문의 함의와 그것이 주는 위로가 클 뿐이다. 그런데 이런 글들은 그걸 다듬기 위해 60여년을 공들인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전영애는 번역에 있어서도 원문에의 충실에 가장 큰 무게를 둔다. 원문만 들여다보며 번역한다. 더구나 '파우스트'의 경우는 1만2111행에 달하는 정교한 시다. 그 작품의 운율까지 살려보려고 애쓴다. 좋은 글을 충실하게 잘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그게 시인의 마음이다.
 
저녁 무렵의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의 아름다운 모습. 전영애 교수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시작되는 때다.
▲ 저녁무렵의 여백재 저녁 무렵의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의 아름다운 모습. 전영애 교수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시작되는 때다.
ⓒ 주미영

관련사진보기


손쉬운 지침서들이 횡행하고, 온갖 영상의 힘에 사람들이 휘둘리는 시대다. 문학과 예술을 통해 전달되는 '내면의 힘'이 우리 시대의 삶을 감당할 것이란 믿음을 전영애는 갖고 있다. 그가 괴테 전집의 완성을 추구한다거나, 여주에 괴테마을 조성한다거나, 여백서원을 찾아오는 '잘 모르는 사람'들을 반기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전영애가 또한 청소년에게 "TV나 게임에만 몰두하지 말고 몸을 움직여서 노동을 하라"고 조언하는 것도, 저 '내면의 힘'을,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키워가는 근력을 강화하라는 메시지를 괴테를 빌려 전달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전영애는....

△1951년 경북 영주 출생 △1973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85년 서울대 독문과 박사 취득 △1985년 경원대 독문과 부교수 △1996년 서울대 독문과 교수 △2006년 한국괴테학회장 △200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2008년 독일 뮌헨대 강사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수여 괴테 금메달 △2011년 서울대 교육상 △2011년 한국문학번역원 이사 △2014년 여백서원 건립 △201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초빙교원 △2016년 서울대 정년 퇴임 △2020년 삼성행복대상 △2020년 이미륵상 △2021년 라이너 쿤체상 △'괴테 시 전집'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 '파우스트 I·II' '괴테 서·동 시집'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등 70여 권 번역 및 소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한기홍은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공채 24기)에 입사했다. 이후 월간중앙에서 오랜 기간 기자로 일했다. 사회팀장, 정치팀장을 거쳐 선임기자로 다양한 분야 인물 인터뷰 기사와 탐사보도에 참여했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현상을 세계사적 흐름과 견줘보며, 여러 인물 간의 조화와 긴장관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꿈이 있다. 거장의 수업시대와 스승의 가르침을 주제로 한 이 기획도 그 작업의 일환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공채 24기)에 입사했다. 이후 월간중앙에서 오랜 기간 기자로 일했다. 사회팀장, 정치팀장을 거쳐 선임기자로 다양한 분야 인물 인터뷰 기사와 탐사보도에 참여했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현상을 세계사적 흐름과 견줘보며, 여러 인물 간의 조화와 긴장관계를 심층취재를 통해 들여다보고 싶은 꿈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