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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오후 3시 2분 [창문 닫기, 시건장치 철저 요망]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9월 6일(화) 새벽~오전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하여 포항을 통과할 예정이니, 퇴근 시 창문 닫기, 시건장치를 철저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5일, 회사에서 안내 문자가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태풍은 제주도 근방에 머물고 있었고, 피해 상황은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동료가 일본에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전해온 메시지라며, 강한 바람으로 인해 차나 건물이 날아가고 있다고 말했지만, 먼 이야기로만 들렸다. 회사의 안전 담당자들은 곳곳에 모래주머니를 설치하거나, 바람으로 날아갈 만한 것은 묶어두고 있었는데, 이 정도의 조치로 별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기도할 뿐이었다.

"9월 5일 오후 5시 3분 [포항지역 출근시간 안내드립니다.] 태풍 상황이 유동적이라 현재는 6일(화) 출근시간 변경은 없으나, 변경이 있을 경우 6일(화) 오전 6시에 안내 문자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다시 안내 문자가 왔다. 태풍이 출근시간인 오전 8시에서 9시경 포항을 지나갈 것이라 예상되기는 했지만, 그대로 출근하라고 안내가 왔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20년 만의 초강력 태풍'이라는 기상청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면서, 재작년 태풍에 아파트 단지의 나무가 쓰러져서 동료의 차가 망가졌던 기억이 떠올랐고, 회사의 주차타워에 차를 세워 두고는 걸어서 퇴근을 했다. 

집에 들어와서는 창문을 꼼꼼하게 잠근 후, 태풍의 현재 위치와 예상 경로를 확인하고는 잠을 청했다. 바람은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았고, 빗소리는 이중의 창문 안으로는 침범하지 않을 만큼이었다. 태풍으로 철야근무를 하는 동료의 수고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는 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주변의 수고에 기대어 태평하게 잠을 자던 6시간 만에 세상은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 있었다. 

빵집 앞을 떠다니는 구명보트 
 
11호 태풍 '힌남노'로 많은 비가 내리면서 6일 오전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일대가 물에 잠겨있다. 2022.9.6
 11호 태풍 "힌남노"로 많은 비가 내리면서 6일 오전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일대가 물에 잠겨있다. 2022.9.6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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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 오전 6시 13분 [포항지역 출근시간 안내] 금일 출근시간은 10시 이후에 알려드리도록 하겠으니, 자택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6일 오전, 회사에서 출근시간을 10시로 늦춘다는 안내 문자가 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출근은 미뤄졌고, 창밖에는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철야근무를 하던 친구에게 사진이 계속 들어온다. 회사 곳곳에서 물이 샜고, 지하 실험실은 배수가 되지 않아 물이 차고 있다고 했다.

곧이어 다른 동료들도 연달아 정보를 공유한다. 집 근처의 효자시장이 물에 잠겼고, 어제도 지나갔던 빵집 앞에는 구명보트가 떠다니고 있었다. 곧바로 무섭게 물이 불어난 형산강의 동영상과 도로 곳곳에 설치된 CCTV의 화면이 공유되었다. 물에 잠기지 않은 교차로가 없었고, 여기저기에 지붕만 보이는 차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지하 실험실 침수 심각. 담당자 출근해서 작업 중."

철야근무 중인 동료의 메시지를 받고 나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8시가 되니 비도 잠잠해졌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대충 세수만 하고 출근을 했다. 도로 곳곳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널브러져 있고 흙탕물이 고여있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동영상에 본 것처럼 물에 잠길 만큼은 아니었다.

문제는 지하 실험실이었다. 배수관로에 물이 가득 차서 물이 역류하고 있다고 했고, 내가 도착했을 때는 발목까지 물이 차 있었다. 수중펌프로 물을 밀어내면서 가까스로 바닥의 물을 퍼내고 나니 12시가 되었고, 지상으로 올라왔더니 하늘은 너무도 찬란한 가을이었다.

"방금 전까지 지하에서 물을 퍼내고 왔는데, 하늘이 너무하잖아!"

이것도 고생이라고,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무심한 하늘님'에 투정을 부리는 중인데, 전화가 울린다. 포스코 안에 있는 실험실에서 근무하는 동료였다. 

"포스코가 물에 잠겼다. 지하 실험실에도 물이 들이쳐서 장비들이 물에 잠겼다고 하는데, 형산강이 통제되어 들어갈 수가 없다."
 
집중호우로 냉천이 범람하면서, 포항시 남구 냉천로 주변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냉천 하구에 있는 포스코도 공장 전체를 멈춰야 하는 피해 상황인데, 얼른 복구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태풍으로 인한 주요 피해지역 집중호우로 냉천이 범람하면서, 포항시 남구 냉천로 주변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냉천 하구에 있는 포스코도 공장 전체를 멈춰야 하는 피해 상황인데, 얼른 복구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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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게 아니었다. 상상도 못한 상황이다. 포스코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건물 한 두개가 아니라, 여의도 2.5배의 면적(7.6제곱 킬로미터)에 각종 설비와 공장이 위치한 거대한 단지인데, 이곳이 물에 잠겼다는 거다.

현장에 있는 직원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통신 상태도 좋지 않은지 자꾸 끊긴다. 간신히 연결되어 알아낸 바로는 실험실에 토사가 들이쳐서 무릎까지 물이 찼는데, 제철소 전체가 정전이고 추가적인 피해가 있을 수 있으니 일단 철수하라고 했단다.

"다들 무사하신가요? 저는 새벽 3시에 지하 주차장에서 차 빼라고 해서 1시간 만에 뺐는데, 4시에 내려오신 분들은 물이 너무 차서 차 문을 못 열어서 그냥 두고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단수, 단전, 인터넷도 안 되고 있어요."

실험실 피해로 넋이 나가 있는데, 친구들 모임방에 메시지가 올라온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아파트 뒤쪽에서 산사태가 나면서 지하주차장으로 물이 들이쳤고, 친구는 간신히 차를 빼냈지만 주차장은 아직도 침수되어 있다는 얘기였다. 나중에 확인하니, 남구 오천읍, 문덕동, 인덕동의 피해가 특히 심각했다.

태풍으로 인해 포항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고지대에서 모아진 물이 냉천을 따라 흘러내리며 인근의 마을이 초토화되었고, 급격하게 증가한 유량에 냉천이 범람하면서 포스코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7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지하주차장도 이 지역의 아파트였다.

"9월 6일 오후 12시 7분 [포항 단수 안내] 9월 6일(화), 13시부터 태풍의 영향으로 정수장이 침수되어 급수가 중단되니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복구 일정은 미정)"
 
침수되어 피해를 입은 편의점을 복구하고 있었습니다. 깨진 유리창은 박스로 일단 가려놓고, 비에 젖은 물건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놓았네요.
▲ 효자시장 편의점 침수 피해복구 침수되어 피해를 입은 편의점을 복구하고 있었습니다. 깨진 유리창은 박스로 일단 가려놓고, 비에 젖은 물건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놓았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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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단수 공지가 올라왔는데, 아직은 물을 쓸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며 퇴근을 했다. 언제 물이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급하게 씻고는, 마실 물을 사기 위해 효자시장에 들렀다. 불과 몇 시간 전에는 고무보트가 떠다니던 곳인데, 물이 빠지며 쌓인 흙으로만 침수되었던 게 현실이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물은 빠졌지만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피해가 심했던 편의점은 직원들이 찾아와서 내부의 흙과 물품들을 정리하고 유리가 깨진 곳에 박스를 몇 겹으로 붙여놓고는 자리를 떴다.

힌남노는 거짓말처럼 지나갔지만

"9월 7일 오전 11시 41분 제철소의 태풍 피해 복구를 위한 봉사활동을 긴급히 부탁합니다. 많은 직원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9월 7일 오후 7시 6분 태풍으로 정수장이 침수되어 포항시로부터 급수를 공급받아 공급하였으나, 급수량이 부족하여 연구원에 단수가 되오니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재공급 일정은 미정입니다."


하루가 지났지만, 포항은 여전히 태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곳곳에서 단전, 단수가 이어지고 있고, 통신 상황도 정상적이지 않다. 오늘은 직원들이 힘을 더해 포스코 안의 실험실을 정리했지만, 물에 잠긴 장비를 살릴 수 있을지는 낙관적이지 않다.
 
경북 포항의 포항제철소 내부. 6일 오전 태풍 힌남노의 여파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공장 일부가 물에 잠겼다.
 경북 포항의 포항제철소 내부. 6일 오전 태풍 힌남노의 여파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공장 일부가 물에 잠겼다.
ⓒ 금속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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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고로 3기를 동시에 휴지하면서 공장 가동을 멈췄고, 포항에서는 9명이 사망하고 1명이 실종되는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 복구도 급하고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데, 집을 잃고 일터가 멈춰있는 상황에서 추석 명절을 맞이해야 한다.

태풍이 지나가던 9월 6일 새벽의 집중호우로, 포항의 일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겨낼 수 있을까? 힌남노는 거짓말처럼 지나갔지만, 포항에는 더 큰 바람이 여전히 몰아치고 있다.  

태그:#포항, #힌남노, #태풍피해, #피해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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