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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기자말]
시계는 태엽을 감아주지 않으면 그 시침에서 멈춰버린다. 도시공간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으려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속해서 가꿔나가야 한다. 하지만 고장 난 시계 같은 공간 하나가 종로에 또 생겨났다.

세운상가 북동쪽 끝 예지동 시계골목이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제4구역'인 이곳은 태엽 끊긴 시계처럼, 그 삶을 다하였다. 그 많던 점포는 어디론가 흩어졌고, 무자비한 철거에 수십 년 쌓인 시공간이 송두리째 지워졌다.
 
작년 11월 부터 철거 중인 예지동 시계골목. 점포들은 길 건너 세운스퀘어 등으로 이주 하였고, 계단식 복합건물이 들어 설 예정임.
▲ 철거 중인 시계골목 작년 11월 부터 철거 중인 예지동 시계골목. 점포들은 길 건너 세운스퀘어 등으로 이주 하였고, 계단식 복합건물이 들어 설 예정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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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들어설, 계단식 모양의 건물 조감도가 공개되었다. 옥상정원으로 도시녹지를 늘이겠다는 구상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일 뿐이다. 완공 후엔 업종 및 기능별 젠트리피케이션에 시달릴 것이고 결국 피맛골에 들어선 그것처럼 보통의 도심 빌딩으로 변모해 갈 것이다.

세운상가와 주변은 40년 이상 개발압력에 시달려 왔으며, 여러 차례 재개발을 시도하지만 실행되진 못했다. 2006년 8개 구역으로 나눠 '세운재정비촉진지구'가 지정된다. 2014년 철거 대신 보전과 재생으로 방향을 바꾸어 부분 재개발이 이뤄지고, 2020년 미착수 구역에 대해선 지구 지정이 해제된다.
 
서울시에서 수립한 세운상가와 주변의 재정비구역을 나타내는 도면. 8개 지구로 나뉘어 있고 일부 구역에선 철거재개발이 진행중임.
▲ 재정비구역도(2009) 서울시에서 수립한 세운상가와 주변의 재정비구역을 나타내는 도면. 8개 지구로 나뉘어 있고 일부 구역에선 철거재개발이 진행중임.
ⓒ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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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와 주변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심제조업 생태계가 살아 꿈틀거리는 곳이다. 무척 건강한, 내세워 자랑할 만한 공간구조다. 이곳 생태계는 다른 그것들과 공존하며 서로 연결되어있다. 순환 고리와도 같은 생산체계는 무척 강한 끈으로 움직인다.

재료와 부품은 물론 제품 완성까지 적게는 몇 곳, 많게는 십여 곳 이상 공정을 거치는 철저한 공정별 분업체계다.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려는 지혜의 산물임과 동시에, 최정점 기술이 집약되어 순환하는 특화된 공간이다. 이런 제조업 생태계가 물리적 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야금야금 파괴되고 있다. 모두는 급기야 흔적 없이 사라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살아있는 골목

세운상가 옆 좁은 길로 들어서면 구불구불 굽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제2구역에 해당하는 장사동으로, 세운상가 쪽은 전기와 전자제품을 생산·판매하는 크고 작은 가내수공업형 제조공간과 상점이 밀집해 있고 안으로 더 들어가면 공구상가가 나온다.
 
세운상가에 면한 장사동. 전기와 전자업을 취급하는 크고 작은 점포와 가내수공업형 시설이 밀집해 있음.
▲ 장사동 초입 세운상가에 면한 장사동. 전기와 전자업을 취급하는 크고 작은 점포와 가내수공업형 시설이 밀집해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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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와 구별이 어려울 만큼 비좁은 가게가 수두룩하다. 가게마다 수북이 진열된 부품과 기기는 도무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 뿐이다. 한눈에도 '서울에 이런 곳이?'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만하다.

이 동네는 백여 년 전의 공간구조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1912년 지적도와 2천년대 초 현황을 겹쳐 비교한 '건축가 조정구'의 탐구는 변화가 거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굽어 오래된 골목이 온전하고 낡은 한옥도 제법 남아 있다. 외관이 변형된 한옥은 공장과 상가로 쓰인다.
 
장사동 내부 골목. 그나마 폭을 확보한 공간 양쪽으로 점포들이 밀집해 있음. 이 길을 따라가면 공구상가가 나옴.
▲ 공구상가 초입 장사동 내부 골목. 그나마 폭을 확보한 공간 양쪽으로 점포들이 밀집해 있음. 이 길을 따라가면 공구상가가 나옴.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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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 기능은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다. 청계천로 주변의 공구상가와 제조업의 시작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부터다. 전쟁 후 서울에서 가장 슬럼화한 공간이 청계천 변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 및 공구, 장비를 취급하는 노점상이 청계천 변에 모여 자리 잡는다.

1960년 4월 청계천 복개 도로(청계천로)가 개설되자 이곳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이 주변 주택가로 스며든다.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전국에 공업단지가 생겨나자, 이곳 공구상가와 제조업이 공업단지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성업 중이던 이곳은 청계천 복원으로 타격을 입고 곳곳으로 흩어져 버렸다. 도로의 존폐가 공간기능에 영향을 끼친, 역설(paradox)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청계천을 향한 빨간 기계공구상가 간판. 옛 영화를 기억하려는지 간판 아래로 점포 이름이 나열시켜 놓았음.
▲ 상가 간판 청계천을 향한 빨간 기계공구상가 간판. 옛 영화를 기억하려는지 간판 아래로 점포 이름이 나열시켜 놓았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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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3가와 청계천에 면한 이곳엔 아직 기계공구상가 흔적이 남아 있다. 청계천 변 '장사기계공구상가'라고 쓴 빨간 간판은 아래로 수 개의 가게 이름을 달고 있다. 골목 안은 각종 기계와 부품 등을 파는 상점, 금속을 가공해 제품을 만드는 소규모공장이 공존한다.

도시는 시간의 부피가 만들어 낸 물리적 공간이다. 한 공간에 시민의 삶과 유사 기능이 집적되면 하나의 특성을 가진 공간구조가 형성된다. 집적화한 공간은 세분화하는 기능에 따라 다시 유기적으로 해체된다.

이런 움직임은 엔트로피(entropy)를 만들어 또 다른 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진화해 나간다. 도시 생태계도 이렇듯 생명력을 가진 자연계와 같다. 장사동을 가만히 둔다면, 자신의 힘으로 더 특이한 생태계로 진화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어찌할 것인가?

청계천을 건너면 장사동과 유사한 금속 정밀기계 생태계가 지배하는 제3구역이 나온다. 이곳은 이미 재개발에 노출되었다. 청계천 면한 곳에 100m 높이로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바로 뒤쪽도 이미 철거되었다. 이렇듯 세운상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거재개발은 반복적으로 공간을 해체하며, 전염병 같은 행태로 확산하고 있었다.
 
청계천에 면해 을지로 금속 및 정밀기계 생산 생태계를 잠식해 들어 온, 공사 중인 1백미터 높이 아파트. 이 공간의 가까운 미래처럼 보임.
▲ 재개발 중 청계천에 면해 을지로 금속 및 정밀기계 생산 생태계를 잠식해 들어 온, 공사 중인 1백미터 높이 아파트. 이 공간의 가까운 미래처럼 보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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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간이 해체되면 다른 기능으로 대체된다. 해체된 공간은 또 다른 곳에서 유사 생태계를 형성하는 풍선효과를 일으킨다. 이런 현상은 주거나 서비스보다 생산기능에서 더 강하게 작동한다. 물론 긴 시간과 막대한 비용, 지루한 갈등 과정을 거쳐야 함은 불문가지다.

갈등의 첫째 요인은 생산기능을 혐오시설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를 지역 쇠락은 물론 땅값 하락 요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랜 시간 갈고 다듬어 숙련된 기술력을 상실할 위험성이다.

과거 구로공단 이주와 변모 과정이 하나의 사례다. 구로공단 2차산업은 남동, 시화, 반월공단 등 다른 도시의 산업단지로 이주가 불가피했다. 그 후 디지털단지로 변모해 나가는 과정을 상기해 보면, 공간기능 해체가 풍선효과를 일으켜 어떤 사회적 비용을 부담시키는지 명확해진다.

생산기능은 쉬이 소멸하지 않는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으로 삐져나온다. 공간의 물리적 환경 개선을 통해, 도심에 형성된 생산기능의 보전과 이의 지속성을 어찌 확보해 나갈 것인지 해법을 찾아내야만 하는 이유다.

하청 도시

토지는 고정성과 희소성이라는 특성으로 최적 배분이 어려운 자본재다. 이는 공공이 개입할 당위성을 제공하는 원인으로 '도시계획'이 도구의 하나다. 용도·지역지구제를 통해 토지라는 사유재산에 제약을 가한다. 따라서 변화하는 토지시장에 효율적 개입이 가능토록 항시 잘 다듬어져 있어야 한다.
 
기와지붕 위로 함석 등을 덧대어 정밀기계 공장으로 사용 중인 을지로의 오래된 한옥과 철거가 진행중임 재개발 현장의 공존.
▲ 공존 기와지붕 위로 함석 등을 덧대어 정밀기계 공장으로 사용 중인 을지로의 오래된 한옥과 철거가 진행중임 재개발 현장의 공존.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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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 도시계획은 변화에 둔감했다. 지역지구제는 세밀하지 못했고, 물리적 적합성만으로 엉성한 규제를 가해왔다. 넓은 평면을 하나로 묶어 천편일률적인 용도·지역지구제를 적용했다.

과거 도시계획은 인구가 지속 증가할 것이란 전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인구는 긴 정체기를 지나 감소추세에 들어섰다. 또한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달, 도시 확산 제약이라는 변화와 한계를 따라잡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렇듯 공간 기능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엉성한 초기 규제를 방치함으로써, 세밀하게 규제하고 대처해야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아울러 급변하는 생활 양태를 따라잡지 못함으로써 더 복잡하게 변화할 공간구조의 수용 실패로 귀결되고 있으며, 다시 뜯어고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로지 평면적인 용도·지역지구제만 살아남아, 용적률로 평가되는 사유재산의 잠재성만 극한으로 키워준 셈이다. 한마디로 투기 세력이 젓가락질하기 좋은 재료를 밥상에 올려놓은 모양새로 변질하였다.

세운재정비지구 기능은 산업에 가까우나 용도지역은 일반상업지역이다. 도시계획과 건축법에 따라 이곳에 들어설 수 있는 시설은 명확하다. 생산기능과는 무관하다. 여기에 오세훈 시장은 '특례법' 제정으로 법적 용적률 한도를 넘어서는 재개발을 추진하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도심 생산기능이 위기에 직면하게 된 직접적 이유다.
 
세운상가와 주변을 중심으로, 북으로 종묘와 남으로 남산이 보이는 항공사진. 이 공간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집단 지성의 발휘가 시급해 보임.
▲ 항공사진(2010년) 세운상가와 주변을 중심으로, 북으로 종묘와 남으로 남산이 보이는 항공사진. 이 공간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집단 지성의 발휘가 시급해 보임.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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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매일 상품을 소비하지만, 생산에는 무감각하다. 하청기능 때문이다. 서울은 이렇듯 자기 생산기능을 끊임없이 삭제하면서, 공간 상품화에 몰두해 왔다. 이는 도시농업뿐 아니라 제조업 해체로 이어졌다. 을(乙)을 거느린 하청 도시 갑(甲), 서울의 모습이다.

서울 도심엔 아직 생산기능이 남아 있다. 이의 해체는 하청 도시 가속화는 물론 그 기능을 다른 도시에 의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지역이나 도시를 수탈하겠다는 행위 다름 아니다. 제조업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물리적 여건 개선 등으로 스스로가 품어내야 하는 이유다.

도시와 도시, 공간과 공간 사이에 우월성이 존재할까? 이를 어느 누가 재단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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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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