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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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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중근, 친일매국자 이완용. 이름 앞에 그 사람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붙을 때가 있다. 독립운동가 또는 친일매국자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 당사자가 인정을 하는지의 여부는 별개로 하고, 누구나 들으면 고개 끄덕일만한 수식어들이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이름 앞에 무엇이 붙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한평생 살고 보니 하나의 단어로 규정되는 사람이 됐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생긴 수식어는 그에 맞는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을 다 했는가 안 했는가에 따라 평가도 달라지기 마련.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아님에도 이름 앞에 원치 않는 수식어를 달고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예를 들면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처럼.

빨갱이라는 유머코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수식어에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언젠가부터 광화문 광장에 모이는 보수 세력을 우리는 태극기 부대라고 부른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주요 구성원인(물론 젊은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빨갱이는 물러가라'고 외친다.

집회 현장 근처나 뉴스에서 '빨갱이는 물러가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볼 때면 나는 남편에게 농담을 건네곤 했다. "여보, 저기 할배 할매들이 당신 부르네." 사회 문제에 나름 촉을 세우고 있고, 각종 집회에 얼굴을 내민 전과(?)가 있으며, 보수 성향의 신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빨갱이'는 농담처럼 부르는 셀프 호칭이었다.

도대체 언제적 빨갱이란 말인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부터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빨갱이 공포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단어를 유머 코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진짜 빨갱이가 있다. 그리고 빨갱이의 딸이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 딸, 그러니까 빨치산의 딸이 조문객들을 통해 아버지의 진짜 삶과 만나는 이야기다. 빨치산의 딸이라니. 전남도당 조직 부부장을 지낸 아버지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까.

온갖 고문과 20년의 감옥살이도 사회주의에 대한 아버지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이해한다. 스스로 혁명가의 길을 선택한 만큼 역경을 견뎌내는 것도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 딸의 삶이다. 연좌제가 남아있던 시절, 아니 국가 제도는 차치하고 부모가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식은 숨죽인 채 살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이 소설은 그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된 화자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알게 된 속 깊은 삶의 이야기들로 꽉 차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정지아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적 각색은 있지만 많은 부분이 작가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배경이 구례라는 것(정지아 작가는 지금 구례에서 90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부모가 빨치산이었다는 것(실제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리산과 백운산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이었다), 화자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것(작가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마치고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등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 많다.

나는 정지아 작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빨치산의 딸이라는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건 삶을 해석하기 위한 안간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성인이 된 이후로 '도대체 내 삶은 무엇인지' 해석하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20대 중반에 쓴 첫 소설 <빨치산의 딸> 작가의 말에 이런 문장이 있다.
 
'부모님의 옛날 동료들을 만나 뵐 때마다 나는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저런 강인한 의지를 만드는 것인지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역사에 대한 책임감, 진실, 이런 것의 힘이 아닌가 막연히 추측은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해답을 모른다.'
 
<빨치산의 딸>(정지아, 실천문학사)
 <빨치산의 딸>(정지아, 실천문학사)
ⓒ 김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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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40대에 쓴 소설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의 작가의 말에서는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실패한 삶이라고 헛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빨치산은 없고 빨치산의 딸만 남은 세상에서 50대 후반이 된 작가는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할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데올로기 너머의 사람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는 사람들은 아버지 평생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사람들이다.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뭐가 됐든 그 질긴 인연들이 노 빨치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다. 그들의 마음을 작가는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썼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해 부활되는 기억은 화해와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고도 썼다.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사람인데 설마 괴물처럼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기세 앞에 절망이든 회한이든 어떠한 서글픈 감정을 잠시나마 느끼기는 했을 터였다.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147쪽)

작가는 장례식장에 여러 사람을 등장시킨다. 부모님과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하다 지리산에서 사망한 동지의 자식들, 작은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육사에 입학하지 못한 큰집 사촌 오빠, 지리산에 파병돼 빨치산들에게 총을 쏘아야 했던 아버지의 친구, 구례읍내 실비집 사장, 부모님의 전처와 전남편의 가족들, 그리고 형에 대한 사랑과 증오라는 두 짐을 등에 지고 평생을 술에 취해 산 작은아버지.

마치 출석을 불러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든 그들 모두는 빛나는 존재들이라고 작가가 온 마음으로 쓰는 편지 같았다. 실패한 삶이라고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그들 안에 숨은 빛을 세상에 내보였다. 정지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데올로기가 한 사람의 전부를 설명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데올로기 너머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썼다.

아버지는 이제 진정한 해방을 맞았다. 그럼 빨치산의 딸도 해방이 됐을까?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함께 게재합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은이), 창비(2022)


빨치산의 딸 1

정지아 (지은이), 필맥(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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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안 보일까봐 가끔 안경을 끼고 잡니다. 글자를 좋아합니다. 특히 남이 쓴 글자를 좋아합니다. 묘비에 '나 여기 없다'라고 쓸까, '책에 파묻혀 죽다'라고 쓸까 고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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