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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늦가을 풍경과 어우러지는 충민사의 창절문. ‘광주의 3충신’으로 꼽히는 전상의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무등산의 늦가을 풍경과 어우러지는 충민사의 창절문. ‘광주의 3충신’으로 꼽히는 전상의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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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죽은 지(2021. 11. 23.) 1년이 됐다. 12.12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은 철권통치로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였다. 광주학살과 헌정질서 유린에 대한 한마디 사과도 없이 죽어, '죽음조차도 유죄'라는 얘기를 들었다. 죽어서도 추도를 받지 못한 인물이다.

학살자 전두환으로 인해 한때 오해를 받았던 광주의 역사인물이 있다. 전상의(1575~1627) 장군이다. 무등산 자락 충민사에 모셔져 있다.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광주대교를 거쳐 월산동 로터리까지 도로를 '구성로(龜城路)'라고 부른다. 이 도로명의 주인공이다.
  
무등산 충민사로 가는 길. 산간 도로변에는 아직도 가을풍경이 머물고 있다. 지난 11월 16일이다.
 무등산 충민사로 가는 길. 산간 도로변에는 아직도 가을풍경이 머물고 있다. 지난 11월 1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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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절문에서 본 무등산 충민사 전경. 왼쪽에 유물관, 오른편엔 정려각이 자리하고 있다.
 창절문에서 본 무등산 충민사 전경. 왼쪽에 유물관, 오른편엔 정려각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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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전두환의 조상이라는 오해를 받아 시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기도 했다. 전상의 장군이 전두환의 조상이고, 충민사도 전두환이 건립했다는 오해였다. 충민사는 1982년에 착공해 1985년에 완공됐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있던 때였다. 전두환이 조상의 사당을 지었다는 오해였다.

오해의 소지는 충분했다. 전두환의 동생,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돌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도 충민사에 세워졌다. 공적비를 마주한 광주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자, 문중에서 땅에 묻어버렸다. 이 또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80년대 서울 인사동 골동품거리에 전상의 장군의 유물이 매물로 나왔고, 한 수집상의 손에 들어갔다. 그 수집상은 재빠르게 전경환에게 보냈다. 실세한테 잘 보일 생각이었을 테다.

유물을 받은 전경환이 확인해보니, 자신의 조상 것이 아니었다. 본관이 달랐다. 전두환과 전경환은 전주(완산) 전씨, 전상의 장군은 천안 전씨였다. 전경환은 전상의 장군의 유품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충민사 유물관. 전상의 장군의 생애와 함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충민사 유물관. 전상의 장군의 생애와 함께 유품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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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3만 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한 전상의 장군의 전투 모습을 그렸다. 충민사 유물관에 전시돼 있다.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3만 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한 전상의 장군의 전투 모습을 그렸다. 충민사 유물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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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무등산 자락에 충민사가 세워지고, 충민사에 유물전시관이 들어섰다. 민속박물관에 있던 전상의 장군 유물이, 기증자의 이름으로 충민사에 보내졌다. 사당 건립에 도움을 준 사람을 공덕비에 새기는 건, 문화재 사업 특성상 의례였다.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간 공적비가 세워진 이유다.

충민사 건립도 전두환, 전경환과 관련이 없었다. 사당 건립에 문중이 앞장섰다. 국비 지원 없이, 도비와 시비로 세워졌다. 전경환 공적비가 세워지고, 전두환 정권 때 건립되면서 오해를 받은 것이다. 모두 전두환의 광주학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사당의 규모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었다. 권력에 대한 아부와 연결된다. 당초 충민사는 20평 정도로 설계됐다고 전한다. 광주의 상징 인물인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의 규모가 23평이었다. 당시 광주시장이 집권자한테 잘 보이려고, 충장사보다 더 큰 25평으로 밀어부쳤다고 한다.

아부의 극치이고, 과잉충성이었다. 충민사가 충장사보다도 큰 사당이 된 이유다. 어찌 보면 재밌는 얘기이고, 한편으로는 한심하고 웃픈 이야기이다.
  
전상의 장군 초상화. 무등산 충민사에 모셔져 있다.
 전상의 장군 초상화. 무등산 충민사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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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의 장군의 정려각. 충민사에 복원돼 있다.
 전상의 장군의 정려각. 충민사에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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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의 장군은 광주의 자랑스런 역사인물이다. 1575년 광주군 도천면, 지금의 광주광역시 구동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내금위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어모장군은 정3품으로 임금을 호위하고, 대궐의 경비를 맡는 최고책임자였다. '그림자 경호'를 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1617년엔 통신사 격인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을 방문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간 동포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상의 장군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서인이었다. 전상의 장군은 서인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좌천됐다.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3만 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했다. 후금은 명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금나라를 멀리하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에 불만을 품고 쳐들어왔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 일가를 기리는 정려비각. 광주 충효마을에 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 일가를 기리는 정려비각. 광주 충효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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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의 장군은 숙종 때 충신 정려를 받았다. 정려(旌閭)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부, 열녀를 선정해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제도다. 전상의 장군은 광주의 3충신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돼 있다.

광주의 3충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과 충장공 김덕령 그리고 구성공 전상의 장군을 가리킨다. 1879년에 나온 광주읍지(光州邑誌) 충신전(忠臣傳)에 광주를 빛낸 14명의 충신이 기록돼 있고, 그 가운데 충신 정려를 받은 인물이 이들 3명이다.

광주시 남구 압촌동에 있는 고씨삼강문이 고경명 집안을 기리는 정려이다. 충효동 정려비각은 김덕령 일가를 기리는 정려이다. 전상의 장군 정려각은 충민사에 복원돼 있다.

충민사는 무등산장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풍광이 아주 멋진 곳이다. 주차장도 넓다. 계단을 올라가면 창절문, 수의문, 정려각, 유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안쪽에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경열공 정지 장군을 모신 예장석묘. 정지 장군은 우리 해군의 시조 같은 인물이다.
 경열공 정지 장군을 모신 예장석묘. 정지 장군은 우리 해군의 시조 같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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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묘. 무등산 자락 충장사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묘. 무등산 자락 충장사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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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부근에 가볼 만한 곳도 많다. 4수원지와 청풍쉼터가 있다. '무등산이 높다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하되 모래 위에 흐른다'고 읊은 김삿갓의 시비가 있다.

청옥동 방면에 경열사도 있다. 고려의 명장 경열공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정지 장군은 1374년 공민왕에 수군창설 계획이 담긴 왜구 평정책을 상신한, 우리 해군의 시조 같은 인물이다. 광주 농성광장에서 돌고개, 양동시장을 거쳐 광주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경열로'라고 한다. 정지 장군의 시호를 따서 붙인 도로명이다.

충민사에서 무등산장 방면으로,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 충장사가 있다. 80년대 광주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였다. 풍암정과 충효마을도 김덕령 장군 형제와 엮이는 곳이다. 충효마을에 광주호 호수생태원과 왕버드나무 숲도 좋다. 인근에 환벽당, 취가정, 식영정, 소쇄원 등 원림과 누정도 많다. 가볼 데 많은 무등산 자락이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풍경. 호반의 숲 사이로 나무 데크가 놓여 있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풍경. 호반의 숲 사이로 나무 데크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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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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