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옷가게 앞의 9900원 특가, 원가 이하 세일이라는 문구를 보면 지갑이 스르륵 열리는 사람이다. 옷걸이에 걸린 싸고 이쁜 그들이 얼른 데려가라고 손짓하는 것 같아 빠른 속도로 지갑을 열어 결제하고, 내 손에 들어온 쇼핑백을 보며 옅은 미소가 귀에 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버려지는 옷에 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첫 부분부터 나오는 참혹한 광경이 시선을 멎게 했다. 가나 아크라에 존재하는 거대 '옷산'이 켜켜이 쌓여 산을 이루었다. 옷들은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 각국에서 수출되어 이곳에 모인 것이다. 넘쳐나는 옷 양을 감당하지 못해 위태위태하던 그 산은 결국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옷산을 이루던 옷의 잔해들은 끔찍한 모습으로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다생물은 물론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생계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우리가 사는 지구를 잡아 삼킬듯한 처참한 옷산의 모습에 나는 한동안 발목을 붙잡혀 헤어나올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뒤 무심코 내 방의 옷장을 열어보았다. 또 하나의 작은 옷산이 형체를 드러냈다. 일순 가나 수크라의 거대 옷산이 오버랩되며 여태까지 무분별하게 옷을 사고 몇 번 입지도 않고 방치한 과거의 내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옷장 안의 옷산을 해체했습니다
 
산책길에 마주한 아파트 헌옷수거함 옆에 자리한 옷산
 산책길에 마주한 아파트 헌옷수거함 옆에 자리한 옷산
ⓒ 이유미

관련사진보기


문득 옷장 안의 내 작은 옷산이 헌옷수거함을 통해 저 먼 타국으로 날아가 끔찍한 형상의 옷산을 또 만들 것이라 상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곧바로 나는 엉킨 실타래를 풀듯 옷산에서 옷들을 하나씩 풀어내어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색감의 티셔츠와 니트, 청바지가 화수분처럼 나왔다. 늘 입을 것이 없다며 옷을 꾸역꾸역 사들인 과거의 내 손을 다시 한 번 원망했다.

한 시간 정도를 들여 옷산 해체작업을 하고 나니 생각보다 입을만한 옷이 많았다. 숨은 보물을 찾은 듯 기쁘기까지 했다. 불현듯 어젯밤, 한 쇼핑몰에서 신상 10프로 세일이라는 문구에 현혹되어 베이지색 니트 하나를 결제하고 잠든 사실이 머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세탁비닐을 뜯지도 않은 채 옷장 구석에서 발굴한 니트를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빛의 속도로 쇼핑몰에 접속해 결제를 취소했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옷장 정리를 계기로 별안간 나는 일주일간 옷안사기 챌린지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된 실행을 위해 나름의 두 가지 원칙도 정했다. 먼저 불필요한 외출 줄이기, 산책을 하러 나갈때면 내 시선을 잡아끄는 크고 작은 옷가게들, 구경만 하자 하고 들어가서는 늘 손에 습관처럼 만 원짜리 티 한 장을 들고 나오곤 했다. 그런 나를 너무 잘 알기에 아이 등원과 하원, 지인들과의 약속 외엔 불필요한 외출을 줄였다. 산책이 하고 싶을 땐 옷가게가 즐비한 길 말고 다소 한적한 길을 걸었다.

두번째는 SNS와 핫딜카페 접속 빈도 줄이기,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접속하는 SNS와 핫딜카페는 옷소비에 큰 도화선이 된다. 특히 오늘만 특가, 무료배송이라는 문구는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게 만든다. 핫딜카페에는 꼭 필요한 생필품 알림만 켜놓고, SNS에 뜬 쇼핑몰 광고는 누르지 않으려 의식적인 노력을 했다.

일주일간의 챌린지는 순조로이 진행되는 듯 했으나 위기도 있었다. 가장 고비였던 5일차 되는 날엔 예전부터 눈여겨봤던 딸아이의 예쁜 원피스가 특가로 올라와 무심결에 엄지손가락이 결제버튼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쾌락으로 인해 어딘가에서 또 만들어질 무시무시한 옷산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고 엄지손가락을 조심스레 거두었다. 중간중간 옷사기 금단증상으로 마음이 허한 순간도 찾아왔다. 그런 순간이 올때마다 라떼 한 잔으로 허한 속을 따뜻하게 채우며 나를 다독였다.

챌린지는 멈출 수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옷 안 사기 일주일 챌린지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정도는 살 수 있잖아', '다들 사는데 왜 혼자 참고 있어', '사버려'라는 악마의 유혹이 내 마음을 지배하려 들 때마다 나는 다시금 수크라의 옷산을 떠올리며 어퍼컷을 날렸다. 위기의 순간이 올 때마다 옷산의 존재는 내게 큰 경각심을 가지게 만드는 자극제였다.

챌린지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겉옷은 잃었지만 내면의 옷을 얻었다. 옷장을 열 때마다 가지런히 정돈된 옷들을 보며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고, 옷을 살 돈으로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사 읽으며 겉이 아닌 내면을 단단히 치장하는 뿌듯함도 맛보았다. 그리고 옷가게로 즐비한 곳이 아닌 한적한 곳을 산책하며 지쳐있던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겨났다.

챌린지는 끝났지만 이상하게도 "이제 옷을 마음껏 사야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옷을 쉽게 사는 것을 경계하고, 옷을 사는 그 손에 더욱 신중함을 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여러 환경 문제를 초래하는 끔찍한 옷산을 알게 된 자의 업보로, 나는 이 챌린지를 쉬이 멈출 수 없을 것만 같다. 

오늘부터 다시 1일, 옷장을 열고 나의 외모뿐 아니라 내면까지 더없이 빛나게 해줄 옷이 어떤 것일까 고민하며 기분좋게 아침을 열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옷의 편리함의 이면에 숨겨진 민낯을 깨닫고 경각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태그:#옷을위한지구는없다, #거대옷산, #옷쓰레기, #옷소비줄이기, #옷안사기챌린지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상의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는 에세이작가가 되고 싶은 작가지망생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