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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인 12월 30일, 사무실 나오면서 오늘은 써 봐야지 했습니다. 며칠 전 떠나신 조세희 선생님 추모글을 쓰기로 했는데 웬일인지 써지지 않았습니다. 각별했던 시간이 눈앞에 너무 선해서였는가 봅니다.

사무실 도착해 핸드폰을 켜니 콜텍 13년 해고자였던 임재춘 형 문자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조문은 6시 이후에 가능합니다.' 무슨 얘기지, 연로한 부모님께서 계셨나, 아닐 텐데 하고는 열어보니 이상한 내용이었습니다. '고 임재춘님'이라니, '임재춘 본인상'이라니. 

이상해서 재춘형과 함께 투쟁 정리 후에 지금은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상근자로 일하는 경봉형에게 전화를 해보았습니다. 새벽에 저혈당 쇼크로 병원에 실려 가 운명했다는 이야기. 참, 기가 막힌 이야기.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당시 농성장으로 대전 콜텍 해고자들이 찾아 왔었습니다. 해고 500일 맞이 문화제를 서울에서 하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빈 공장 찾아가 만나기도 했던 인연들이라 뿌리치기 힘들었습니다. 길게는 20~30년 기타만 만들던 장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짧아도 10년이었습니다.

출근 시간보다 1~2시간 빨리 나오게 해도, 일손이 달려 집에 있는 아내를 불러들여 잔업, 철야를 하면서도 기타를 만들며 나오는 조금의 월급에 감사하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자꾸 밖을 쳐다보면 생산성 떨어진다고 창문 하나도 없던 공장. 밀폐된 도장실에서 유기용제에 노출되어 직업병 앓는 사람이 전체의 59% 넘어가도, '빼빠질'과 그라인더질, 기타줄 당기고 피스 박다가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려도, 기관지 천식자가 36%를 넘고, 만성기관지염 환자가 40%를 넘어가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인천 콜트 공장에 노조가 생기자 통기타 라인을 빼내 대전에 콜텍을 별도로 설립하곤 온갖 노동착취, 인권탄압을 자행했던 회사였죠. 맨 먼저 한 일은 박영호 사장이 갈라치기 해 둔 인천 콜트와 대전 콜텍 해고노동자들을 공동투쟁으로 묶는 일이었습니다.

그 많았던 이들의 연대
 
2022년 개봉한 이수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재춘언니>
 2022년 개봉한 이수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재춘언니>
ⓒ 생의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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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 악기는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와 중국 대련에 소재한 최첨단 생산공장으로부터 연간 100만 대에 육박하는 기타를 생산·수출하고' 있었습니다. 국내 공장만 운영하던 때도 이미 세계 기타의 1/3을 생산하는 알짜기업이었습니다.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인 '아이바네즈, 깁슨, 휀다, 마틴, 아바론, 센트루이스' 등을 생산했습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박영호 사장은 1999년 중국 공장까지 설립하고는 천천히 국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습니다. 주문을 모두 해외로 빼돌리고, 국내 공장은 위장 위기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중국 공장에서 3천여 명의 노동자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주식상장도 하지 않은 1인 지배 회사인 콜트·콜텍 악기의 박영호 사장은 1200억 원대의 '소문난 알부자'로 한국 부자 순위 120위에 선정되기도 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경영상의 위기'가 있었을까요. 사악한 법원은 근로기준법상의 정리해고제 무력화를 위해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에도 정리해고가 합법'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콜트 콜텍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박근혜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의 정부와 자본을 위한 재판 거래 목록이 되기도 했습니다.

2008년 문화제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노순택, 명인, 연영석 등과 전미영, 이윤엽, 나규환 등의 파견미술팀, 홍대 클럽 빵의 김영등, 그리고 문화연대 벗들과 상의해 문화예술인들이 앞장서서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지키자는 공대위를 꾸렸더랍니다. 2019년 마침내 복직되던 날까지 11년을 함께 웃고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 세월 동안 다큐 감독 김성균과 강성훈은 <꿈의 공장>과 <기타이야기> 두 편의 다큐를 만들어주었고, 이수정 감독은 작년에 <재춘언니>를 개봉해 주었고, 이란희 감독은 극영화 <휴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연극인들은 <구일만의 햄릿>을 만들어 이들을 배우로 세웠고, 음악인들이 나서서 평생 기타를 만들면서도 정작 칠 줄도 모르던 이들을 도와 '콜밴'이라는 멋진 밴드를 만들어 주었죠. 홍대 앞 클럽 '빵'의 김영등 벗은 10년여 동안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노순택, 한금선, 정택용, 조재무 등 사진가들은 <빛에 빚지다>라는 예술사진달력을 만들고, 투쟁기금을 모아주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글쓰기는커녕 철자조차도 틀리던 재춘형을 도와 농성일지를 연재하게 하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네잎크로바 간행)라는 참 기막힌 책을 출판해 내기도 했지요.

☞ 임재춘 농성일지 보기(http://omn.kr/1pvd9)

성효숙, 전진경, 정윤희 등 미술인들은 2012년 다시 점거에 들어간 인천 콜트악기 빈 공장에 함께 들어가 2013년 2월 5일 공권력 투입으로 끌려 나오기 전까지 빈 공장을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만들기도 했었지요.

민중가수들과 홍대 인디밴드들을 중심으로 한 음악인들은 공대위 시작 무렵 7일간의 연대콘서트를 시작으로 해서 참 긴 시간을 함께해 주었고요. 랑, 기선 등 노동인권 활동가들과 이원재, 신유아, 이두찬 등 문화연대 벗들의 긴 세월 연대가 그 막막했던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기도 했었죠. 그 많았던 이들의 연대를 어찌 다 기록할 수 있을까요.

쉬지 않고 싸워왔던 13년
 
투장 현장의 임재춘 형
 투장 현장의 임재춘 형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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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동안 투쟁도 오지게 했었죠. 차마 얼굴을 마주보기 미안하던, 분신했던 이동호. 국회가 건너다보이는 양화대교 송전탑에 올라가 고공 단식농성을 하던 이인근. 서울 강서구 등촌동 본사에 항의하러 들어갔다가 1시간도 안 돼 경찰특공대에 모두 끌려 나오던 여성 조합원들. 단식하던 방종운 형과 재춘형. 삼보일배, 오체투지, 삭발… 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봤지요. 세계의 음악인들과 악기 판매상들에게 박영호 사장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미국·독일·일본·인도네시아 등 총 일곱 번의 해외 원정 투쟁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국제연대도 많았습니다. 2010년 1월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적인 악기쇼 '남쇼(NAMM Show)에 갔을 땐, 세계적 록그룹 'RATM'의 탐 모렐로와 남쇼의 공식 초청홍보대사이자 방금 전 미식축구 프로리그 결승전에서 공연을 하고 온 피닉스 벤자민 등이 공식 지지 선언과 공연에 함께 해주기도 했었죠.

탐 모렐로는 "기타는 결코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다국적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려 한다면 이에 대한 노동의 투쟁 역시 다국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한 '월드와이드 레벨 송'(Worldwide Rebel Song)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기타 회사 아발론의 스티브 맥윌리스는 "우리는 박영호 사장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거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었죠. 미국의 기타 회사 ESP의 맷 매시안다로 회장도 "우리는 더 이상 콜트와 관계가 없다, 박영호 사장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도 거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주 거래사인 휀다에서는 여론에 밀려 공식적인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었죠. 이런 전 세계 음악인들과 연대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십수만 명이 몰리는 일본 '후지락 페스티벌' 사무국에서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공식 초청해주기도 했었죠.

그 기간 살아야 해서 수세미를 만들어 팔아 보기도 했고, 여러 해 동안은 된장·고추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더랍니다. CMS를 조직하러 다니기도 했고, 여러 기금을 모아 보기도 했던 아련한 시간이었습니다. 국회 앞에 단식농성장을 꾸려보기도 하고, 정부종합청사에 농성장을, 법원 앞에 농성장을, 광화문광장에 농성장을 꾸려보기도 했습니다.

매주 낙원동 악기상가 앞에서 음악인들을 상대로 하는 문화제를 열어보기도 하고, 콜트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던 이정선 동덕여대 예술대 학장을 찾아 동덕여대 앞을 찾아다녀 보기도 했습니다. 콜트콜텍 광고에 출연한 양희은 선생과 만나 이런 피 묻은 기타의 진실을 전해보기 위해 노력해보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이제 와 얘기지만 그들은 콜트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정선 교수와 콜트문화재단 이사로 있던 한 분,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 했던 한 분(?)만 기꺼이 손을 잡아주어서 얼마나 감격했던지 모릅니다. 그분과의 소중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따로 누구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13년에 걸친 법정 투쟁, 왜곡된 기사를 쓰던 언론과의 투쟁, 노조가 뭔지도 모른 채 일하다 해고당한 콜텍 노동자들의 사실을 왜곡하며 '콜트콜텍이 강성노조 때문에 망했다'는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싸우던 시간들 등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싸워왔던 그들의 13년을 어찌 모두 말할 수 있을까요?

이 허전함과 쓸쓸함
   
임재춘(오른쪽) 형과 송경동 시인
 임재춘(오른쪽) 형과 송경동 시인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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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모두 '재춘언니'로 불리던 임재춘 형은 1963년 공주에서 태어나 어린 노동자로 이 공장 저 공장 전전하다 1983년부터 의정부 성음악기, 1985년부터는 부평 삼익악기에서 기타를 만들기 시작해 1987년부터는 콜텍에서 일하던 장인 중의 장인이었습니다.

심하게 말을 더듬고 조리 있게 말하는 법도 몰라 늘 동료들에게도 쿠사리나 먹고 농성장에서 밥 짓는 일을 하는 등 궂은일만 도맡아 하던 선하고 착한 형이었습니다. 그 형이 노동운동가 행색을 하던 많은 벗들이 떠난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은 이가 되고, 2019년 끝장투쟁 때는 단식까지 하는 투사로 서 나가던 과정은 참 벅차고도 눈물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재춘 형 잘 살았네'라고 어제 모인 벗들이 그러더군요. 500일 가까이 고공 농성하던 파인텍 친구들도 오고, 또 그렇게 200여 일 고공농성하던 쌍차 벗들도 오고, 전날까지 2박3일 영하 10도 날씨를 뚫고 용산에서 국회까지 노조법2조 3조 개정 오체투지에 함께 했던 비정규직이제그만 벗들이 모두 오고, 한 식구처럼 다정했던 문화예술인들이 모두 오고… 밖에 테이블까지 앉을 자리가 없었으니요. 그럼 뭐 합니까. 형이 마지막으로 차려준 상 위의 것들 어디에도 손과 마음이 가지 않터이다.

애란과 초란 두 따님을 두었는데, 둘째 따님 초란씨 결혼이 4월 15일로 잡혀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야 한숨 돌리고 세상 사는 평범한 맛도 조금 맛볼 시간인데, 어쩌자고 이리 홀연히 가버리는 것인지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형 대신 따님 결혼식은 우리가 지켜주자고 하는데 눈물겹더군요.

형과 주고받은 문자를 올리다 보니 지난 6월, 못난 시집 보낼 테니 주소 빨리 보내라는 말에 "책 사서 한번 다 읽어서 내 걱정 말고 열심히 사회운동 하시요"라는 문자가 남아 있군요. '내 걱정' 말라더니, 이런 소식이라니.

사회운동이고 뭐고 이 허전함과 쓸쓸함을 참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은 나는 이렇게 앉아 가난한 우리들이 그래도 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그 소중했던 시간들이나 소환해보고 있습니다. 영영… 잊지 못할 거예요.

태그:#임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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