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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옮겨온 집 모습입니다.
▲ 하늘에서 본 집 전경 새로 옮겨온 집 모습입니다.
ⓒ 여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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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부터 곱다란 귀벼울(말발굽을 닮은 여울이란 뜻의 굽여울에서 '귀벼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마을로 이사 온 지 1년이 훌쩍 지나갑니다. 직장을 나오고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나니, 부부는 흰 서리 머리칼을 인 채 천둥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도회지 생활 45년을 접고, 낯설고 물 설은 곳을 찾아 들었습니다. 경기도 양평이라고 촌락도 도심도 아닌 그냥 '반시골'이라 부르면 잘 어울리는 고장이지요. 동쪽으로 몇 발짝 더 가면 강원도와 만나는 전철 종착역이 있고, 서쪽으로는 하늘 한끝이 서울에 닿아 있어요. 도회지 내음을 맡지 않을 수도 없지만 마음 먹으면 한 시간 내 청정구역 홍천이나 횡성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입니다. 집 생김새는 박공형 아스팔트 슁글 지붕을 얹은 복층 목조 주택이고, 편백나무 벽재 거실과 함께 보일러실과 창고를 양 쪽에 거느리고 남서서쪽을 향하여 앉아 있습니다.

건평을 빼고 나면 80평 남짓한 잿빛 잔디밭엔 밤새 새끼 두더지가 지나간 흙무덤이 두어 개 쌓이고, 키 낮은 울타리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박새 예닐곱 마리가 지저귑니다. 새벽을 건너와 아침이 찾아오면 밤새 두껍게 내린 어둠이 남한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에 밀려 나가며 동녘을 불게 물들입니다. 지붕을 훑고 창문을 들여다보던 햇발이 석양을 수놓을 땐 2층 침실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 앞산 능선 풍경이 볼 만합니다. 혹독한 엄동설한을 견뎌낸 주목나무 한 그루와 봄, 여름에 열 일 다한 영산홍 울타리, 그 앞에 오똑 선 단풍나무가 경칩을 며칠 앞 두고 보드라운 햇살에 기지개를 켭니다. 십 미터는 될까요, 흉내만 낸 텃밭 짧은 이랑에는 반갑잖은 잡초 한 무더기가 벌써 푸르스름한 머리를 들어올립니다. 올 봄여름엔 잡풀과 한번 더 긴 씨름판을 벌여야 할 것 같습니다. 

거실에서 날짜 지난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아내가 모닝 커피 한 잔을 들고 옆에 앉습니다. 밤새 앞집 고양이가 놀다간 잔디밭 곳곳이 파헤쳐졌다며 애먼 나한테 눈을 흘깁니다. 우롱차 한 잔씩을 들고 두 사람은 대문을 나섭니다. 5분여를 걸어 남한강변 산책로를 들어서니 부지런한 이웃 어르신이 산책을 마치고 들어가며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옆얼굴을 스치는 강바람이 아직 남아있는 늦겨울을 배고 있는 듯 차갑습니다. 사람은 체력이나 지력보다 감정이 먼저 늙는다고 합니다. 감정의 노화 속도를 늦춘다는 숲과 강물과 바람의 삼중주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힘에 감사할 뿐입니다. 

환갑 지나 머리에 흰서리 맞은 아내가 5일장에 먹을거리 장 보러 간다고, 손주까지 본 할애비한테 데려다 달라고 응석을 부립니다. 못 이기는 척, 함께 집을 나서 시장으로 차를 달리는데 도로 오른편에 전망 좋은 커피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간도 넉넉하고 커피 냄새도 맡을 겸 숍 문을 들어섭니다. 2층 계단식 테이블에 앉으니 전망 만점입니​다. 케이크 한 조각에 향내 그윽한 원두커피를 마시는데, 땅거죽 뚫고 올라오는 봄 기운 출렁이는 2월의 한나절이 익어 갑니다.

이윽고 마트에 도착합니다. 쇼핑백을 들고 아내를 따라다니며 고른 물건을 집어넣기 바쁩니다. 상가번영회에서 2만 원어치를 사면 쇼핑백을 주고 3만 원 이상을 사면 1등으로 모닝 승용차 1대가 걸려 있는 경품권을 준다고 합니다. 7900원짜리 계란 1판, 생강 조금 980원, 고등어 한 손 7800원, 쪽파 1단 3500원, 1900원짜리 시금치 1단, 파프리카 3개 1020원, 마지막에 큰맘 먹고 소고기 한 팩 1만9860원.... 경품권 1장을 받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내 폰에는 작은 며느리가 보낸 생일 케이크 알람이 울고, 아내 폰에는 손주가 뒤집기 성공했다고 보낸 동영상이 돌고 있습니다. 큰며느리는 사돈네 둘째 딸이고, 작은며느리는 친정 큰딸입니다. 딸 귀한 우리 집안에서 며느리 둘은 새로 얻은 딸입니다. 큰딸은 애교 부릴 줄 알아서 이쁘고, 작은딸은 요리조리 챙겨줘서 이쁩니다.

봄을 준비하며 조금씩 길어지는 2월의 해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면서 윤슬 반짝이는 강물에 하루를 빠뜨립니다. 금세 초나흘날 눈썹달이 물드는가 싶더니 앞산 능선 아래로 떨어지며 작은 마을은 어둠에 빨려 들어갑니다. 머리 위쪽부터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 별들이 여덟 시경이 되자 온 하늘을 수놓습니다. 2층 발코니에서 내다보이는 골목마다 뜨문뜨문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은 마을로 내려온 별입니다. 더 또렷한 별을 보고 싶어 집 안의 불을 모두 끄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마침 앞·뒷집, 양 옆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없어 주위는 더욱 깜깜해지고, 그만큼 별은 더 빛납니다.
 
벽난로를 안고 있는 거실 모습
▲ 편백나무로 벽재 거실 벽난로를 안고 있는 거실 모습
ⓒ 여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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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강가로 나갔습니다. 강 건너편에는 네온사인 불빛을 머금은 붉은 별들이 수면 아래로 떨어지며 별무늬를 아로새깁니다. 하늘에 뜬 별, 마을로 내려온 별, 강물 속에 빠진 별. 바깥의 별은 모두 일품입니다. 우주라는 무대에선 풀잎 한 장, 이슬 한 방울, 구름 한 조각과 사람 한 명은 다르지 않습니다. 풀잎도, 이슬도, 구름도 결코 별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별이 되고 싶어 아름다움과 이름을 찾아 헤매는 존재는 사람 뿐입니다. 오늘 저녁 만난 별들은 모두 자연의 별입니다.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 나도 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우치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른 집안에서 자라 부부의 연을 맺었을 뿐인데 이제 아내와 나, 두 사람은 연륜을 쌓으며 닮아갑니다. 바깥 직장만 핑계대고 집안엔 소홀했던 나와 달리 아내는 안팎을 챙기면서 위아래를 가족으로 묶어내는 일에 밝았습니다. 청소 한 번 하는데도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호흡이 짧았던 아내, 가냘픈 몸으로 벅찬 일들을 소화하면서 자신을 조금씩 묻어갔습니다. 여자로서의 아름다움, 세상에 자신을 세우는 자존감, 나답게 해 주는 소중한 꿈을. 묻는다기보다 승화시켜 간 것일까요. 장미의 아름다움 대신에 무화과의 향기로, 긴 시간 자존감을 묻고 자라는 땅속 죽순의 인내로, 꿈을 휘발시켜 두 아들의 자양분이 되는 것으로 흡족했습니다. 기우는 한 쪽을 균형 잡아 두 사람이 일가를 이룰 수 있도록, 세상에 작지만 튼튼한 세포가 되기를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내라는 작품에 비하면 나는 너무 초라하답니다. 어느덧 우리 나이테를 먹고 자란 두 아들은 산이 되어 우뚝 솟았고 각자 짝을 찾아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동안 쬐어준 햇볕, 다독거려준 손길, 가리켜 준 눈길 따라 제 길을 잘 가 주어 더없이 고맙습니다. 피가 섞여서라기보다 아내와  내가 쏟은 땀과 사랑이 버무려져 빚어진 나름의 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작품으로 선택하여 만난 한 아내와 남편, 아버지의 검박한 바탕과 어머니의 뾰족한 끼가 합쳐져 매달린 열매라고 해야 할까요.
 
집 북쪽 울타리에서 남한강을 굽어보는 소나무
▲ 울타리를 겸한 지키미 소나무 집 북쪽 울타리에서 남한강을 굽어보는 소나무
ⓒ 여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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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도 중턱까지 올라온 남편과 아내, 두 아들과 새 가족이 된 두 며느리, 지난해 5월에 태어난 손주까지. 이렇게 우리를 빚어낸 공신은 아무래도 아내입니다. 콩나물시루를 빠져나온 물이 된 두 며느리의 시어머니는 딸 둘을 덤으로 얻었다고 기뻐합니다. 그런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는 초보 할아버지도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초로의 길로 들어서는 부부, 이젠 조금씩 친구가 되어가는 두 사람 가슴에 오늘도 한 뼘 행복이 커 갑니다.

태그:#양평전원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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