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4일 오후 4시 42분]
부산 옛 임시정부청사와 임시수도 기념관이 있는 부민동. 오늘날 석당박물관인 옛 정부청사는 한국전쟁 시절 부산 피란민들의 역사가 담겨 있는 터전이기도 하다. 정부가 수도로 귀환하고 나서는 일제강점기 때처럼 경남도청 청사였다가 창원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부산고등법원으로 이어져서 법조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법원이 거제동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동아대 캠퍼스로 변모해 오늘에 이른다.
해방 이후 부민동 역사와 함께한 부산의 노포가 하나 있다. '원조 18번 완당 발국수'. 故 이은줄(1913~1981) 옹이 부민동에서 1947년 창업한 후, 오늘날 2대 이용웅, 3대 이상준 공동대표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식사 시간만 되면 상당히 붐비는 가게인데, 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3대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준 대표를 만나보기로 했다.
가게 이름이 왜 '18번'이냐면
- 원조 18번 완당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47년 제 할아버지께서 창업하셨습니다. 해방 전에 조부모께서 일본(오사카와 고베)에 계셨는데, 할아버지께서 일본 음식점에서 요리를 배우셨어요. 해방 이후 부산 부민동 일대에서 좌판식으로 손수레를 끌고 장사하셨어요. 그리고 50년대인가 현재 식당에서 두 블록 위에서 우물이 있는 초가집에서 먼저 터전을 잡고, 1972년 이곳으로 이전해서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18번'은 아시다시피 일본 가부키에서 가장 사랑받은 작품을 의미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일본생활을 하셔서 이렇게 이름 지으셨지요."
- 완당집의 대표 메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주로 방문하는 연령대와 손님들이 좋아하시는 이유는?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는 발국수와 완당입니다. 발국수는 메밀국수와 같다고 보시면 되고요. 완당은 원래 중국의 훈둔이었는데, 작은 물만두를 끓인 육수에 넣어 먹는 음식이죠. 좋아하시는 이유는 첫 번째는 맛이고, 두 번째는 부담스럽지 않다는 거예요. 있는 재료 그대로 써서 자극적이지 않죠.
보통 완당집이라 겨울에 바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발국수도 인기 있어 오히려 여름에 손님이 몰려요. 발국수와 완당은 할아버지께서 처음 창업하실 때부터 판매했어요. 지금은 발국수, 완당, 우동이 주가 되지만 초창기에는 메뉴가 이것보다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한때 야끼소바도 했었는데, 효율성을 위해 메뉴를 줄였지요.
평균연령대는 어림잡아 말씀드리는 거지만, 주로 40~70대 중장년층이 많아요. 만두피가 얇아서 잘 넘어가요. 그리고 주변에 병원이 많은데, 환자분들을 위해 포장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죽처럼 안 씹어도 되니까요. 추억 때문에 오시는 분들도 있는데, 어머니와 손잡고 왔던 다섯 살 아이가 이미 장성해 자녀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아요. 물론 어머니는 할머니가 다 되었죠. 단골 손님이 많은 거죠."
- 오랫동안 노포를 운영하시면서 맛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좋은 재료를 써야 하고요. 레시피대로 정확히 맞춰야죠. 그리고 면 종류의 음식은 시간 관리가 생명입니다. 이를 주인과 주방장이 항상 체크해야 하고요. 어찌 보면 가장 기본이죠. 음식맛이 자주 변하는 집이 있다면, 십중팔구 주방장이 자주 바뀌거나 주인이 신경을 안 쓰는 집이에요. 본인이 직접 라면을 끓여도 어떨 때는 퍼지고 어떨 때는 꼬들꼬들하지 않습니까? 발국수와 같은 면 음식은 타이밍이 매우 중요하죠. 완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나오는 완당과 1분 동안 국물에 넣어 불어난 완당의 맛 차이가 어마어마하거든요.
또 하나 예로 완당을 하는데 간장이 100g 들어간다고 칩시다. 그런데 95g을 넣잖아요. 제대로 된 맛이 안나요. 95g은 무효가 되는 거죠. 5g차이는 어머어마하죠. 그래서 정량과 시간을 맞춘 레시피가 중요합니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몇 인분의 요리를 하냐에 따라서도 달라요. 이건 주방장의 경험이 필요한 부분이죠. 바쁜 점심시간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메뉴로 주문하니, 주방장의 역량은 더욱 강조되지요. 그래서 사람을 관리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큰 주방장님은 나이가 70대, 작은 주방장님은 벌써 60대, 경력 있는 40대 두 분 그리고 종업원 어머님들의 경력은 보통 20년이네요. 왜 오래 계셨는가 생각해봤는데, 월급이나 대금지급 등 정산이 밀린 적도 없고, 어머님께서 종업원분들을 굉장히 잘 챙겨주세요.
약 20년 전에 여 종업원 한 분이 원래 고기집에 일하시는데 저희 가게에 1주일 대타로 오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도 저희 가게에 계세요. 나중에 왜 계셨냐고 여쭈어봤죠, 재료비나 대금 지급을 미룬 적이 없는 것을 보고 결심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단순히 장사가 잘 되니깐 그럴 수 있지 생각하시겠지만, 주인이 항상 신경을 쓰고, 같이 일한다는 느낌이 중요한 것 같아요."
100년 가게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 처음에는 수작업으로 하다가 나중에 기계를 도입했다면서요?
"맞아요. 사실 아버지께서 가게를 48세부터 맡으셨어요. 대학에서 섬유를 전공하시고 구로공단 섬유공장에서 공장장을 하셨어요. 조모께서 나이가 드시면서 완당집을 정리하시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말리셨지요. 사업을 물려받을 때는 주로 동네 주민들이 많이 오셨는데, 2000년대에 방송 타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오셨어요.
옛날에는 완당과 발국수를 손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엄청 힘들어서 일본에서 기계를 사오셨죠. 30년 전 당시 우리나라에는 소규모 가게를 대상으로 한 자동제면기계를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하지만 일본은 면이 발달한 나라라 이런 기계들이 많았지요. 바로 도입하고 나서 식당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죠. 또한 기계를 도입하고 나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전국에서 오는 손님을 응대할 수 있었어요. 이제 연식이 오래되어서 기계를 바꾸려고 하는데, 요즘에는 국산도 좋은 것이 많아서 살펴보고 있어요."
- 다른 식당과 비교했을 때 차별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오히려 옛날 식으로 한다고 할까요? 조부께서 하던 레시피를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우동도 요즘 유행하는 가쯔오 대신 멸치육수가 들어가죠, 사리도 옛날 우동식이고요. 완당과 발국수 육수도 멸치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인터넷 광고 안 해요. 솔직히 입소문만큼 무서운 게 없어요. 그리고 방송국에서 저희를 찾아와요. 저희가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블로그 광고 작업도 하지 않고요."
- 완당 집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게 있나요?
"어머니께서 운영했을 때는 7인분 반의 발국수와 돌냄비우동 한 그릇을 드셨던 스님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까지 저희 가게 최고 기록입니다. 롯데자이언츠 고 최동원 투수도 기억납니다. 고등학교 선배님이시고, 저희집 단골이었어요. 돌아가시기 전년도 가을이었나 저녁 8시쯤까지 장사할 때인데, 7시쯤 전화가 왔어요.
부산에 막 진입했는데, 몇 시까지 하냐고 여쭈어 보더라고요. 8시까지 한다니까 최대한 빨리 가겠다고. 퇴근길 막히는 와중에도 7시 40분에 도착하셔서 완당을 드시고 가셨어요. 그런데 몇 달 지나서 TV에 나오셨는데 얼굴이 상당히 초췌해지셨고, 이후 바로 세상을 떠나셨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가슴이 먹먹했죠."
- 음식점 일은 상당히 고된 일로 압니다만, 대표님께서 가업을 잇기로 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할머니께서는 제게 항상 말씀하셨지요. 너는 절대 장사하지 마라. 물론 부모님께서도 장사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았죠. 대학에서도 경영학과를 전공했는데, 군대 다녀오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어요. 가보니까 100년 넘은 점포들이 인상 깊었어요. 그리고, 4학년이 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하지 않으면 100년 가게가 될 수 없겠구나. 무조건 100년 운영하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일본에 한 번 더 갔어요. 그때는 일본 공장에 가서 일했어요. 처음에는 오사카 옆 효고현 가서 육수제조 기계공장에서 9개월 동안 일했고, 이후에는 오키나와 소바 공장에서 4개월 일하다 왔어요. 공장을 경험하고 나서는 2006년도부터 부모님을 도와 가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장손이어서 책임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 보통 사업을 확장하면 프렌차이즈처럼 분점을 내는데, 76년 동안 분점을 내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관리가 어려워요. 사실 사업 확장하신 분들이 대단하신 분들이죠. 2000년도부터 저희 집이 소문나면서 체인점 달라고 엄청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진짜 많이 왔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체인점, 분점을 하나도 안 주셨어요.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본점 하나 하기도 아침부터 밤까지 관리하느라 바빠서 힘든데, 제가 체인점을 관리할 수 있겠냐면서요. 그리고 맛을 지켜야 하는데, 분점을 내면 더 하기 힘들죠. 맛과 타협한 순간 손님들이 맛이 변했다는 걸 무조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말씀드릴 것은 카운터에 주인이 있어야 해요. 특히, 메인 시간에는요.
가끔 음식 맛이나 서비스가 손님 기대에 못 미칠 때가 있어요. 카운터에 주인이 없어 봐요. 그 집 음식 맛없고 서비스도 엉망이다, 주인 신경 쓰지 않는다 입소문 나고 다시는 안 오십니다. 이게 정말 무서워요.
그런데 주인이 있으면요, 손님의 불만을 바로 응대할 수 있어요. 손님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거죠. 어마어마한 차이죠. 주인이 가게를 자주 비우면 매출은 서서히 줄어듭니다. 처음엔 잘 몰라요. 하지만, 한번 떠나간 손님을 다시 모시기란 거의 불가능하죠."
- 76년 역사면, 한국전쟁, 석유파동, IMF 경제위기와 최근 코로나19까지 굵직굵직한 위기 상황이 있었잖아요.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사실 저희 가게는 운이 좋았어요. 한국전쟁과 석유파동은 제가 잘 모르겠지만 어려웠겠죠. 다만 그 당시 장사가 잘 되었던 이유는 다들 어렵게 살아서 완당이 맛있게 느껴진 것 같아요. IMF 경제위기와 코로나19를 돌아보면, 저희가 경기를 타지 않는 밥집인 것 같아요. 주로 점심 비중이 크고 고깃집처럼 단체로 오는 손님의 비중이 적어요. 코로나19 때 사실 매출은 줄었어요. 그런데 점심을 드시려 오시는 분들이 있어서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오시는 분들도 보통 2~3분이기도 했고요."
- 마지막으로 오마이뉴스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경기가 어렵잖아요. 모두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창업은 하기는 쉽지만 유지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다만 조부모와 부모님께서 사업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사업을 올바르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첫 번째로는 변함이 없어야 하고요. 두 번째는 부지런해야 해요. 특히 손님들과 종업원들을 세심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죠. 세 번째로는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해요. 특히 저 같은 3세 경영인의 경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경우가 많아 돈 때문에 한눈팔 때가 많아서 이를 경계해야 해요. 할머니께서 어릴 때 식당에 있을 때 뒷문으로 다니게 했죠. 제가 카운터 돈에 한눈팔까 봐. 사업을 유지하려면,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원조 18번 완당이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을 지키는 꾸준함과 부지런함이다. 3대가 운영하는 완당집에서 배운 점은 바로 초지일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