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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내린 14일 오후 서울시내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쓴 채 이동하고 있다.
▲ "빗방울이 뚝뚝" 소나기가 내린 14일 오후 서울시내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쓴 채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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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가구의 빨래 담당인 나는 비 소식에 예민하다. 건조기를 쓰지 않으므로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하여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베란다 건조대에 널은 빨래가 잘 마른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치면 눅눅한 상태로 빨랫감이 방치되거나, 세탁을 마친 옷감이 마르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요사이 느낌이 썩 좋지 않다. 슈퍼 엘리뇨 현상으로 역대급 장마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매년 장마철이면 빨래와 전쟁을 벌였다.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세탁 간격을 짧게 하고, 건조대 옆에 선풍기를 켜놓았다. 활동량이 많은 두 아이와 땀을 잘 흘리는 부모의 조합은 세탁량을 폭증시킨다. 

더군다나 올해는 '장마 괴담'이라 부를 정도로 분위기가 나쁘다. 습기 산업 업체들도 장마를 표적으로 삼았는지 대대적으로 물품 홍보를 벌이고 있다. 최근 사람들이 부쩍 사들이는 물건은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제습기, 건조기, 에어컨으로 대표되는 습기 제거형 가전이다. 장마철 실내 생활용 물품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레인코트, 레인부츠 등 실외용 방수 제품이다. 

레인부츠 없는 내가 비 내리는 날 선택하는 신발

우리 집에는 입주 때 달려있었던 에어컨을 제외하면 장마철 특수 제품이 없다. 어차피 유행에는 상술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슈퍼 엘리뇨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해서 지갑을 열지 않는다. 나는 평소에도 식기세척기와 무선 청소기, 안마기 없이 지낸다. 사소한 기능 몇 가지로 집의 공간이 줄어드는 것이 싫다. 같은 맥락에서 제습기나 건조기도 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광고에 넘어가 질렀다가는 두 달 뒤 후회할 것이 뻔했다.

당연히 레인부츠도 없다. 운동화를 신을 수 없을 만큼 비가 내리면 맨발에 슬리퍼를 신거나, 고어텍스 처리가 된 트레킹화를 신는다. 외관상 일시적으로 못 생겨지긴 하지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마당에 다른 사람 신발을 쳐다보고 다닐 사람은 별로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레인부츠가 오히려 습진과 무좀을 유발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또 장화를 레인부츠라 재포장해 값을 올려 받는 것도 못마땅하다.

레인코트 역시 마찬가지다. 디자인이 매끈한 신상을 따로 사지 않았다. 나는 군대에서 비가 오면 판초우의라 불리는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방수 용품을 강제로 착용한 기억이 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다. 차라리 옷이 조금 젖더라도 무더운 여름날 레인코트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걸치고 싶지 않다. 

비옷 류는 밖에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실내로 들어가면 매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보관할 공간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나는 심플하게 흐린 날 입던 대로 우산만 하나 들고 다닌다. 혹여 티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기 곤란한 날씨라면 생활방수 기능이 있는 바람막이를 걸친다. 나는 기본적으로 일반 복장으로 외출이 불가능한 날씨라면 실내에 머무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캠핑이나 낚시 마니아가 아니라면 굳이 용도가 한정적인 물품을 구매할 까닭은 없어 보인다. 

나와 아내가 물건에 예민한 이유
 
합성 세탁 세제 대용으로 사용하는 천연 세제 소프넛, 의외로 세정력이 뛰어나다.
 합성 세탁 세제 대용으로 사용하는 천연 세제 소프넛, 의외로 세정력이 뛰어나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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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중하게 물건을 고른다. 대신 한 번 구입한 물건은 고쳐서 오래 사용한다. 2014년 5월에 결혼하면서 장만한 유선 청소기를 호스만 교체해서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 스물일곱에 구입한 첫 차도 십 년, 십칠만 킬로미터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빨래 건조대는 지인에게 받은 중고 물품을 7년째 애용한다. 스마트폰은 아내의 경우 4년 6개월, 나는 3년 7개월째 같은 모델을 유지하고 있다. 고장 나지 않는 한 교체 계획은 없다. 

물건 면에서는 검소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경제적 목적을 위해 물건을 많이 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아내와 나는 부부 합산 휴직 기간이 5년 반이다. 내년에도 내가 휴직을 할 계획이므로 거의 7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만일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냥 열심히 일해서 계좌를 더 불렸을 것이다. 한 사람이 일을 하냐 안 하냐에 따라 가정 수입 격차는 크다. 

나와 아내가 물건에 예민한 이유는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다는 우리의 가치관 때문이다. 싱글일 때는 몰랐는데, 아이를 둘 키우다 보니 적당히 시간을 누리면서 깨끗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시간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휴직을 한다든지, 모임을 조절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통제가 가능했다. 반면 날씨나 환경은 우리의 역량 밖에 있는 변수였다. 

큰 아이가 태어난 2015년 이래 이상 기후는 매해 문제를 발생시켰다. 해마다 미세먼지와 산불 이슈가 있었고 슈퍼 태풍, 슈퍼 엘리뇨 등 기상 관측 데이터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속적이고 강력한 현상이었으므로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환경단체에 정기 후원을 하고, 잡지와 단행본을 읽었다. 액체 샴푸와 폼클렌징 대신 비누를 쓰고, 치약과 설거지 세제도 천연 고체 제품으로 바꿨다. 플라스틱 포장용기가 나오는 것이 싫어서 다회용 통을 챙겨가 음식을 받아왔다. TV는 처음부터 사지 않았고, 로봇 청소기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불타는 캐나다 숲, 땅이 녹아내리는 시베리아
 
몇 가지 천주머니와 저장 용기만 있으면 포장지 없이 식재료 구입이 가능하다.
 몇 가지 천주머니와 저장 용기만 있으면 포장지 없이 식재료 구입이 가능하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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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내린 우리 나름의 결론은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지 않는 것이 환경적인 것이다'라는 다소 위험한 명제다. 반사회적, 반문명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물론 맞벌이 직장 생활자에 아이 둘과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므로 '자연인'으로 살 수는 없다. 출근하려면 40분가량 차를 몰아야 하고(강원도는 대중교통이 촘촘하지 않다), 아이들이 졸라대면 놀이동산에도 가야 한다. 하지만 뚜렷한 삶의 지침을 가슴에 새겨두면 생활하면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태평양에는 대륙 사이즈의 거대한 쓰레기 부유물 섬이 있다. 기온이 상승하며 한반도의 생태계 다양성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초강력 태풍과 슈퍼 엘리뇨 현상은 인간 사회가 탄소 배출물을 줄이지 않는 한 반복해서 발생할 재앙이다. 캐나다의 숲은 불타고, 왕년의 영구동토 시베리아는 땅이 녹아 지하의 메탄가스가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온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과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우리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

나는 역대급 장마에 대비해서 아이템 몇 가지를 서둘러 구비하는 현상에 회의적이다. 근본적으로 지구의 체질을 바꾸는 방향을 취하지 않으면 기후 관련 문제를 피할 수 없다. 물건으로 잠깐의 위기를 넘길 수는 있겠으나, 계절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또 다른 물건으로 버텨야 한다. 자원을 소비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버리면서 경제 규모를 키워나가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병폐다. 지구의 재생력에는 한계가 있고, 자원 또한 유한한데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환경 재앙을 피해 갈 수 없는 기본 원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향하는 친환경 라이프는 매우 소박하다. 보잘것없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극히 미미하더라도 내가 개인 단위에서 실천하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유행하는 물건은 일단 거리를 두고 가급적 안 사기, 환경에 해가 덜 가는 방향으로 정책 내는 사람을 선거에서 뽑기, 기왕 물건을 산다면 품질이 뛰어나고 내구성이 뛰어난 친환경적인 브랜드 고르기, 식탁에서 채식 비중 늘리기, 귀찮아도 고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수리하기.

가끔 고행을 즐기는 마조히스트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전혀,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근거는 통장에 쌓이는 잔고다. 똑같이 벌어도 환경을 고려한다는 명목으로 적게 쓰면 생활비가 적게 나간다. 나는 돈을 좋아한다. 생활비가 남으면 채소를 유기농으로 사 먹는 호기를 부릴 수도 있다. 나는 결코 환경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는다. 

슈퍼엘리뇨 발 묵직한 장마가 온다고 해서 제습기를 충동적으로 사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이다. 이론적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기적인 동기를 위해서 '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고도로 단련된 절약가는 환경주의자와 구분할 수 없다, 나는 이 말에 적극 공감한다.
 
못생겨서 시중 유통이 안 되는 유기농 채소를 정기 배송으로 받아 먹는다. 고기 값만 줄여도 유기농을 즐길 수 있다.
 못생겨서 시중 유통이 안 되는 유기농 채소를 정기 배송으로 받아 먹는다. 고기 값만 줄여도 유기농을 즐길 수 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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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장마, #엘리뇨, #레인부츠, #제습기, #건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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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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