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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진주 집현면 봉강리 발굴장 모습
 진주 집현면 봉강리 발굴장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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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73주년이다. 한국전쟁으로 사망한 국군 전사자는 60만 8천 명. 하지만 민간인 피학살자는 이보다 많은 106만 968명이다. 이러한 사실은 암암리에 알려져 있을 뿐 자세히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그동안 국가가 민간인학살은 은폐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현재까지 사과는커녕 피학살자와 유족들에게 배∙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 1기가 발족했다. 전국에서 사건이 7922개 접수됐고, 유형별로 조사한 결과 1만 6572명의 피학살자를 확인했다.

이후 168개 지역에 지표조사를 통해 13개소를 발굴했고 1617구의 유해와 5600여 개의 유품을 수습했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국가 차원의 과거청산 작업을 전면 중단했다.

이에 2014년 2월 18일, 전국민간인학살유족회의 요청으로 시민사회단체(민족문제연구소 주관)가 뜻을 모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을 결성했다. 공동조사단은 제1차(2014년 2월 24일) 발굴지를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산 241-1로 선정했다.
   
제1차 발굴지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산 241-1, 417-2
 제1차 발굴지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산 241-1, 417-2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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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조사단과의 인연

공동조사단은 2014년 2월 20일경 사전답사를 했다. 필자는 이날 첫 발굴단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발군단원인 민문연 회원,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1차 발굴을 시작했다. 

필자도 첫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유해 발굴은 쉽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유해가 노출될지 모르기 때문에 흙을 살금살금 파야 했다. 유해 상태가 좋지 않아 조금만 방심하면 유해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발굴 현장에 도착해 현장을 접하는 순간 충격에 사로잡혀 말문이 막히고 가슴 멍해졌던 것 같다. 

진주 지역에는 학살지 24개소 중 11개소가 명석면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진주형무소(진주시 상봉서동 1098번지)는 명석면에서 10km 이내 거리에 있었고 명석면은 산지로 둘러싸여 학살지로서는 좋은 환경과 조건이었던 것 같다.

그중 용산고개는 세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고 골이 아주 깊다. 고개는 2000년 초 경남대 사학과 고 이상길 교수가 시굴, 유해를 발견해 덮어둔 곳이다.

발굴 이튿날, 본격적인 유해 발굴 현장에 참여했다. 뼈와 유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2월 말 추운 날씨로 땅의 상태가 얼어붙고 군데군데 흙이 질퍽질퍽하여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용산고개는 지형이 아주 습한 곳이라 유해들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조금만 건드리면 부서지고 깨져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조심스럽게 작업했다.

이날은 유해의 뼈 중 가장 강한 부위인 대퇴골과 정강이뼈 위주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두개골은 약하기 때문에 거의 손상된 상태였다. 유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멍해졌다. '인간은 이념의 동물인데 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적 절차 없이 학살한 후 처참하고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죽을지도 모른 채 잡혀 온 이들이 64년 만에 밝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현재 임시안치소 모습
 현재 임시안치소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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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원이 가장 많이 학살된 진주, 왜?
  
진주는 조선 말에 임술농민항쟁(1862년)이 최초로 일어났고,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는 백정 해방운동인 형평운동과 소년운동의 3대 발상지다. 진주사범학교 등 4곳의 중등학교가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됐고, 이를 바탕으로 민중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지리적 조건으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지리산 인근 지역에 위치해 있어 빨치산들로부터 진주형무소 습격을 자주 당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국민보도연맹(아래 국보연)의 좌익활동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48년 10월19일 여순항쟁 이후, 정부는 좌익인사를 전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949년 4월 20일에 국보연을 결성한다. 당시 남로당 등 좌익단체 가입자들은 자수와 동시에 국보연에 가입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진주연맹의 결성선포대회는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사상전향자와 자수자 1000여 명과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으로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후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하고 지서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특히 쌀, 보리 등 식료품을 준다고 회유해 보도연맹이 어떤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가입시켰다.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 오는 인민군 제6사단과 함양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제4사단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한다. 이에 진주는 진주지구 육군특무대(CIC)와 5사단 소속 진주지구 헌병대∙진주경찰에 의해 7월 31일 진주가 함락되기 전인 7월 21일부터 26일까지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 보도연맹원 등 집단학살을 단행한다. 

송진근(해방일보 특파원) 기자에 따르면 피학살자는 애국자(독립운동가) 약 2000명과 보도연맹원 1500명 등 3500명이다. 진주는 현재 학살지 24개소 중 10차 발굴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운명의 논문 한 권

발굴작업 진행 중 어느 날, 당시 강병현 진주유족회장이 논문 한 권을 필자에게 건넸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읽어 보니 대학교 은사이신 고 이상길 교수의 논문이었다.

이 교수는 생전에 경남지역 학살지마다 시굴과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마산합포구 여양리와 문산 진성고개, 산청 외공리, 경상 코발트 등 유해 발굴에 혼신을 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논문을 통해 이 교수가 생전에 유해발굴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 헌신과 노고를 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산고개의 참혹한 학살 현장에서 집단학살범죄(제노사이드)를 은폐한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순간, 필자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만이라도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역사 교사로서 아픈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8종 중 모두 한국전쟁 단원은 있지만 민간인 학살과 보도연맹 관련 내용이 서술된 교과서는 1종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 지금까지 20차 전국유해발굴 자원봉사를 다니고 있다.
 
1차 발굴지 현장 및 유해 노출 모습
 1차 발굴지 현장 및 유해 노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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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발굴지 현장 및 유해 노출 모습
 1차 발굴지 현장 및 유해 노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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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첫 발굴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머리뼈 조각 20개, 허벅지뼈 78개, 정강이뼈 15개, 위팔뼈 6개 등 129점의 유해가 수습됐고, 출토된 유해는 최소 39명이다. 탄두와 탄피가 유해 내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근접 내지, 확인 사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해에서 발견된 안경은 고급스러웠고, 버클인 경우도 앞면에 지리산의 배경이 그려져서 좌익활동자로 추정됐다. 또 지식층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유품은 피학살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용산고개 학살지의 기막힌 사연

4차 발굴을 마쳤을 때, 구수회 어르신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신다기에 찾아뵈었다. 어르신은 용산고개 학살지 건너편 오미마을 주민이다.

'용산고개 학살 현장의 상황이 기억나느냐' 묻자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10살 정도 됐을 때 오미마을 주민들을 매장지를 묻기 위해 동원했는데 아버지도 함께 갔어. 구덩이에 시신을 넣고 차곡차곡 쌓았고, 언덕 풀밭에는 시신의 검붉은 피가 있었고 산골짜기는 핏물로 물들어 있었어.

구덩이에 넣지 못한 시신이 풀밭에 널브러져 있어 고랑에다 던져놓고 흙을 덮었다는 말을 들었어. 그리고 내가 용산고개에 소 먹이러 자주 갔는데 뼈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은 예사였어.

어느 날 친구들과 용산고개 산으로 놀러 가는데 동네 저씨가 포대기에 뭔가를 가득 넣어 들고 산에서 내려오더라고. 내가 '아재 그거 뭡니까?' 하니까 '아가들은 몰라도 돼'라고 하고 내려갔어. 알고 보니 해골과 뼈들을 주워 인근 시장에 팔았다는 거야."


1951년, 큰 홍수가 나 용산고개 계곡에 유해들이 많이 떠 내려왔다. 당시 뼛가루가 간질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한약방에서 주문하면 몰래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찌 유해를 팔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진주지역만 그런 소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학살지 주변은 뼛가루를 팔아 삶을 지탱하며 산 사람이 많았다.
  
용산치 건너편 임시 안치소 컨테이너 모습
 용산치 건너편 임시 안치소 컨테이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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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 안치된 넋들의 아우성

어느 날 발굴단 중 한 명의 지인이 발굴지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발굴단은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 발굴한다. 그런데 방문객이 오후 6시에 도착했다.

발굴지까지는 길에서 200m 정도 올라가야 있어 우리 세 사람은 주소를 가지고 발굴장을 찾아 올라갔다. 조그마한 천막 하나 있고 사람도 아무도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못 찾고 길을 내려오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컨테이너 쪽으로 올라갔다. 건너편에서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도 없었다.

순간 해는 저물어 어둑어둑하고 겨울의 끝자락이라 차갑고 매서운 추위와 날씨까지 흐렸다. 어둠이 바닥에 깔리자 웅성거렸던 사람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컨테이너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뒷골이 당기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섭고 두려웠다. 서로 손을 꼭 잡고 간신히 길가로 내려왔다.

뒷날 사연을 강병현 전 진주유족회장께 말씀드렸더니 당장 위령제를 지내셨다. 그 후 현재까지 필자는 진주 민간인 학살 답사 해설을 맡아 그곳에 갈 때마다 막걸리 한 병과 다과를 준비해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라고 인사하며 다닌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한국전쟁,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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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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