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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비(자료사진)
 떡갈비(자료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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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지금은 시댁이 된 남자친구의 집에 처음 방문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들르게 된 터라 어머니는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고 하시면서도, 집밥에 배달음식까지 이용해 6인용 식탁이 좁아 보일 정도로 한가득 차려주셨다. 환영받는다는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했지만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저 음식들은 어떻게 될까, 잠시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도 호기심은 계속되었다. 나는 어디 내놔도 지지 않을 먹성을 갖고 있지만 어머니가 담아주시는 떡만둣국이나 육개장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미션 수행하듯 꿋꿋이 먹으면서도 과연 이걸 다 먹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들 음식을 남겼고 그대로 버려지는 듯했다.

제 그릇에 담은 음식을 남기다니, 우리 집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남편이 놀랄 차례였다. 남편이 우리 집에 놀러 온 날 엄마도 나름 솜씨를 발휘했고, 먹을 것이 많으니 실컷 즐기라는 뜻에서 밥과 국은 적당히 담았다.

밥도, 국도 절반쯤 담았을까. 나로서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 사실을 의식조차 못했지만 남편은 놀랄 수밖에. 그는 그저 '놀랐다'고 했지만, 어쩌면 환대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았던, 채식에 대한 반응

한국인이라면 비슷한 식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나 다르다. 시어머니는 음식을 부족하게 대접하는 것을 실례라 여기고 친정 엄마는 음식을 버리는 것을 실수라고 여긴다. 요즘 어느 광고에서 결혼을 두 문명의 충돌이라고 하던데,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시댁과 친정에서 공통점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내가 채식을 하게 된 뒤의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어머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단백질이, 그중에서도 동물성 단백질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뿐인가.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됐을 때 나보다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질까 더욱 염려했다는 것도 웃지 못할 공통점이었다. 

시어머니만 그랬다면 서운했을지도 모르지만 친정 엄마마저 그랬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남편은 나와 함께 있을 때 채식을 할 뿐, 밖에서는 여전히 육식을 즐기고 있는데도 말이다. 육식문화를 공부할수록 남자에겐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육식에서 나온다는 강력한 신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채식인이 되었다. 대체로 비건, 때로는 페스코를 왔다갔다 하는 불량한 채식인이지만 가급적 식물을 선택해야 한다는 신념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외식을 할 때면 해이해지기도 하지만 집에서만큼은 완벽한 채식을 이어 나간다. 

시나브로 바뀌고 있는 양가의 식탁에 뿌듯
 
지리산 자락에서 채취하고 재배한 나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것 같다.
 지리산 자락에서 채취하고 재배한 나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것 같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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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도 다르지 않다. 고사리와 도라지, 시금치 등 삼색나물은 동물성 재료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는 나의 최애 메뉴다. 예전엔 무나물과 취나물을 만들며 멸치육수를 넣은 적도 있지만 육수 없이도 깔끔하고 깊은 맛이 나 매번 감탄하며 먹는다. 

잡채와 떡국, 토란국에도 고기 대신 느타리와 표고버섯을 넣는다. 녹두전을 부칠 때도 대파와 고사리, 버섯과 김치를 듬뿍 넣으니 고기의 빈자리를 느낄 틈이 없다. 밀가루 옷을 입히지 않고 애호박과 가지를 그대로 구워먹기도 하는데 이 또한 별미다. 담백한 음식들 덕분에 명절 내내 속이 느끼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부부 단 둘이 있을 때의 모습일 뿐, 양가의 명절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갈비찜과 불고기가 식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나는 나에게 식사를 강요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부끄럽지만, 모두의 식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씩 자격 없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양가의 식탁은 언뜻 보면 그대로지만 시나브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고기를 먹는 절대적인 양이 현저히 줄었다. 이를 파악한 식구들이 '대체 그간 네가 얼마나 많은 양을 먹었던 것이냐'며 농담했을 정도. 그도 한몫하겠지만 분명 그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로 인해 과도한 육식을 경계하게 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식사 자리에 존재하는 채식인의 존재 자체가 식욕을 떨어뜨리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든, 너무도 만족스럽다. 누군가 말하길, 한 사람이 열 발자국 걷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발자국 함께 걷는 것이 더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전엔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무조건 육식만을 메뉴로 떠올렸지만, 이제는 산채비빔밥이나 순두부 같은 것들을 물망에 올리기도 한다.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어린 조카도 이제 내가 무엇을 먹고, 먹지 않는지 알고 나는 그에게 채식인의 존재를 알려줬다는 사실이 기껍다.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면 더 일찍 채식의 길로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명절에도, 나는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식탁 위에 오른 고기도 우리처럼 아픔을 느끼는 동물이고, 가족이 있지만 강제로 분리돼야 했고, 억지로 사육당하고 또 도축되었다는 사실 같은 것들. 그저 그 자리에서 고기를 거부함으로써 내 뜻을 소리 없이 전달할 뿐이다.

태그:#채식, #명절, #육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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